본문 바로가기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 인생의 스승 대 데레사의 고향을 찾아

세계 교회 신앙유산 순례 - 스페인 아빌라
 
인생의 승, 대(大) 데레사의 고향을 찾아
 
글 ∙ 사진 전용갑 요셉
 
 
사실 예전의 스페인은 내게 ‘태양과 정열’의 나라가 아니었다. 공부 욕심 하나만 믿고 홀로 십 년을 버틴 곳이기에 따사로운 기후도 외로움을 그다지 달래주지 못했다. 또한 늘 넉넉지 못했던 주머니 사정으로 마음에 열정 대신 차가운 현실의 냉기가 감돈 시간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스페인에서 내가 얻은 진정한 수확은 가시적인 학위증이 아니라 그 사회에 묻어 살며 경험한 일상과 갖가지 방황, 실수 등 대가를 치르고서야 체득한 인생의 소소한 교훈들이었음을 훨씬 나중에 깨달았다. 여기 소개하려는 아빌라 역시 가난한 유학생 시절 시간을 쪼개 성지순례 안내를 하며 찾던 곳이니, 그 느낌은 관광객이나 돈독한 신앙으로 무장한 순례자들과는 다를지 모른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모 발현지나 사라고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등 스페인의 국가적 전통에서 유래한 추상적이고 웅장한 성지보다는 로욜라나 하비에르, 폰티베로스 같은 역사적 인물의 체취가 밴 소박한 성지를 더 좋아했다. 이 역시 종교적 감화를 느껴서라기보다,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나 역경과 고난을 이겨낸 이들의 삶이 대규모 성전 주변을 떠도는 믿기지 않는 기적이나 신화적 서사보다 훨씬 마음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돌멩이와 성인들의 땅
 
대 데레사라 부르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도 내가 ‘인간적’ 매력을 느낀 성인 중 하나다. 올해 초 학술연구차 스페인을 방문했다가 불현듯 그녀의 탄생과 죽음의 현장인 아빌라와 알바 데 또르메스를 다시 찾은 것도 성인에 대한 경외보다는 이를테면 존경하는 은사의 고향에 불쑥 들러보고 싶은 마음에서였으리라.
 
16세기 개신교의 종교개혁에 맞서 스페인 교회 내부의 자발적 혁신운동을 이끈 데레사는 1515년 3월 28일 스페인 중부 카스티야 지방의 아빌라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은 예부터 ‘돌멩이와 성인들의 땅(Tierra de cantos y santos)’이라 부르는데,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고원지대에 아빌라뿐 아니라 그녀와 함께 맨발의 가르멜회 개혁운동을 주도한 십자가의 성 요한이 태어난 폰티베로스가 서로 지척에 있어 이러한 별칭이 시적 수사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복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데레사는 어려서부터 유별난 소녀였던 듯하다. 예닐곱 살 때 성인들의 이야기에 감화된 그녀는 두 살 위의 오빠인 로드리고와 함께 이교도의 땅으로 가 순교하고 싶어 가출했다가 말을 타고 쫓아온 삼촌에게 붙잡히고 만다. 민간전승에 따르면 그녀가 붙잡힌 곳은 아빌라 성벽 외곽 아다하 강 건너 ‘네 개의 기둥(58쪽 사진)’이라 부르는 지점인데, 여기는 중세부터 성 레오나르도를 기리는 네 개의 돌기둥과 돌십자가 하나가 세워진 곳이다. 현재의 석조물은 성녀의 생존 당시인 16세기의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서는 유네스코 지정 인류문화유산인 아빌라의 성벽(61쪽 사진)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지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참 인간적인 성녀
 
많이 걷는 노고를 줄이려면 구시가지로 들어가기 전에 성벽의 북쪽 외곽에 있는 강생 수도원을 먼저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수도원은 데레사가 스무 살 때 수녀로 입회한 곳이다. 어머니와 사별한 아버지를 두고 새벽에 집을 나서던 날의 심정을 그녀는 “뼈마디 하나하나가 몸에서 떨어져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기록하였다.
 
18세기에 개축한 현재의 건물은 여전히 가르멜 수녀원으로 쓰고 있으며 예전 공간의 일부는 박물관으로 꾸몄다. 꽃다운 나이에 두드린 바로 그 문을 거쳐 내부로 들어서면 16세기 수도원의 분위기가 그대로 펼쳐진다. 아직도 그녀의 지문이 남아있을 듯한 당시의 돌기둥 밑에 수녀들이 사용하던 고문서함과 가구들, 기둥에 묶여 채찍질당하는 예수와 실물 크기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 벽화가 보인다.
 
2층에서는 옛 수녀원의 부엌과 수녀들이 사용하던 악기들, 왼쪽 중앙층계에서는 인형으로 재현된 데레사의 다른 일화를 만나볼 수 있다. 수도원 전통에 따르면 어느 날 그녀는 이 층계에서 소년 예수를 영접하였는데, “나는 데레사의 예수”라고 말하는 소년에게 “저는 예수님의 데레사”라고 답했다고한다. 하지만 역시 깊은 감동을 자아내는 곳은 맨 위의 3층일 것이다. 성녀가 베고 잤다는 딱딱한 목침과 평생 두 벌만 지니고 번갈아 사용했다는 수도복의 도크(목둘레에 착용하는 흰 테두리)에 묻은 땀이 밴 얼룩은 말할 수 없는 연민을 자아낸다. 그 밖에 27년간 이곳에 머물며 원장수녀 시절 마지막 3년간 지낸 방, 서원할 때 사용한 방석, 직접 쓴 서간문 등 그녀의 체취와 손때가 묻은 유물들도 전시되어 있다.
 
강생 수도원에서 나와 성 비센떼 문을 거쳐 시가지로 들어서면 11세기 스페인의 대표적인 초기 고딕 양식 성당인 아빌라 주교좌성당에 발길이 닿는다. 고색창연한 이천년 성당은 외부에서 보면 단단한 성채를 연상케 하는데 이는 유사시에 군사적 요충지였던 이 도시를 수비하려는 이중의 용도로 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로를 연상시키는 골목들을 지나 남쪽의 ‘성녀 데레사의 문’ 방향으로 10분쯤 걷다보면 성문 안쪽에 인접한 성녀의 생가를 찾을 수 있다.
 
성당으로 개축된 내부로 들어가면 재현된 옛 정원의 일부에서 오빠와 함께 천진난만하게 노는 어린 데레사의 모습과 함께 16세기 스페인 신비주의 문학의 대표적 작가이기도 한 그녀의 확대복사된 서체를 볼 수도 있다. 정원 맞은편에는 데레사가 태어난 방을 개조한 경당이 있다. 제단벽화의 정중앙에 있는 황금빛 성상은 여전히 바래지 않는 그녀의 영성을 전하는 듯하다.
 
경당의 크리스털 창문에는 그녀가 남긴 ‘네 개의 기둥’과 강생 수도원의 예수 영접 일화가 햇살을 받아 선명한 빛을 발한다. 성당을 나와 오른편의 성물가게로 들어서면 성녀가 세운 18개 개혁수도원 사진과 함께 절단된 손가락 하나가 그녀가 역사적, 실존적 인물임을 다시금 주지시켜 준다.
 
 
부패의 수렁에서 교회를 구한 개혁가
 
데레사는 귀족의 딸로 태어나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으나 기꺼이 형극의 길을 선택했다. 여러 기적과 일화들에 가려 지나치게 신비화된 감이 있지만 그녀는 기도와 묵상에만 전념했던 초연한 수녀는 아니었다. 불같은 성격으로 동료 수도자들을 매섭게 독려하였고, 십자가의 성 요한을 비롯해 많은 동지를 포섭할 만큼 논리와 설득력도 있었다. 개혁과정에서 숱한 음해와 중상모략을 이겨낸 정치력은 물론 수도원 건축자금 마련을 위한 대외적 로비에도 뛰어난 현실감각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개혁을 이상만으로 이룰 수 없음은 성녀에게도 마찬가지였을 테니 말이다.
 
16세기 부패의 수렁에서 교회를 구한 그녀의 ‘태양과 정열의 기질’에 비해 고작 개인의 정서적 문제나 경제적 불편으로 유학생활을 힘겨워했던 내 모습은 더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질 뿐이다. 내가 성녀 대 데레사를 인생의 은사처럼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용갑 요셉 -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94-2004년 스페인 마드리드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 캠퍼스 스페인어 통번역학과 조교수로 있다.
 
[경향잡지, 2008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