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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화, 미술

" 육화의신비 또는 성탄 "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들에게 평화!!!! 
모든 분들에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마음 안에서 부터의 기쁨이 넘치시기를......! 
몇 년 전 엘살바도르에서 벨기에 출신 베드로 신부와 함께 산마을 공소를 방문하여
 성탄 전야(시간상으론 오전 11시였지만)를 지내게 되었다.
 그때 신부는 미사 강론 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10여 년 전 엘살바도르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산마을 주민들이 학살을 피해 내려와 종교재단 소속의 어느 학교에 머물게 되었는데, 
사목자는 다가오는 성탄 준비를 위해 건물에 페인트를 칠해서 새 단장을 끝낸 상태였다. 
무심한 아이들은 더러운 손으로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며, 떠들고 뛰어다니면서 난장판을 벌렸다. 
끌고 온 짐승들까지 학교를 더럽히는 데 한몫 했기에 그 학교는 삽시간에 지저분해졌다. 
그러자 사목자는 그들의 무질서한 행동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구유를 꾸며야 한다는 핑계로 그들을 쫓아내었다. 
갈 곳이 없어진 피난민들은 하나 둘씩 흩어져 어디론가 떠났고 
그곳에 꾸며진 구유엔 방긋 웃는 아기 예수가 누워 있었다. 
성모님은 머물 곳이 없어 결국 구유에 하느님의 아들을 모실 수밖에 없었지만 
그 사목자는 아기 예수를 모시는 구유를 꾸미기 위해 
가난한 이를 밖으로 몰아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는가! 
그날 이후 나는 성탄 때가 되면 이 이야기를 생각하며 마음속에 구유를 꾸미게 되었고,
 살면서도 내내 이 이야기가 묵상거리가 되었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보여지는 그 무엇을 위해, 
탐욕이 잘 포장되어 정작 보호받고 위로 받아야 할 많은 사람들이 
내 몰리는 현실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찬바람 부는 구유엔 과연 누가 누워 있는 것일까. 
자! 이제 이콘을 응시하고 귀를 기울이자! 
이 이콘만큼 많은 상징과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드물다. 
모든 장면마다 시대를 이어온 전승이 담겨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설이 있기에 어떤 것이 정확하다고는 단정 짓고 싶지 않다. 
먼저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탄생과 죽음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다. 
갓 태어났지만 수의를 입고 관을 상징하는 구유에 누워 계신다. 
구유 옆에는 황소와 당나귀가 있다. 황소는 유다인을, 당나귀는 이방인을 상징한다. 
그리고 돌무덤을 연상케 하는 동굴. 이것만 보아도 무엇을 상징하는지 느껴질 것이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심과 동시에 죽음을 예시하고 있다. 
즉 육화의 신비가 곧 구원의 신비임을 알았을 것이다. 
이콘의 가장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성모님은 존귀함의 상징인 진홍빛 침상에 누워 계시며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의혹을 품게끔 유혹하는 악마 앞에 앉아 있는 요셉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신다.
또한 성모님은 이미 아기 예수에게서 수난과 죽음을 보았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워 그분에게로 차마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가 
다시 믿음을 얻어 구세주를 씻기우는 여인들이 있다. 
천사가 하늘을 향해 영광을 외치고 가난한 자의 믿음을 상징하는 목동은 
나팔을 불며 탄생한 구세주를 찬양한다. 
오로지 신앙의 눈으로만이 알 수 있는 하느님이 우리 가까이 오셨다는 
표지인 별을 보고 달려온 동방박사들도 있다. 
과연 난 무엇을 보고 하느님의 도래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로서의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는 이 성탄에 준비되어 있는 구유엔 
과연 구원자이신 아기 예수가 누워 있기나 한가. 
신문이나 방송에서 떠들어대는 성탄을 맞이하여 MP3가 30% 세일이고, 
닌텐도나 노트북이 얼마라는 광고나 현란한 춤과 요란한 노래를 매일 보고 듣는 우리의 눈과 귀는 
과연 구세주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볼 수 있을까? 
목동이 부는 찬미의 나팔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제대로 보고 듣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기쁜 소식을 외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이날은 우리를 위해 오신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건이 벌어진 날이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환호한다. 
성탄 시기 동안 이 이콘을 응시하면서 마음으로 기쁨의 축제를 열면 좋겠다. 
그분의 오심이 그저 인간이 되어 보고자 함이 아니라 
지극히 나를 사랑하심에서 선택한 것이었음을. 
그것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온전히 내어놓는 사랑이심을. 
그래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 뵈옵는 영광을 누리고 있는 우리들이 기뻐해야 할 성탄인 것이다. 
부족하기에 오히려 사랑 받는 우리들. 
그렇다면 부족한 다른 사람에게 우리도 
사랑의 손을 내밀 수 있는 새로운 탄생 즉 육화의 신비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자료출처 : 임 루시아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 가톨릭뉴스 기획연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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