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나의 "가온"(1720-1797), 라삐 엘리야. 미트나그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하시드 운동의 극렬한 반대자들의 지도자였던 그는 열심히 공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레뻬들과 하시드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코츠커는 그를 상당히 존경하였고 또 그것을 드러내놓고 표현하였다. 한번은 이런 얘기를 한 적도 있다. 가온이 죽었을 때, 몇몇 폴란드인 레뻬들이 그가 낙원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섰는데 갑자기 타나임(200년전[미쉬나]의 스승들)과 아모라림 몇이 나타나 그들에게 간청하기를, "그를 들여보내어라. 그는 우리의 말을 연구하였다" 하더니 그를 붙잡아 낙원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레뻬 이츠악 메이르와 비얄레(비알라)의 레뻬 모세 미하엘이 한번은 회당에 앉아 복잡한 [탈무드]의 주석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코츠커가 들어오더니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 빌나의 가온이 지적하기를 주석 책에서 제기된 문제들은 모두 엉터리라고 했소." 그리고 그는 자기의 방으로 가버렸다. 두 레뻬는 가온의 주석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그때 또 코츠커가 나타나 말하기를, "그리고 그 빌나의 좀도둑이 설명한 바에 따르면, 이 주석 책의 문제는 이미 풀어졌소."모두 그의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하였다. 코츠커가 다시 설명하기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토라를 주실 때, 장차 올 세대의 사람들이 도달하게 될 모든 가능한 해석들까지 제시해 주셨소. 그런데 그때 몇 안 되는 영혼이 모세의 등 뒤에 숨어 모든 것을 엿들었는데, 그 좀도둑들 중의 하나가 바로 빌나의 가온이었소." 빌나의 가온에 대하여 혹독하게 평가한 볼리니아의 하시드들과 대조적으로, 프쉬스 케의 렙 부남은 앙심을 품지 않은 채, 때로는 매우 역설적으로 그에 대하여 말했다. 어느 안식일, 세 번째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렙 부남의 영혼이 칠층천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그는 빌나의 가온이, 무엇 때문에 하시드들과 그토록 앙숙이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있는 것을 들었다. "제 의도는 명예로운 것이었습니다."하고 그가 순진하게 대답하였다. 그러자 천국이 웃음소리로 진동하였다. 코츠커의 사위인 소크하체프(소카체우)의 렙 아브라함은 가온을 높이 칭찬하고는, 그의 탁월한 학자 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마감하였다. "그의 학식은 끝이 없었다. 만일 그가 메제리츠의 마기드의 권위를 부여받았다면 얼마나 더 위대하였을까 상상해 보라!" 하시드들은 코츠커가 가온을 그대로 닮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그가 세상에 태어난 것도 하시드 운동에 대한 가온의 적개심을 수정하려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어쨌든 코츠커는 빌나의 가온을 존경한 몇 안 되는 하시드 파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실로 그 둘은 서로 닮은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세상과 절연하여 고독하게 살았다. 가온은 공부하는 시간을 뺏기지 않으려고,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누이가 12년 만에 찾아왔을 때에도 그는 시종에게, "저 세상에서 만나자고 전하여라. 여기서는 만날 시간이 없으니까"라고 말했다. 코츠커의 태도도 이와 비슷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중심에 있어서는 달랐다. 가온은 하시디즘과 싸웠다. 코츠커가 투쟁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감추어진 엉뚱한 속셈과 기득권이었다. 그는 거짓과 위선을 상대로 싸웠다. 가온은 고전 텍스트들의 수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동안 코츠커는 영혼의 개선, 저 건너 세계의 고양에 헌신하였다.가온은 토라 연구를 통하여 고요함에 도달하였다. 코츠커는 영적인 화산이 폭발하는 지역을 파고 들어갔다. 그에게 돌아온 보상은,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흔들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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