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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화, 미술

" 산타마리아 델레그리치 성당 / 최후의 만찬 "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최후의만찬(이탈리아 밀라노) | 유럽(남유럽,이탈리아,로마)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1980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이다. 1463년 신축되었으며 15세기 브라망테에 의해 증축되었다. 세인트마리(산타마리아) 수도원 관사 북쪽 벽에는 1495~1497년 사이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려 세계 미술사의 새 지평을 연 '최후의 만찬'이 있다.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은 고딕 양식에서 르네상스 양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건축이다. 채색한 그 모습에서 지금도 건물의 양감이 두드러진다. 1492년에 브라만테는 성당에 삼▤?박공벽이 있는 창과 그 위쪽에는 반원형 아치가 있는 우아한 바깥 회랑을 갖춘, 르네상스 양식을 강조하는 둥근 천장을 얹었다

 

솔라리가 짓기 시작한 이 성당은 이 곳을 무덤으로 선택한 루드비코 스포르차를 위해 브라만테가 개조, 완성했다

 

15세기 말에 지은 아름다운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내부

 

아치 4개로 떠받친 장엄한 둥근 천장 아래쪽에는 복잡하고 동그란 구멍이 잇달아 뚫려 있는 장식 아케이드가 있다

 

브라만테가 지은, 조화가 이루어진 반원형 아치를 갖춘 르네상스 양식의 대회랑. 이 대회랑과 이어져 있는 것은 솔라리가 만등 소회랑 ‘죽은 자의 회랑’이다

 

수도원 내 부속식당안의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곳은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지에 수도원의 부속 식당이다. 이 수도원은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설계한 르네상스 최고의 건축가 브라만테가 설계했다. 

당시 수도원의 식당에 최후의 만찬이 흔히 그려졌다. 수도사들이 식사 중에 벽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 성찬의 의미를 묵상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주제 면에서는 다빈치 작품이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양식적 측면에서는 혁신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우선 원근법에 대한 완벽한 표현이 그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수학적인 원근법을 통해 12명의 제자들이 벽 저쪽 편에서 진짜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들 열두 제자의 모습은 또한 각자의 성격에 맞는 관상으로 그려졌다고 한다. 성미가 급한 베드로의 얼굴은 그 부류 사람의 두개골을 연구하여 그렸다는 식이다. 이를 위해 그는 시체를 30구 이상이나 해부했다고 하니 과학으로 그린 회화인 셈이다.

 

다빈치는 구상이 떠오르지 않으면 몇날 며칠을 비계 위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이를 보다 못한 수도원장이 주문자이자 밀라노의 군주였던 루도비토 일 모로에게 이 사실을 일러바쳤다. 그러자 레오나르도는  “12제자의 얼굴 중 아직 떠오르지 않은 것이 스승을 팔아먹은 유다의 얼굴이다. 너무나 사악하여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는데 수도원장 당신의 얼굴을 유다로 그릴까 생각중이다.” 기겁을 한 수도원장은 이후로는 참견을 삼가하였다고 한다. 이 일화가 말해주듯이 ‘최후의 만찬’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의미는 ‘회화란 정신의 산물’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역사상 처음으로 작가 스스로 주장하고 증명해 보였다는 데에 있다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은 15세기 후반, 정확히 말하면 1463년부터 기니포르테 솔라리가 도미니쿠스회의 원조를 받아 짓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창건 당시의 모습은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다.  또한 삼랑식 성당 가운데 아직 성소도 완성되지 않았는데, 1492년에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루도비코 일 모로)가 우르비노 출신의 뛰어난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에게 이 성당의 확장을 의뢰했다. 브라만테가 갑자기 개축을 맡게 된 것은 전적으로 공작이 바랐기 때문이다. 스포르차는 부인이 묻혀 있는 이 성당에 자기도 묻히고 싶어 했다.

 

얼마 뒤에 로마 교황청 증,개축 때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브라만테는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건설 규모를 확장했지만, 처음에 솔라리가 계획한 기하학적인 흐름은 그대로 유지했다. 동시에 위대한 건축가였던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건축의 기본적인 부분을 받아들였다. 평면에는 솔라리가 만든 신랑 안쪽에 2개의 사각형을 붙였다. 커다란 사각형 선물 남북에는 반원형 벽감을 덧붙였으며, 위쪽에는 북통을 얹고 그 위에 커다란 둥근 천장을 씌웠으며, 북통 바깥을 콜로네이드로 에워쌌다.  이 커다란 사각형 동쪽에 잇대어 조금 작은 네모꼴 구조를 배치했다. 이 네모꼴 구조는 반원형 후진이 있는 성당의 성소가 되었다. 브라만테는 그 옆에 아치로 된 회랑을 설치했는데, 이 1층짜리 회랑은 건물 전체의 멋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이상적인 공간이다.  나아가 브라만테는 수도사들이 한꺼번에 모여 식사하는 대식당 개축 작업을 맡았다.

 

도나토 데 몬토르파노가 그 남쪽 벽에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를 그렸다. 브라만테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그려져 있는 북쪽 벽에 맞추어 채광을 고려해 이 방의 창을 배치하려고 했다. 거장의 이 작품이야말로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을 예술 세계와 맺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식당에 그린 이 기념비적인 벽화를 2년 만에 완성했다. 당시 성당에서는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되새기면서 식사하는 습관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식당 벽에 [최후의 만찬]을 그린 것은 장소에 어울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로로 긴 그림에는 예수를 둘러싼 12명의 제자들이 그려져 있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림 안쪽의 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빞을 이용해 극적인 효과를 연출하였다. 그렇지만 가로 9.1m, 세로 4.2m짜리 이 작품이 완성된 뒤에 주의 깊게 살펴본 레오나르도는 가느다란 금이 간 것을 알아채고, 곧바로 칠을 다시 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나자 이 걸작은 얇은 곰팡이 막으로 뒤덮였고, 색채는 차츰 엷어져 흰빛을 띠게 되었다. 그 얼마 뒤에는 그림 가장자리 부분의 안료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고, 1550년 무렵에는 피에르 푸르동이 ‘세계 최고의 그림’이라고 평했던 그림의 절반 정도가 이미 훼손된 상태였다.  레오나르도와 같은 시대에 살던 사람들도 이미 그가 쓴 회화 기법으로 [최후의 만찬]이 손상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고집 센 이 예술가는 젖은 회벽에 직접 안료를 칠하는 전통적인 프레스코 기법을 쓰지 않고, 얇은 소재에 밑그림을 이증으로 그리고 그 위에 기름기 많은 템페라 물감과 유화 물감을 사용하여 제작하였기 때문이다. 에로나르도는 이 새로운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려야만 하는 프레스코 기법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구도 수정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프레스코 기법은 안료가 벽에 완전히 스며드는데 반해 레오나르도가 쓴 이 기법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세월이 흐르면서 식당의 습기 때문에 안료가 떨어져 나가게 된 것이다. 이 벽화가 성당의 개수 공사로 큰 피해를 입었다. 도미니쿠스회의 수사들이 부엌과 식당을 연결시키는 문을 만들 때 예수 그리스도의 아랫부분이 훼손되었다. 그래서 다른 부분이라도 지키려고 커튼을 쳤는데, 오히려 비가 내릴 때마다 벽이 젖는 결과를 초래했다. 1560년 무렵에 화가이자 미술사가인 조르조 바사리는 이미 ‘벽화는 비참한 상태에 놓였고, 어렴풋한 얼룩으로 보일 뿐이다.“라고 지적했다. 벽화는 점점 위험한 상태가 되었고, 1727년에 수도사들은 마침내 벽화를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야심만만한 미켈란젤로 벨로티가 곰팡이를 제거하는데 그피지 않고, 전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붓을 대어 자기 멋대로 고쳐 버린 것이다. 벨로티으 후계자는 예수의 제자인 필립보의 구부러진 오른쪽 손가락을 곧게 폈고, 나아가 왼쪽 손가락 하나가 숨어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여섯 번째 손가락을 그려 넣었다. 1796년에 밀라노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바로 이 식당을 마구간으로 이용했다. 당시의 벽화 상태를 판화가 안드레 두테르 툴레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데, 이 작품은 후세의 복원 작업에 도움을 주었다. 19세기 중반 무렵에 스테파노 바레치는 벽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 몇 개를 원래 위치에 붙였다. 1924년에는 오레스테 실베르투리가 흙손을 이용해 그림물감을 벽에 찍어 누르는 방법으로 복원함으로써 복원가들을 경악시켰다. 1970년대 말에 [최후의 만찬]의 대규모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벽화는 오랫동안 맻 차례나 덧칠한 층층의 색과 그 위를 덮은 먼지, 곰팡이, 납, 송진 그리고 미생물과 거미 따위의 배설물로 이루어진 두꺼운 층으로 뒤덮여 있었다. 미슬사가인 주세피나 브람빌라의 지휘 아래 작업을 진행한 복원가들은, 두꺼운 층을 신중하게 들어낸 다음에야 비로소 이제까지 창문으로 알고 있었던 어두운 직사각형 부분이 사실은 테피스트리였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극적인 [최후의 만찬]은 유다의 배반이라는 지극히 한정된 순간을 그린, 당시로서는 최초의 그림 가운데 하나이다. 이 벽화에 매료된 괴테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예술가(레오나르도)가 고요한 만찬을 흐트러뜨리는 기폭제로 사용한 것은 스승인 예수가 ‘너희 중에 배반자가 있다’고 한 말이다. 이 말이 나온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동요했으며, 예수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머리를 수그리고 있다.” 복원가들이 열심히 일한 덕분에 유다(타대오)는 옆 열굴을, 마태오의 머리카락은 붉은 광채를 되찾았고, 집게손가락을 곧추 세우고 있는 토마(도마)의 거무튀튀한 수염은 원래 그림처럼 다시 구름에 바싹 붙어 있다.


토스카나 출신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세 무렵에 피렌체에서 조각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갔다. 이 곳에서 그는 수많은 작품의 제작에 참여했다. 이들 작품 가운데는 30세 때 밀라노 지배자인 루드비코 스포르차 공작을 섬기기 위해 중단한,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동방박사들의 경배]처럼 미완성인 작품 몇 점이 있다. 변덕스럽고 언제나 분주했던 이 천재는 회화, 조각, 건축과 해부학을 비롯한 과학적 실험에까지 관심의 영역을 넓혔다. 쉴 줄 모르는 이 예술가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에도 예수와 사도들의 모델로 삼을 만한 얼굴을 찾으려고 하루 종일 길거리를 헤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레오나르도가 남긴 작품은 많지 않지만, 그는 고전 양식의 완성가가 되었으며, 특히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창안했다. 스푸마토란 한 형태와 다른 형태가 뒤섞여 들어가는 듯 항상 우리에게 상상할 거리를 남겨 놓는 흐릿한 윤곽선과 부드러운 색채를 가리킨다. 그는 16세기 초에 피렌체로 돌아와서 최고의 걸작인 [모나리자]를 그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경탄할 만한 관찰과 창의력 넘치는 기록들을 안겼으며, ‘르네상스의 거장’, ‘과학의 예술가’라고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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