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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화, 미술

' 바보들의 배 '


바보들의 배
작가 : 예로니모 보스(Hieronymus Bosch: 1450- 1516) 규격 : 57.8 x 32.5 소재지: 빠리 루브르 박물관


대부분의 성미술은 아름다움, 긍정적인 것들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으나 부정적인 것 혹은 보기 역겨운 것을 고발함으로서 교훈적 성격을 띈 그림도 간혹 있는데 사순절인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보스의 <바보들의 배>가 바로 그런 내용을 담은 그림이다.

그는 유럽의 다른 르네상스의 화가들처럼 생애가 드러난 사람이 아니라 많은 부분 신비에 쌓인 인물이며 그러기에 그의 생애에 대해 많은 억측과 의문을 일으키는 사람이다. 보스는 화란의 헤르토겐보스에서 태어났고, 그 당시 평신도 신심단체로 영향을 행사하던 마리아 형제회의 단원이라는 것 외에 별로 알려 진 것이 없으며, 순수함을 추구하는데 대단한 열정을 보이던 연금술사였다는 것, 그리고 교회의 무기력과 부패에 반기를 든 어떤 이교 집단의 단원이었을 것이란 것이 그에 대한 전부이며 아무튼 제도적인 교회는 이런 그의 경력 때문에 부정적 반응과 평가를 보였기에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이 더욱 빈약하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는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태동되던 시대임을 감안하면 교회의 부패지수가 아주 높을 때이고 그 악취 역시 대단했을 때였기에 반교회적인 작품이 창궐할 때이고 이 작품도 이런 면에서 교회의 부패고발 풍자의 의미가 아주 강한 것이다.

먼저 작품의 제목 <바보들의 배>라는 것부터 작품의 성격을 아주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 작가도 인생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정임을 알기에 현세의 공간을 배로 비유하고 잠시 지나가는 세상 방심하지 말고 착심하며 살아야 한다는 <항상 깨어 있으라>는 성서 말씀을 생각하며 사는 게 사람다운 삶으로 여기는 사람인데, 이 제목은 하느님의 뜻을 망각하고 시대의 표징을 읽음이 없이 막 살아가는 우매한 중생들의 작태를 꼬집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작가는 어디 눈을 돌려 봐도 부패한 것 밖에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제일 먼저 고발하는 것이 바로 성직자, 수도자이기에 그들을 가장 중앙에 배치하고 있다. 오른쪽에 봉헌된 수도자의 상징으로 둥근 삭발을 한 수사(修士)는 당시 개혁 수도회의 회원인 베킨(Beguine) 회원이며, 반대편에 키타를 흥겹게 연주하는 수녀(修女)와 다른 한 수녀, 즉 수남(修男) 하나와 수녀(修女) 둘의 구도를 중심에 두고 고발을 시작하는데, 수도자는 가장 맑은 삶,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할 사람들인데, 이들이 정신이 나갔으니 세상은 갈 때까지 왔다는 안타까운 상황을 먼저 강조하고 있다.

베긴 (Beguine)수도회는 1170년경 유럽에서 도시화가 시작되던 시기에 발생한 신앙의 혼돈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영성 문제 해결을 위해 창설된 평신도 수도자들의 혼합 단체이며 이들의 극단적 태도 때문에 어떤 때는 이단으로 몰린 적도 있지만 나름대로 예언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던 개혁 집단이었는데, 작가는 바로 이 세 명의 수도자들을 중앙에 배치함으로서 썩어도 가운데 토막부터 썩은 교회에 대한 충격적 고발을 하게 된다.

키타를 신나게 두드리는 수녀와 수남이, 그 곁을 둘러싼 세 명의 농부들 사이에 걸려있는 고기 파이는 서로의 시야를 가릴 만큼 한마디로 주지육림(酒池肉林)의 가련한 참상 아래 있는 당시 크리스챤 생활의 참담상을 고발하고 있다.

식탁 중앙에 놓인 과일은 체리(Cherry)인데, 이것은 기후 관계로 이것을 생산할 수 없었던 당시 네델란드의 상황에선 대단히 희귀하고 요즘 표현으로 수입품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 비싼 과일들을 즐기며 분수없이 미식 취미에 빠진 수도자들의 부패한 모습을 고발하는 것이다.

그 뒤에 붉은 옷을 입은 세 명의 농부가 있는데 포도주를 마셔 얼큰한 상태에서 살이 디룩디룩한게 찐 이들 역시 <깨어 기다리는 삶>이 아닌 방심(放心)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남을 해코지 하는 것이 아닌 수준에서 내 인생 즐겁고 편안하게 살자는 집단최면과 같은 광기에 휩쓸린 세상을 보면서, 시편 10편에 “바닥이 송두리째 무너나는 이 마당에 의인인들 무었을 할 수 있단 말이냐?” 탄식에 작가는 공감하고 있다.

살이 디룩디룩 한 농부 일당과 그중에 다른 한명은 그 포만상태에서 더 식도락을 즐기기 위해 나무에 걸어 둔 거위에 칼을 대고 있으며, 오른 쪽 배 머리에 한 녀석은 너무 과식을 해서 강에다 음식물을 토하는 모습을 통해 어디부터 손써야 할지 모르는 참담한 현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배 앞쪽에 웃통을 벗은 모습으로 물속에 있는 두 녀석은 과식과 과음으로 너무 더워 진 몸을 식히기 위해 일부러 물속에 들어갔는지 아니면 취중에 빠졌는지 모르지만 물속에서도 술통에서 나오는 술을 받기 위해 잔을 쳐들고 있으며 둘 다 취해 정신이 없는 모습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른쪽 뱃머리에 앉은 광대이다. 중세기의 광대는 그냥 재주를 부려 사람들을 웃기는 삼류 연예인이 아니라 김삿갓으로 표현되는 우리 문화의 방랑시인 처럼 시대를 풍자하는 어떤 의미의 예언성을 띈 사람인데, 그 역시 정신이 빠져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은 이제 수남이도 수녀도 광대까지 이 지경이니 볼 장은 다 보았다는 극히 자조적인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마디로 비정상이 정상이요, 정상이 오히려 이상으로 따돌림 받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예술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만 가진 사람에겐 이 그림은 너무 지루하고 부담스럽다. 그러나 예술의 궁극적 목표가 진리의 표현이라면 이 그림은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실을 일깨우고 있는데, 즉 작가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죄의 뿌리가 되어온 탐(耽)이란 화두를 통해 문제성을 제시한다. 탐욕, 탐식 등 우리 누구나 빠질 수 있고 마치 자기 개인의 선택인 양 여기는 이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해독임을 제시하고 있다.

요즘은 웰빙(Well Being)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적게 일하고 많이 쉬고, 땀은 조금, 쾌락은 넉넉히, 가치있는 것 보다는 편한 것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는 문화가 대단한 매력으로 서서이 우리 사회를 잠식하고 있다.

그래서 공장이나 집안일을 통해 흘리는 땀은 어리석은 사람이 선택하는 삶의 소모 현상이고, 수고의 땀이 요청되지 않는 안락이나 괘락을 즐기기 위해 디스코텍에서 온몸을 쾌락에 몰입하며 흘리는 땀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런 문화는 <바보들의 배>의 승객들이 정신 나간 농부만 아니라 수녀, 수사들도 있듯 오늘 복음대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나 수도 공동체에도 서서이 잠식하고 있다. 마치 중세기에 지은 그 아름다운 대성당들이 대기오염에 일반 건물과 다름없이 오염되고 있는 것처럼.

식도락에 대한 관심도 대단하다. 이차 대전 후 독일이 부흥하는 과정에서 독일인들이 너무 식도락을 즐김으로 말미암아 독일인의 상징이 비만으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너무 오래 굶주림의 고통을 겪은 사람들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나, 오래 어려운 삶을 살다가 모처럼 웰빙이라는 것을 맞게 된 우리 역시 정신이 없다.

<소문난 맛집>의 광고는 이제 웰빙족들에게는 빠트릴 수 없는 성지의 역할을 하게 되고 그 결과 이제 비만증은 모두가 염려해야할 국민병(?)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소문난 맛집>을 기웃거리는 인간들, 소문난 맛 집에서 즐긴 결과로 생긴 몸무게를 줄이기 위해 <워킹머신>위에 고기를 올려놓고 비지땀을 빼는 것을 웰빙족의 기본 운동으로 여기는 사람들, 웰빙 시대를 즐기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도 땀흘리는 일(?)은 피해야 한다는 집단 최면을 당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사순절의 메시지 참회, 절제, 착심은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고 뛰어넘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처방전임을 이 그림은 가르치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보스의 이름이 예로니모인데, 이 성인은 자기 죄를 뉘우치기 위해 돌 뭉치로 자기 가슴을 치는 기괴한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는데, 보스의 그림은 바로 우리에게 자기 그림에서 보여 주는 황당함이 오늘 바로 우리의 현실임을 인정하고 가슴을 치면서 이 해결의 지혜를 사순절의 준수에서 찾을 것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는데 ,이런 면에서 이 그림은 단순한 고발이 아닌 치유의 처방전까지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는 우아하고 점잖은 것을 찾기 힘드나,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를 결심한 사람들이라면 오늘 우리의 현실이 바로 그런 것임을 인정할 수 있고 이런 면에서 이열치열의 처방이라 볼 수 있다. 작가는 이 그림을 통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강하게 전하고 있다. <바르지 못한 삶을 고치기 위해 바르지 못한 우리의 추한 모습을 직시하고 인정하는데 주저하지 말자 !>

“너희는 진심으로 뉘우쳐 나에게 돌아오라. 단식하며 가슴을 치고 울어라. 옷만 찢지 말고 심장을 찢고 너의 주 하느님께 돌아오라.” (요엘 2장 12절). <이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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