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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화, 미술

' 마사치오 디 산 죠바니의 십자가 '


십자가
작가 : 마사치오 디 산 죠반니 크기 : 83x63 장소 : 나폴리 깝보 디 몬테 박물관


성녀 막달레나에 대한 기록은 신약성서에 16번 나타나고 있는 중요 인물인데, 피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녀가 큰 죄를 지었으나 참회 한 후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며 제자직을 수행하다 부활의 첫 목격증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 27장 56절과 61절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곁을 지키는 모습으로 언급되고, 루가 복음 8장 2절에는 예수님의 선교 사업을 도운 여인들을 언급하며 막달레나를 “일곱 마귀가 나간 여인”으로 언급하고 루가 복음 24장 10절에는 부활의 목격증인으로 막달레나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전승과 신앙은 막달레나를 요한 복음 12장에 있는 “예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와 연관시켜 그의 죄와 참회를 구체화시키기도 했다.

년 전 마리아 막달레나의 고향인 막달라 마을에 고고학적인 발굴이 있었을 때, 로마 군대의 병영지가 발견되어 그 곳에 로마 군사들이 주둔했음이 확인되자 성서와 교회 전승에 이어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추측이 어떤 작가에 의해 작품화 되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총명함과 뛰어난 미모로 많은 남자들의 가슴을 태운 여자였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다 그렇듯 힘이 없어 강한 나라의 식민지가 된 지역의 남성들은 하나같이 거세된 남자처럼 무능하게 보이고 반대로 지배국의 남자들은 그들의 힘으로 남성다움이 더 돗보이기에 피지배국의 유능한 여성들이 이런 이국 남성과 결혼하는 예가 자주 있으며 성녀 막달레나도 역시 이런 범주의 여성으로 로마 주둔군의 고급 장교의 애첩(愛妾)이 되어 호사를 누리던 여자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 선택은 그녀에게 기대 이상의 쾌락과 안락을 선물했으나, 이것으로 만족하기에 그는 너무 순수하고 높은 이상을 가진 여자였기에 이 상반되는 갈등을 조화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심한 정신 신경 장애의 고통을 겪던 중 주님을 만나면서 이것들을 극복하고 새 삶을 시작했다는 것이 이 작품의 내용이었고, 많은 십자가의 그림은 대강 이 범주 안에서 그려 진 것을 볼 수 있다.

즉 십자가 곁에 비통한 마리아와 사도 요한과 함께 막달레나가 서 있는데, 그녀는 미모의 얼굴에 슬픔을 가득담은 모습으로 그리고 수난의 침통한 분위기를 창출하기 위해 상복을 연상케 하는 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은 여인으로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사치오의 독창성과 천재성은 이 십자가 그림에서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는 과거 어느 작가도 시도치 않았던 파격적인 방법으로 십자가의 신비에 도전했다.

우리가 감상하는 이 <십자가> 그림은 피사(Pisa)의 교회 제단화의 한 부분으로 전체가 5 미터나 되는 큰 부분의 그림을 잘라 낸 한 부분이며, 지금 전체 그림 중 11부분이 온 세계 박물관에 흩어져 있고, 이 그림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가슴에 붙어 목이 없는 이상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높이 있는 그림을 올려서 봐야 하는 관람자들을 생각해서 정상적으로 그리면 예수님의 목이 너무 길어 보일 것을 배려해서 원근법을 사용해 이렇게 그렸는데, 이것은 마사치오가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나, 실재 효과 면에선 그가 기대한 만큼 되지 못해 어색하게 되고 말았다.

이 그림의 백미는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고 십자가를 두 팔을 한껏 벌려 안고 있는 막달레나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다른 화가들은 막달래나의 미모와 참회, 비통을 강조하는 면에 중점을 두었으나 마사치오는 막달레나의 뒷면을 보이면서 전혀 다른 표현으로 충격적인 감동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얼굴의 표정 없이도 참 삶의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는 막달레나의 연민과 격한 슬픔을 극명히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이 슬픔은 단순한 여느 여인의 감상적인 슬픔이 아니라 큰 사랑의 표현임을 전하고 있다.

풀어헤친 막달레나의 머리는 아름다운 금빛인데, 마사치오가 활동하던 중세 이태리 여인들은 이런 색깔의 머리를 대단히 선호해 이런 머리를 보존하기 위해 요즘 우리 시대에 미용의 목적에서 성형수술을 하는 것처럼 대단한 노력을 했음을 볼 수 있는데, 베네치아의 여성들은 햇빛이 좋은 날 테라스에 나가 머리 부분만 햇빛에 노출시켜 금빛 머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면에서 막달레나의 머리는 그의 더할 수 없는 육체적 미모를 대변하고 있다.

그다음 막달레나가 입은 진홍빛 외투인데, 앞에서 언급한대로 다른 작품에선 슬픔을 강조하기 위해 상복을 연상케 하는 어두운 색깔을 사용했으나 마사치오는 너무 예외적이고 황당한 생각이 들 수 있는 불타는 진홍색 외투를 막달레나에게 입혔는데,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주님을 향한 그의 뜨거운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고 막달레아의 슬픔이란 바로 이런 사랑의 열매임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십자가 곁에 선 두 성인에게 있는 후광을 막달레나에게는 그리지 않는 것도 그녀의 너무도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막달레나는 자기 삶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주님을 사랑한 제자라는 것, 즉 제자직의 기본은 바로 스승을 향한 무조건적이고 열렬한 사랑임을 이 그림은 전하고 있다.

벌써 십 여 년 전 영국의 어떤 젊은이가 예수님이 막달레나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퍼트리더니, 요즘 유행하는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이것이 재탕되고 있는 것을 보는데, 이것은 막달레나의 사랑을 자기 수준에서 소화한 희극적 몰상식과 당돌한 표현이니 그리 신경 쓸 것이 못되고, 마사치오는 이 그림에서 막달레나는 인간이요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한 에로스와 전혀 무관하고 그것을 뛰어넘은 차원 높은 사랑을 한 제자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마사치오는 과거에 어느 작가도 상상치 못했던 방법으로 인간으로서 가장 큰 슬픔과 고통이 있는 곳에서 신앙 안에서 가능한 열정적 사랑의 강렬한 단면을 표현하고 있다. 막달레나의 붉은 외투에서 반 고호의 <해바라기>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강한 생명력도 느낄 수 있다.

<르네상스 미술가 전기>를 쓴 바사리는 그의 이런 과감한 시도를 “마사치오 이전의 화가들은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본다면, 그의 작품은 생명이 넘쳐흐르며 진실성이 있고 자연 그대로를 묘사 한것이다”라고 칭찬했다. 마사치오의 천재성은 그가 과거의 고정관념에서 해방되어 과감한 단순성으로 본질을 꿰뚫은 혜안에 있다.

그는 그림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몰랐고 다른 화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주위의 인정이나 평가, 그림을 그림으로 오는 반사이익에 대해서도 전혀 자유로웠고 자신의 겉모습에 무관심하여 행동이 괴상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천성이 너무 선량했기에, 원래 그의 이름은 토마소 디 죠반니 디 시모네 구이디(Tommasso di Giovanni di Simone Guidi) 였으나, 덩치크고 어줍은 토마소라는 뜻의 “마사치오”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이런 면에서 그에게서 볼 수 있는 천재성이란 보통사람의 능력을 뛰어넘는 비범성에서 의미를 찾기보다 자기의 삶에 외골수로 몰두할 수 있는 단순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보통 단순성이란 것을 약간 모자란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순박한 엉성함이나 아니면 최선을 다하지 않는 어정쩡한 상태를 선의로 마무리하기 위한 단어로 쉽게 오용하고 있으나, 복음적 단순성이란 자기가 살아야 할 삶에 혼신을 다해 투신하는 사람에게 드러나는 것이며 마사치오는 이 단순성의 절정에서 그의 천채성을 드러내고 있다.

너무도 잘 짜여지고 양적으로도 막강한 그리스도교가 붕괴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독일에선 개신교나 가톨릭이나 할 것 없이 이제 더 이상 자신이 크리스챤이 아니란 표현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교회가 비상이 걸린 상태이다. 일시적 냉담자가 아니라 충분한 숙고를 거친 후 신앙을 결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동안 교회는 복음 자체 보다 복음을 전하고 담는 교회라는 조직 유지와 확장에 더 신경을 쓰다 보니 많은 제도와 법을 만들어 포장지는 미끈하고 튼튼하게 되었으나, 복음의 생기를 상실하게 되자 여러 복음 운동이 일어나 이 생명력을 키우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세계의 오지인 히말리아의 티벳 불교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으며 불란서, 독일, 영국 등 유럽의 불교 신자 증가는 만만찮은 수준인데, 티벳 불교의 매력은 체계적인 조직이나 교리가 아니라 그 순박한 단순성에 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 밝은 표정으로 길을 걷다가 모셔둔 부처나 탱화를 보면 땅바닥에 엎드려 불교식 경배 방법인 머리와 온몸을 땅에 대는 오체투지(五體投地)로 기도하는 모습이 천상에의 그리움을 찾는 사람에게 진한 감동과 충격으로 다가오기에 문명과 풍요의 첨단에 있는 유럽에서 가난과 미개발의 상징인 티벳의 불교가 봄맞이를 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마사치오의 그림은 교회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생명력과 이 생명의 토양이 될 수 있는 단순하고 열렬한 신앙 태도를 강력히 제시한다는 면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크리스챤들에게 더 없는 감동과 함께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신앙의 방향제시를 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