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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화, 미술

" 탈혼에 빠진 성녀 대 데레사 / 쟌 로렌죠 베르니니 "


제 목 : 탈혼에 빠진 성녀 대 데레사 (1644) 작 가 : 쟌 로렌죠 베르니니( Giann Lorenzo Bernini: 1598- 1680) 소재지 : 이태리, 로마 : 승리의 성모 성당

16 세기 말경 이태리에서 시작해서 17- 18세기 전반에 유럽 여러 가톨릭 국가에서 발전한 바로크 미술은 루터의 종교개혁의 반동으로 우리 교회에서 시작된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의 결실인데, 종교개혁으로 인해 실추된 교회의 권위와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교회는 르네상스와 다른 새로운 차원의 문화 예술에 대한 진흥책을 마련하고 이것이 바로 바로크 양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복음에 기초를 둔 청렴했던 초대교회의 이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작된 개신교는 그동안 가톨릭 교회가 누려온 권력지향적인 제도와 사치에 대한 반발로 검박한 생활의 강조로 자연스럽게 예술과 결별하는 처지가 된 반면, 가톨릭교회는 화려하고 경쾌한 새로운 미술의 창조로 위축되고 실추된 교회의 위상을 회복하고 사람들에게 가톨릭 신앙은 삶의 아름다움과 멋을 선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서 교회의 영광을 회복코자 했는데, 이런 계획이 바로 바로크 예술로 구체화되었으며, 작가는 이런 움직임에 큰 역할을 했다

작가는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즉위와 함께 자질을 인정받아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주임을 역임하면서 대성당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제단 위의 거대한 천개(天盖,Baldachino)와 대성당 광장에 두 팔을 벌려 모든 인류를 포옹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주랑(Colonnade)을 만드는 등 대단한 작품 활동을 했다.

이 작품은 작가가 당시 로마의 명망 있던 꼬르나로 (Cornaro)가문 출신의 페데리꼬(Federico) 추기경으로부터 부탁 받은 자기 가족들의 무덤을 위한 경당을 갈멜회 소속의 승리의 성모 성당(Santa Maria della Vittoria) 에 준비하면서 이 성당의 주보인 대 데레사의 생애 중 가장 극적인 사건을 재현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 성녀 대 데레사는 많은 신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소화 데레사의 후광에 가려져 큰 빛을 보지 못하고 있으나 성녀는 교회 학자요, 신비가요 무엇보다 교회 역사에서 자랑스러운 영성의 대가이며 여걸(女傑)이었다.

1515년 아빌라의 귀족 집안의 딸로 태어난 성녀는 젊은 시절 여느 여성들처럼 로맨틱한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했으나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 후 갈멜 수녀원에 입회해서 수도생활을 시작하는데, 당시 아빌라의 내노라하는 귀족 딸들이 입회하던 갈멜 수녀원은 수도생활의 뜻도 열정도 없는 여자들이 살고 있는 곳이어서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하기 짝이 없었다. 성녀는 갈멜의 개혁자로서의 일생을 다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말 못할 어려움을 많이 당해야 했으나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과 신뢰의 바탕 위에, 성숙한 인품에서 나온 지혜로운 처신으로 이것을 극복하고 재창설로 볼 수 있는 어려운 일을 휼륭히 처리했다.

헌집을 고치는 것은 새집을 짓기 보다 더 어렵다는 비유대로 타락한 수도회의 쇄신은 새로운 수도회의 창설 못지않게 어려운데, 성녀는 이것을 해낸 교회의 위대한 개혁자요, 이것을 통해 수도생활을 쇄신한 분이시었다 .

그런데 이런 위대하고 거룩한 성녀의 기도생활은 하느님께 대한 깊은 열정에 사로잡혔던 대부분의 성인들과 좀 다른 점이 있었다. 성녀는 중년기에 이르도록 기도생활에 있어서 영적 위로나 감미로움보다, 아무리 기도해도 느낌이 없는 심한 건조체험에 머물고 있었기에 이것이 큰 실망과 어려움이 되었으나 성녀는 이것을 신앙으로 극복하며 사시던 중 드디어 대단한 영적 체험을 하게 되는 데, 이 작품은 바로 성녀의 일생을 바꾼 대단한 영적 체험을 형상화 한 것이다.

어느 날 성녀가 여느 때처럼 기도하는 순간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나 성녀의 가슴에 금으로 만든 불타는 화살을 꽃았을 때 성녀는 너무도 큰 충격을 받게 되며 이것은 성녀의 삶 전체에 큰 전환의 계기가 되었기에 이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에게 나타난 그 천사는 키가 큰 편이 아니었고 작았으나 매우 아름다웠으며, 그의 얼굴은 광채로 빛나고, 그분은 가장 서열이 높은 천사의 한 분으로 보였습니다. 그분은 불붙은 철심을 가진 기다란 황금 화살로 나의 심장을 수차례 찔렀습니다.... 그 고통이 너무도 심하여 저는 큰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대단한 황홀감에 빠졌으며 이 순간에 나는 그 고통이 더 계속되기를 바랄만큼 달콤한 상념에 젖었습니다. 이 황홀체험은 바로 긴 건조체험의 삭막한 어려움을 인내한 나의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주님의 감미로운 애무로 느껴졌습니다.”

작가는 바로 위에 언급되고 있는 이 위대한 성녀의 삶을 변화시킨 탈혼 체험을 형상화시켰다. 연극에 대단한 조애와 관심이 있었던 작가는 건축, 조각, 회화를 하나로 융합시켜 연극에서처럼 복합적 환상을 만들어 내었으며 ,이 작품에서 작가는 감동과 외경을 함께 일으키는 작가 특유의 극장주의적 연출성을 완성시켰다.

먼저 작가는 성녀의 이 환상적인 신비체험을 르네상스 예술에서 너무도 친숙한 희랍신화의 큐피트(Cupid)와 에로스(Eros)의 관계를 도입해서 하느님과 인간의 신적 결합을 관능적인 모습으로 재현했다.

큐피트 같은 날개를 단 천사가 화살 형상의 창으로 성녀의 가슴을 찌른 후 다시 찌르려는 자세로 성녀를 바라보고 있다. 성녀는 고통을 이기지 못한 기절한 상태이나, 이것이 인간의 황홀경의 극치를 통해 인간의 성애(性愛)를 표현한 여느 작품과 달리 위로부터 내려오는 빛과 조화를 이루면서 끈끈한 관능적 분위기가 아닌 천상 음악의 음율과 함께 맑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창출하고 있다.

천사의 부드러운 옷과 성녀가 입은 두터운 질감의 옷을, 천사의 맑은 표정과 실신한 성녀의 표정을 절묘히 조화시키면서 천상 생명의 경쾌함과 인생고의 업보(業報)를 지고 살아가는 사바세계 중생의 힘겨운 삶의 모습을 대조시키면서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성속(聖俗)이 일치되는 신앙의 신비를 매력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천사와 성녀의 조상(彫像)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보이지 않는 광원(光源)으로부터 조명되기에 에로스의 영역과 전혀 다른 신비스러움을 창출하고 있다. 작가는 건축, 조각, 회화의 기법을 함께 도입한 연극적인 요소의 도입으로 실재와 환상 사이의 구분을 자연스럽게 무너뜨렸으며, 관객들은 성녀 데레사의 이 체험이 과거의 사건이 아닌 하느님의 도움으로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입체적인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이런 대단한 영성과 혜안을 지닌 성녀였으나 당시 폐쇄된 교회 안에서 살았기에 정확한 시대적 징표를 읽지 못해 마르틴 루터를 신앙을 배반한 사람으로 이해했고, 그로 인해 시작된 개신교를 막고 방어하는 것이 교회의 지상 사명으로 여겼던 반종교개혁의 대표 성녀이나 인간의 심원한 면을 너무도 정확하고 깊이 이해한 성녀의 영성은 오늘도 심리학자들에게까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을 만큼 위대한 성녀이시다.

가장 육체적인 표현을 통해 가장 영적인 합일과 통합의 경지를 체험하신 성녀는, 육신과 영혼이 공존하는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조금도 위선이나 군더더기가 없는 정확하고 성숙한 영성적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영적체험의 황홀함이 에로스의 극치 체험과 같으냐는 질문의 해답을 여기서는 읽을 수 없다. 힌두교나 불교의 밀교(密敎) 계통에서는 종교적 극치 체험을 성적인 것과도 연관시키기도 하지만 성녀는 하느님과의 합일 체험의 황홀함을 진솔히 전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나체에 대한 이해의 태도에서 볼 수 있다. 나체라고 할 때 옷을 벗은 상태로 보는 사람과 성기가 노출된 상태로 보는 사람이 있는데 , 전자는 자연스러운 반면, 후자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호기심의 날개를 펴게 되듯이, 성녀의 탈혼은 바로 전자의 태도와 비길 수 있다.

생전에 성녀는 우리가 언듯 통합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홀로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라.>

<네 몸을 잘 대하고 관리해라, 그래야 네 영혼이 거기 깃들고 싶지 않겠느냐?>

영혼과 육신은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육신은 영혼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영혼의 또 다른 모습임을 가르치신 성녀의 진면모를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너무도 아름답고 설득력있게 표현하고 있다.

<이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