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4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아침기도
11월 4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저녁기도
11월 4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끝기도
야콥 요르단스의 밀라노의 페스트 희생자들을 돌보는 성 가롤로
조반니 바티스타 크레스피의 밀라노 성문의 십자가들을 바로세우는 성 가롤로 보로메오
오라치오 보르지아니의 성 가롤로 보로메오
카치아니가의 천사의 돌봄을 받는 성 가롤로 보로메오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
1538년 롬바르디아의 아로나에서 태어났다. 민법 및 교회법의 학위를 취득한 후 삼촌인 비오 4세 교황에 의해 추기경이 되고 밀라노의 주교가 되었다. 그 곳에서 양 떼의 참된 목자로서 교구를 자주 시찰하고 또 자주 교구 회의를 소집했으며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모든 면에 있어 많은 일을 했고 그리스도교적 윤리 생활의 증진을 위해 애썼다. 1584년 11월 3일 세상을 떠났다.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가 마지막 교구 회의에서 한 강론에서
(Acta Ecclesiae Mediolanensis, Mediolani 1599, 1177-1178)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 약한 사람들임을 나는 시인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한다면 쓸 수 있고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제는 백성들이 요구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고 또 응당히 그러해야 할 정결하고 천사 같은 행동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필요한 수단들 즉 단식, 기도, 그리고 악한 이들과의 교제 및 해롭고도 위험한 우정을 피해 버리는 일과 같은 수단을 별로 사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제는 성무일도를 바치려 성당에 들어가거나 미사 봉헌을 준비하려고 할 때 그 마음에서 즉시 하느님으로 부터 떨어져 나가게 하는 숱한 잡념들이 흘러 나온다고 투덜거립니다. 그런데 그 사제는 성무일도를 바치고 미사를 봉헌할 시간이 다다르기 전 제의방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어떻게 마음 준비를 했으며 또 마음을 집중시키기 위해 무슨 방도를 취했습니까?
한 가지 덕행에서 또 다른 덕행에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듣고 싶습니까? 예를 들어 성당에 있을 때 한 번 마음 집중을 잘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다음 번에 어떻게 더욱 집중하여 하느님의 마음에 드시는 예배를 바칠 수 있겠습니까? 내 말을 들어주십시오. 당신 안에 미소한 신적 사랑의 불이 점화되면 그것을 즉시 바깥으로 보여 주거나 거기에다 바람을 세게 불어넣지 마십시오. 오히려 당신 마음의 용광로가 작아지거나 열기가 식지 않도록 그것을 닫아 두십시오. 말하자면, 할 수 있는 잡념을 피하고 하느님께 바짝 붙어 쓸데없는 잡담을 멀리하십시오.
당신은 설교하고 가르치는 임무를 지니고 있습니까? 이 임무를 잘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배우는 데에 힘쓰십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의 생활과 행동 자체가 설교가 되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당신이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당신의 말을 비웃고 고개를 내젓기 시작할 것입니다.
혹 사목이 당신의 임무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당신 자신의 일들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다른 이들을 위해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면서 당신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물론 당신이 맡은 영혼들을 돌보아야 되겠지만 당신 자신의 일들을 잊어버릴 정도까지 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형제들이여, 성직자들에게 있어선, 모든 활동에 앞서고 그것과 함께 가고 또 그것을 뒤따라야 하는 묵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점을 깨달으십시오. 예언자는 말합니다. "주여, 당신께 노래하고 묵상하리이다." 형제여, 성사를 집행할 때면 그 행하는 바에 대해 묵상하십시오. 미사를 봉헌 할 때면 봉헌하는 것에 대해 묵상하십시오. 성당에서 시편을 노래할 때면 그에 대해 묵상하십시오. 영혼들을 지도할 때면 그들이 무슨 피로 씻음 받았는지 묵상하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처리하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매일같이 닥쳐오는 무수한 난관을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와 다른 사람들 안에서 태어나게 할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배문한 도미니꼬(수원 가톨릭 대학 학장 · 신부)
종교 개혁으로 혼란했던 16세기에 뜨리덴띠노 공의회 정신에 따라 교회 쇄신에 앞장섰던 가롤로 보로메오는 1538년 10월 이딸리아 아로나에서 태어났다. 열심한 귀족 가운의 2남 4녀 중 차남이었던 가롤로는 노력형으로 파비아 대학에서 민법과 교회법을 공부하였다. 학교 성적은 우수한 편이 아니었으나 당시 학생들이 사치와 방탕에 젖어 있는 풍조 속에서 엄격한 생활로 타의 모범이 되었다.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지 3주 후인 1558년에 외삼촌인 추기경이 교황으로 등극, 비오 4세가 되었다. 1559년 교황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22세의 어린 나이로 추기경이 되어 교회의 여러 가지 중요한 직책을 맡아 많은 일을 해결하였다. 비오 4세의 말대로, 가롤로는 비록 나이는 젊지만 지혜와 희생심, 겸손과 사랑, 그리고 출중한 성덕으로 기대에 어긋나지 않은 인물이었다.
분망한 가운데서도 음악과 운동을 즐기고 기도에도 전념하였다. 1562년 형의 죽음으로 많은 재산을 물려받게 되자 사람들은 그가 추기경직을 포기하고 결혼할 줄로 기대하였지만, 그는 반대로 세상의 허무함을 절감하고 사제의 길을 갈 것을 결심하고 25세 때 사제로 서품되었다. 곧 밀라노의 대주교로 성성되었으나, 로마 교황청에서는 여전히 그를 필요로 하였으므로 대리자를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교황의 뜻을 따라 10년간이나 중지되었던 뜨리덴띠노 공의회(1545-1563년)를 재소집하여 개신교의 오류를 비난하고 교리를 확정하면서 교회내의 진정한 개혁과 쇄신의 기틀을 마련케 하였다. 여기에 관한 그의 숨은 공로는 말할 필요도 없이 다대하며, 특히 이 공의회 정신에 따라 본당신부를 위한 “로마 공교 요리”를 초안 감수, 발간함으로써 신앙 생활의 향상에 이바지하였다.
1565년 밀라노 대교구에 부임했고, 교황의 급서로 다시 로마에 돌아와 새 교황선거에 참여하였다. 새 교황 비오 5세(후에 성인이 됨)도 가롤로를 고문으로 추대하였지만, 가롤로는 간청을 드려 1566년 다시 교구에 돌아와 죽을 때까지 주교로서 사목활동에 전념하고 교회를 쇄신하여 공의회 주교의 모델이 되었다. 교구 행정을 정비하고 교구 시노드를 소집하였으며, 규칙적이고도 조직적인 사목 방문을 실시하였다. 북쪽 알프스 산골은 본당신부들에 의해 포기 상태에 있었으나 그는 그러한 곳까지 방문하여 설교를 하였다.
당시의 종교적 실천 행위는 세속화하고 성사는 등한시되었으며 많은 사제들이 무식하고 게으른 상태였다. 또한 수도원도 규율이 이완되었고 무질서했다. 가롤로는 이것을 고치려고 애쓰는 한편 교회 쇄신을 위해서는 훌륭한 사제 양성이 급선무임을 깨닫고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또 교구 수도단체를 활성화시키고 교육기관, 양로원, 고아원 및 병원을 설립하면서, 어린이들과 어른들에게 신앙심을 고취시켜 주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따라서, 많은 전교사 양성에 노력하였으며 특히 주일학교를 중시하였다. 결과로 사람들은 깊은 신앙심을 지니게 되었고 밀라노 대교구는 다른 교구의 모범이 되었다.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성직자와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던 가롤로는 마지막 교구 회의에서 성직자들에게 이렇게 강론하였다. “당신들은 설교하고 가르치는 임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배우는 데 힘쓰십시오. 무엇보다 먼저 당신들의 생활과 행동 자체가 설교가 되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당신들이 이 말을 하고 저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여러분들의 말을 비웃고 고개를 내젓기 시작할 것입니다.”
자기 수입의 대부분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고 스스로 사치를 피하며 가난에 만족하면서 엄한 보속을 행하였다. 추운 밤 그의 침대가 좀 따뜻했으면 하고 걱정해 주는 사람에게, 찬 침대를 없애는 방법은 그보다 더 찬 침대로 가는 것이라고 답하기도 하였다.
그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준 것은 1576년부터 2년간 흉년과 기근이 닥치고 뒤이어 무서운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였다. 지사와 귀족들은 모두 도망쳤으나 가롤로는 수도단체를 동원하여 식량을 나눠주고 예방법을 주지시키며 병자를 방문하여 성사를 주고 사망자의 장례를 치러주는 등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활약함으로써 수많은 생명을 구하였다. 이로써 사람들은 더욱더 그를 따르고, 존경을 드렸음은 물론이다.
극기와 과로로 체력이 소모되어 바랄로에 은퇴, 피정하던 중병을 얻어 1584년 11월 성체를 영하고서는 밀라노에서 46세로 임종하였다. 마지막 말은 “주여, 저는 여기 대령했나이다”였다. 유해는 밀라노 성당에 안치되었고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하여 1610년 11월에 시성되었다. 축일은 11월 4일이다.
나그네 길에 있는 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 한다. 우리도 성인을 본받아 교회 쇄신을 위하여 노력하며, 누구보다도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쇄신되어 솔선수범 정신으로 복음의 산 증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경향잡지, 1987년 11월호]
[금주의 성인] 성 가롤로 보로메오(St. Charles Borromeo, 11월 4일)
트리엔트공의회 개혁 실천
밀라노대교구장으로 혁신 앞장...가난 몸소 실천
1538-1584. 이탈리아 출생. 밀라노대교구장.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의 쇄신에 앞장선 개혁가이면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도 헌신하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은 자선가였다.
귀족가문 출신이었지만 일찍부터 사제직에 뜻을 두고 교회법과 신학 공부에 매진했다.
1559년 성인의 외삼촌이 교황(비오 4세)으로 선출됐다. 일찍이 성인의 명석함을 알아본 교황은 이듬해 22살인 성인을 교황청 국무원장으로 파격 임명했다. 성인은 교황 비오 4세를 도와 10년간 중단된 트리엔트공의회 재개에 힘써 1562년 결국 공의회를 성공리에 개최했다. 성인은 트리엔트공의회 교리서 편찬을 감독했고 사제용 성무일도서를 새로 간행했다.
성인은 1563년 사제품을 받고 곧 밀라노대교구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1565년 교황 비오 4세는 급작스레 사망했고 교황 비오 5세가 뒤를 이었다.
성인은 트리엔트공의회에서 결정된 교회 쇄신과 혁신을 실천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성직자들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하는 모범을 보였다.
성인은 자신의 수입 전부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며 가난을 몸소 실천했다. 또 전염성과 극심한 기근으로 많은 이들이 도시를 떠났지만 교구장으로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환자 가정방문과 고해성사 집전, 미사 봉헌에 헌신했다.
성인은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마태 25,35-36)라는 성경말씀을 그대로 실천했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양떼를 돌봤던 성인은 결국 건강이 악화돼 1584년 선종했다. 그리고 1610년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