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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님의 글

~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열며,,, ~

2013년 7월 25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제1독서 2코린 4,7-15

형제 여러분, 7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8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2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
13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우리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14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시어 여러분과 더불어 당신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이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복음 마태 20,20-28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외출하기 위해 교구청 주차장에 세워진 제 차를 향해 걸어가다가 조그마한 달팽이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주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가고 있더군요. 문득 이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의미 없어 보였습니다. 어디를 가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렇게 느리게 가서 언제 목적지에 도달할까 싶었지요.

한 시간 정도 외출을 나갔다가 다시 교구청으로 들어왔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오는데 한 시간 전에 보았던 달팽이가 생각나더군요. 그렇게 느리게 가고 있었던 달팽이가 지금은 어디쯤 갔는지 궁금한 것입니다. 동시에 ‘한 시간 동안 달팽이가 움직이면 얼마나 움직였겠어?’라는 생각과 함께 주차장 주변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느린 달팽이의 움직이는 속도라면 분명 이 근처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이 달팽이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포기를 하고 사제관 쪽으로 걸어가는데 화단에 달팽이 하나가 보이는 것입니다. 크기며 겉모습아까 주차장에서 보았던 달팽이였습니다.

느릿느릿 움직여서 제 시선을 벗어나는 곳까지 이동한 것입니다. 그리고 느리다고 과소평가했는데 그 느린 움직임 자체가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가 행하는 작은 움직임 자체가 처음에는 별 볼 일 없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 움직임을 통해서 큰일을 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행동 하나에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또한 남들이 보고 인정하는 큰일만을 좋아하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청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십시오.”

하늘나라에서 주님의 양 옆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높은 자리를 욕심내는 것처럼, 하늘나라에서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 다른 제자들이 무척이나 불쾌하게 여기지요. 다른 제자들 역시 그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화려한 결과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바로 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움직임. 즉, 주님의 뜻에 맞춰서 움직이는 작은 움직임들을 통해서만 하늘나라의 높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분명히 이야기하시지요.

첫째가 되려는 이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자신을 낮추는 작은 사랑의 움직임을 실천하는 우리가 됩시다.

불편함을 동반하지 않는 변화는 없다. 나쁜 쪽만이 아니라 좋은 쪽으로의 변화도 마찬가지다(리처드 후커).


야고보 사도. 축일을 맞이하시는 모든 분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내려 놓으세요.

어떤 형제님이 영적으로 뛰어나다는 어느 수도원의 수사님을 찾아가 묻습니다.

“수사님, 저는 얼마나 힘든 삶을 지내는지 모릅니다.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스트레스로 인해 너무나도 불행합니다. 제발 저에게 행복해지는 비결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수사님께서는 “제가 지금 정원을 가꾸어야 하거든요. 그동안에 이 가방 좀 가지고 있어 주세요.”라고 부탁을 합니다. 가방 안에는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지요. 그는 행복의 비결을 말씀해주지 않고 가방을 가지고 있어 달라는 부탁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정원 가꾸는 일이 급해서일 것이라는 생각에 가만히 가방을 들고 있었습니다.

별로 무겁지 않다고 생각했던 가방이었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무겁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30분쯤 지나자 점점 어깨가 쑤셔옵니다. 하지만 수사님은 도대체 일을 마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지요. 참다못한 이 형제님께서는 수사님께 물었습니다.

“수사님, 이 가방 언제까지 들고 있어야 합니까?”

이 말에 수사님께서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아니, 무거우면 내려놓지 뭐 지금까지 들고 계십니까?”

바로 이 순간 형제님께서는 커다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바로 자신이 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내려놓으면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지는데, 그 무거운 것들을 꼭 움켜잡고 가지고 있으려고 해서 힘들고 어려웠던 것이지요.

우리는 어떤가요? 혹시 내가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 것은 아닌지요? 주님 앞에 모두 내려놓으세요. 그래야 행복이 바로 내 옆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