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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님의 글

~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열며,,, ~

2013년 8월 4일 연중 제18주일

제1독서 코헬렛 1,2; 2,21-23

2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2,21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가지고 애쓰고서는, 애쓰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 제 몫을 넘겨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또한 허무요 커다란 불행이다.
22 그렇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그 모든 노고와 노심으로, 인간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23 그의 나날은 근심이요 그의 일은 걱정이며, 밤에도 그의 마음은 쉴 줄을 모르니, 이 또한 허무이다.


제2독서 콜로 3,1-5.9-11

형제 여러분, 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9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10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11 여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다인도, 할례 받은 이도 할례 받지 않은 이도, 야만인도, 스키티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복음 루카 12,13-21

그때에 13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나이가 많은 사람과 나이가 젊은 사람의 차이는 시간을 느끼는 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들을 보세요. 1년 차이만 나도 엄청난 사이가 나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나이 많은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1~2년 차이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합니다. 잘 생각해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똑같은 일 년인데, 네 살짜리 아이에게는 자기 인생의 4분의 1이지만 여든 살 어른에게는 자기 인생의 80분의 1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시간을 느끼는 마음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문제는 누구나 이렇게 나이를 먹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어리다고 영원히 어릴 수가 없으며, 또한 나이를 거꾸로 먹어 젊어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진리를 감추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언젠가 외출을 하지 않는다는 할머니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건강이 나쁜 것도 아닌데, 할머니께서는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늙은이가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흉볼까봐 그렇다고 말합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당연한 진리인데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감추고 싶은 것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어떻게 나를 보실 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만을 생각하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욕심입니다. 이 시선 때문에 더 많은 돈과 명예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 시선 때문에 더욱 더 내 자신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탐욕이라는 세상의 기준들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시지요. 자신을 위해서 재화를 모으려하지 말고, 하느님 앞에서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나이를 들어가는 것처럼, 언젠가 하느님 곁으로 가는 것도 당연한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누릴 그 시간을 기다리면서 제대로 된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기준이 하느님의 기준보다 늘 앞에 놓이는 것은 왜 일까요?

몇 해 전에 아주 힘든 일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도저히 저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지요. 매일 시간이 날 때마다 성당에 가서 십자가 아래에서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얼마나 큰 힘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때 이러한 묵상을 할 수 있었지요.

‘십자가 아래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커다란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데, 십자가의 삶을 산다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십자가 아래를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시선과 그 기준만을 따르려고 하다 보니 십자가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또한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만이 진정한 행복을 얻는,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비록 잃은 것도 많지만 아직 남은 것도 많다(알프레드 로드 테니슨).


가족이 함께 하는 소중한 주일이 되시길 바랍니다.


인디언 계산법

어느 책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하게 되네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이 아닌, 정말로 사람을 위하고 사랑하는 기준이 필요한 세상이 아닐까요?

백인들이 인디언 땅을 차지하고 미국식 교육을 주입할 때였다. 오지브와족 출신 아이가 백인들이 가르치는 학교에 들어갔다.

그들의 교육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아이는 수업 시간에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공부 못하는 학생에게 벌로 씌우는 고깔모자를 쓰고 교실 구석에 앉아 있곤 했다.

어느 날, 덧셈 뺄셈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날도 아이는 고깔모자를 쓴 채 창문 너머로 도토리를 물고 장난치는 다람쥐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질문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과를 네 개 가졌는데, 친구에게 한 개를 주면 몇 개 남지?”

늘 묵묵부답이던 아이는 처음으로 손을 들고 말했다.

“선생님,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를 줘야 해요. 친구와 뭔가를 나눌 때는 똑같이 반씩 갖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