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도성은 다윗이 이민족인 여부스족으로 부터 빼앗아(2사무 5,9) 통일된 새 왕국의 수도로 삼고 정치와 종교(2사무 6장 참조)의 중심지로 삼은 곳을 말한다. 다윗의 천재적인 탁월성은 통합된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예루살렘을 선택한데에 있다. 예루살렘은 왕국의 중앙에 위치해 있어서 남과 북을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지정학적인 위치에다가 이스라엘 어느 부족에게도 속하지 않은 중립적인 곳이었기에 새로 생긴 정치적인 연합체의 수도로 이상적이었다. 그리고 다윗 자신이 직접 정복해서 얻은 이방인의 땅이었기 때문에 힘센 지파의 눈치와 견제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1.번은 통곡의 벽에 가까운 덩게이트(오물 게이트) 6.다윗 도성 전망대. 7.다윗도성 매표소. 8.기혼샘. 9.가나안 성벽 12.왕들의 정원 13.실로암 연못 14.다윗왕조 무덤
아래 도면에서 아래쪽에 조그만한 것이 다윗 도성이고 그 위쪽 사각형 모양은 현재 예루살렘 성곽
다윗 도성의 상상도
다윗의 상징하는 하프
다윗 도성 매표소는 솔로몬이 대성전을 지어 옮겨가기 전까지 통치 행정의 중심지였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곳을 발굴하고 그 위에 지어졌다.
다윗 도성 국립공원 매표소
다윗도성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왼쪽 계단...3차원 영화를 보면 다윗도성을 에니메이션 해서 보여준다.
다윗 도성 전망대
다윗 전망대에서 바라본 예루살렘 대성전 벽. 엘?사 이슬람 사원이 보인다.
아래 키드론 계곡을 바라보고
키드론 계곡이 흘러 내려가는 곳키드론 계곡과 다윗 도성의 능선 경사도를 볼 수 있다. 사진 왼쪽은 실완 아랍 마을
석류 꽃...
매표소 아래 고고학 발굴 현장
고고학 발굴현장 'G 지역'
1.2차 성전 시대의 탑 2.첫번째 성벽-2차 성전시대 3. 여부스 족의 시온 성 요새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 4.2차 성전 시대의 탑 5.계단 6.아이엘(Ahiel)의 집 7.화장실 구조물 8.불탄 방
아이엘(Ahiel)의 집 돌기둥...고고학 발굴을 하면서 그릇 조각에서 Ahiel 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던것에 유래하는데, 이 이름은 또한 이곳에 있었던 어느 성곽 탑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파란 문이 있는 건물이 기혼샘 건물...키드론 계곡이 흘러 내려가는 정중앙에 기혼샘이 있다.
사진 오른쪽...옆에 사람이 있고...워렌 지하 통로로 들어가는 입구
발굴 작업 사진들과 발굴한 유물들 사진
시멘트 벽을 통과 해 들어가면 워렌의 수직 통로가 나온다.
통로를 따라 내려 가는 계단...
수평 터널
수직 통로부분
자연적인 석회암 동굴들이 통로 옆으로 나 있다.
워렌 터널 안 발굴 공사 현장...도시 성벽 기둥들...
기혼 샘으로 내려가는 마지막 계단...계단을 내려가면 물이 솟아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기혼샘에서 흘러나와 히즈키야 터널로 들어가는 물
손전등에 의지 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오감만을 이용해서 어두운 터널을 지날 수 있다면...이 터널의 끝 실로암 연못에서 태생 소경을 치유해 주신 예수님의 기적에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작 부분에서는 천장이 낮아 키가 크신 분들은 허리를 숙이고 지나가야 합니다.
방향이 두군데로 나 있는것은 양쪽에서 파 들어갔기 때문에 생긴거라고 합니다.
물건들을 넣을 수 있게 파 놓은곳도 있구요...
실로암 연못쪽으로 다가갈수록 천장은 높아집니다...출구쪽은 높이가 5미터 정도...
이 사진에서 높이를 어느정도 가늠해 보실 수 있겠죠?
실로암 비문 사본
어둠에서 광명으로...예수님께서 태생 소경에게 기적을 베푸신 실로암 연못....
대략 2700년전, 히즈키야 임금 때 터널을 만들고 비문을 만들었다고...
히즈키야 터널에 있는 실로암 비문 모형
아래 비문은 터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있는 '실로암 비문' 원본 사진
돌 기둥들은 비잔틴 시대 성당의 흔적이다.
성당 기둥의 흔적들...
실로암 연못 위쪽...현재 실로암 연못 주위엔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고고학 발굴 현장...철골 구조물 아래쪽에는 실로암 연못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실로암 연못 그림 앞에서 설명하고 있는 이스라엘 안내자...
기혼샘에서 흘러들어온 물이 히즈키야 터널을 통해서 실로암 연못이 있었던 곳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다.
히즈키야 터널에서 흘러 들어온 물을 고고학 발굴을 하면서 밖으로 빼내고 있다...
왼쪽은 수로이고...그 오른쪽 옆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곳이 실로암 연못이었다...
실로암 연못의 계단...
사진 중간에 있는 돌 벼랑 아래와 밭이 있는 곳이 실로암 연못이 있었던 곳....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를 빌어라. “너를 사랑하는 이들은 평안하여라. 네 성안에 평화가, 네 궁궐 안에 평안이 있으리라.” 내 형제들과 벗들을 위하여 나는 이르네. “너에게 평화가 있기를!” 주 우리 하느님의 집을 위하여 너의 행복을 나는 기원하네.
히즈키야 터널-실로암 비문-실로암 연못
다윗 도성
다윗 도성의 북쪽에는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인 모리야산이 있고(창세 22,2; 2역대 3,1 참조), 서쪽으로는 티로페이온 골짜기와 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키드론 골짜기로 이어지는 긴 삼각형 모양의 언덕위에 지어진 천연 요새였다. 이 티로페이온 골짜기와 키드론 두 골짜기는 남쪽 실로암 연못 쪽에서 만난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다윗 도성은 예루살렘 성곽 밖, 덩 게이트(오물 게이트) 근처에 있는데 다윗의 위대함에 견주어 보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그 규모가 매우 작음에 놀란다. 크기는 남북으로 375m, 동서로 120m, 면적은 대략 3ha 정도이다. 이 자연적인 언덕 위에 사방을 성벽으로 쌓고 네 성문으로 경비 하였으며 남과 북의 성문에는 망대를 설치하였다.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은 북쪽 모리야 산으로 도성을 확장하였고(1열왕 9,15 참조) 그 후 서쪽으로 확장되어 갔다.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쳐들어올 것을 대비하여 히즈키야 임금은 수로와 도시 성벽을 확장 보수 하여(2역대 32,1-23) 솔로몬 시대보다 3배 정도로 도시 규모가 커졌었지만 기원전 586년 바빌론의 침공으로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왔을 때는 솔로몬 시대의 도시 규모로 축소되었다.다윗 성이 여부스족에게서 빼앗아 다윗이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은 곳, 그 후 솔로몬이 솔로몬 성전까지 확장.기혼샘에서부터 점선으로 이어진것이 히즈키야 터널이다. 그리고 히즈키야 터널 끝에 있는것이 실로암 연못
이스라엘 성서 박물관에 만들어 놓은 다윗 도성과 솔로몬 대성전. 산 능선과 예루살렘 지형을 입체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왼쪽 부분이 다윗 도성. 사진에서 도성 아래쪽이 키드론 계곡이다.
예루살렘 박물관에 있는 성전시대 모형. 사진 오른쪽 중간 부분에 있는 큰 건물이 제2차 성전이고...그 아래쪽에 있는 것이 다윗 도성. 다윗 도성 오른쪽은 키드론 계곡
사진 중간에서 위쪽 둥글게 보이는 곳이 예루살렘 대성전, 바위돔 사원이 있고...그 아래쪽은 키드론 계곡과 다윗 도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왼쪽 도로를 따라서...오른쪽 키드론 계곡 사이가 다윗 도성
시온산을 바라보고...사진 중간에 뾰족 솟은 탑은 시온산에 있는 성모님 영면 성당
현재의 예루살렘 성곽은 1532년부터 오스만 터키 제국의 슐레이만 2세(1520-1566 재위)에 의해 복원되기 시작하여 1539년 완성 되었는데 이때 다윗 도성은 예루살렘 성곽 밖에 위치하게 되었다. 19세기 중반에 스코틀랜드 사진사가 찍은 사진에 의하면 다윗 도성은 계단식 밭으로 된 능선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나 보인다. 예루살렘 대성전과 다윗의 도성 그리고 그 오른쪽에 있는 키드론 계곡과 올리브 동산의 모습이 확연하다.
근대에 접어들어 다윗 도성에 정착하기 시작하는 것은 1874년에 유대교 랍비들과 상인들이 스페인에서 추방되어 예루살렘 도성에서 가까운 언덕 위에 정착하면서 부터이다. 그 후 영국의 위임통치 기간에 다윗 도성 능선에서부터 실완(Silwan) 아랍 마을까지 주거지역은 확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7년 이후에도 다윗 도성 능선에는 아랍 주민들이 계속 집을 늘려 나갔는데, 최근 들어 이스라엘 정부는 아랍인들의 집을 계속 사들여 그들의 영역을 넓혀가며 옛 다윗 도성을 되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윗 도성’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여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으며 고고학 발굴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고대 도시의 정치 행정의 중심지였던 곳을 발굴하고 그 위에 지은 다윗 도성 국립공원 관리 사무소와 매표소
기원전 7세기에 지어져 바빌론 유배(기원전 586년)를 거치면서 파괴된 집들은 1차 성전시대에 유행했던 4개 방 구조로 되어 있다.
예루살렘은 기원전 1800년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지만 그리 주목을 받는 곳은 아니었다. 성경에서는 창세기 14장에서 처음으로 나오는데 다섯 임금이 동맹을 맺고 소돔에 살고 있던 아브람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들을 약탈해 가자 아브람이 나서서 되찾아 올 때 ‘살렘왕 멜키체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마중 나오는 기사에서 ‘살렘’ 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창세 14,18 살렘 임금 멜키체덱도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다. ‘평화’를 상징하는 ‘살렘’은 예루살렘의 시적 명칭이기도 하며, 요세푸스(Josephus)도 살렘과 예루살렘을 동일시한다고 진술하고 있다.시편 76,3 : 살렘에 그분의 초막이, 시온에 그분의 거처가 마련되었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며 정착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200년 이상 예루살렘은 정복하지 못한 채 가나안의 원주민인 여부스족이 살고 있었다.(여호 10,1-10; 판관 19,11-12 참조)기원전 1000년 경 다윗은 헤브론에서 일곱 해를 다스린 후(1역대 29,27; 2사무 5,5) 여부스족이 사는 시온 산성을 점령하여(2사무 5,7;1역대 11,4-7) 다윗 왕국의 수도로 정하였다. 여부스족은 어느 누구도 자기들의 시온 산성을 점령하지 못할 거라고 장담하였지만 다윗의 부하들은 오늘날 ‘워렌의 지하수로’라고 불리는 기혼샘과 연결된 지하 수로를 타고 올라가 여부스족의 성읍을 점령하였다.
다윗은 이민족인 여부스족이 차지하고 있던 성곽 도시인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키르얏 여아림에 있던 계약의 궤를 다윗 도성에 옮겨 놓음으로써(2사무 6장 참조) 다윗 도성은 명실상부한 다윗 왕국의 중심이 되었다.2사무 6,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집안은 함성을 올리고 나팔을 불며, 주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1968년과 1984년 사이에 이루어진 발굴 작업에서 기원전 1000년부터 오스만 제국 시기에 이르는 기간의 것으로 추정되는 25개의 다양한 지질층이 발견되었다.
다윗과 솔로몬을 비롯하여 많은 왕들이 다윗 성에 장사 되었다는 성경의 기록이 있으며 신약에서 사도행전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언급으로 시온산에 다윗의 무덤이 있다는 전승이 생겨났고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시기에는 시온산 위에 다윗의 무덤이 생겨났다. 그러나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윗성은 지금의 시온산이 아니라 오늘날 다윗 도성 국립공원이 자리하고 있는 자리이다. 다윗 도성의 실로암에 가까운 곳에 무덤 형태의 큰 묘실을 발굴하여 이것을 왕들의 무덤이라고 하였으나 아직 통일된 의견은 없다. 어떤 학자들은 제2차 성전 시대의 창고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다 다윗 왕조의 무덤이었을 거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히즈키야 터널을 직선거리로 뚫지 않고 'S' 자형으로 만든 것은 위에 있는 왕들의 무덤을 피해간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1열왕 2,10 다윗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 성에 묻혔다. 1열왕 11,43 솔로몬은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자기 아버지 다윗의 성에 묻히고...1열왕 14,31 르하브암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 성에 조상들과 함께 묻혔다. 사도 2,29 형제 여러분, 나는 다윗 조상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 다윗 왕조의 무덤으로 가는 길...
지난세기에 다윗도성의 아래쪽, 실로암 연못에 가까운 쪽에서 바위돌을 깎아 만든 방들이 발견 되었다. 고고학자인 R.Weill에 의하면 이것은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윗 왕조의 무덤이라고 주장 했다. 그 증거로 히즈키야 터널이 직선으로 뚫리지 않고 'S'자형으로 만든것은 그 위쪽에 있는 왕조의 무덤을 비켜가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Weill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것은 2차 성전시대의 저장창고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무덤으로 추정되는 이곳은 기원 후 2세기경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117-138)가 2차 유대 항쟁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한 후 예루살렘을 로마의 지방 도시로 건설하면서 무덤 위에 있던 돌들을 다 뜯어가 현재는 무덤의 모양은 거의 파손되었고 앙상하게 남아 있다.
Weill은 돌을 깎아 만든 무덤 바로 아래쪽에서 유대교 회당의 받침돌 위에 그리스어로 새겨진 비문을 발견했는데, 베타노스의 아들 테오도토스라는 남자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
기혼샘(Gihon Spring)여부스족이 살았고, 다윗이 다윗 도성을 건설하여 이스라엘의 중심지로 만들 수 있었던 천연적인 요인은 바로 예루살렘의 유일한 샘물인 ‘기혼샘’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 도성의 동쪽 비탈길 아래, 키드론 계곡에서 생겨나는 기혼샘은 여름의 건기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
이슬람 전승에 의하면 이곳에서 힘차게 흘러 나오는 기혼 샘물은 메카까지 지하로 흐른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전승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기혼샘은 과거에는 불규칙적으로 물이 솟아 나오는 카르스트 지형(침식된 석회암 대지) 샘물이었다. 히브리어 '기혼'(gihah)는 '힘차게 분출하는'의 뜻을 가지고 있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기혼샘은 더이상 불규칙적이지 않고 하루 2,000 세제곱미터(cubic meters)의 물을 규칙적으로 품어낸다고 한다.다윗 도성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키드론 계곡과 기혼샘...사진 오른쪽 중간에 붉은 기와집 위쪽에 사각형 건물이 기혼샘물 자리...
사진 중앙에 있는 건물이 기혼샘물 자리...기혼샘은 워렌 수직통로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
사진 중앙에...출입문 위쪽에 파란 딱지가 붙어 있는것이 기혼샘 건물...그리고 사진 오른쪽 능선부분에 다윗 도성 전망대가 보인다... ↓이 아래 건물
다윗 임금은 차독 사제와 나탄 예언자 그리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에게 명령하여 기혼샘에서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1열왕 1,20-45 참조)1열왕 1,33 33 임금이 그들에게 명령하였다. “그대들은 그대들 주군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내 아들 솔로몬을 내 노새에 태워 기혼으로 내려가시오. 34 거기에서 차독 사제와 나탄 예언자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시오. 그러고 나서 나팔을 분 다음, ‘솔로몬 임금 만세!’ 하고 외치시오. 38 그리하여 차독 사제와 나탄 예언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크렛 사람들과 펠렛 사람들이 내려가, 솔로몬을 다윗 임금의 노새에 태워 기혼으로 데리고 갔다. 39 차독 사제가 기름 담은 뿔을 천막에서 가져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고 나서 나팔을 분 다음, 모든 백성이 “솔로몬 임금 만세!” 하고 외쳤다. 기혼샘은 지상으로 놓여 있는 ‘실로암 수로’와 지하에 수직으로 건설된 ‘워렌의 수로’ 그리고 ‘히즈키야 터널’과 연결되었다. 일찍이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이전에 여부스족들도 전시를 대비하여 기혼 샘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비밀 통로(워렌의 수로)를 만들어 놓았었고, 후에 히즈키야도 이 기혼 샘물을 이용하여 아시리아 제국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었다.
2역대 32,30 기혼 샘의 위쪽 물줄기를 막아 다윗 성 서쪽 밑으로 돌려 끌어들인 것도 바로 히즈키야이다. 히즈키야는 하는 일마다 성공하였다. 1899년에 기혼샘에서 실로암 연못에 이르는 지역에 대하여 발굴 작업을 하면서 새로운 터널이 발견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가나안 터널’이다. 이 터널은 기원전 1800년경인 중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가나안 터널은 히즈키야 터널과 비슷한 모양이나 물이 말라 있다. 가나안 터널은 120m이고 10분 정도. 물은 말라있다.
실로암 수로(Siloam canal)워렌 수직통로와 히즈키야 터널이 지하 터널을 파서 물을 공급하는 통로와 수로라면 실로암 수로는 키드론 골짜기의 바깥 경사면을 따라 흘러 키드론 계곡 아래쪽 400m 정도의 농경지에 물을 공급해 주기 위해 만들어진 지상에 만들어진 수로이다. 키드론 계곡의 바닥 경사면에 있는 바위를 다듬어 다윗도성 남서쪽 끝에 있는 못에 물을 모으고 밭에 물을 댈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이 수로는 요새 밖에 위치하여 평화 시에만 이용할 수 있었다.
워렌 수직통로
영국군 대위 워렌(Charles Warren)은 1867년 히즈키야 터널을 탐색하다가 기혼샘에서 수직으로 위쪽으로 뚫려 있는 터널을 발견하였다. 암벽을 뚫어서 만든 지름 2m 정도의 원통형 수직 터널이 수면에서부터 13m 높이로, 경사면의 터널로 이어지다가 계단식 터널을 거쳐 위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적에게 성이 포위 되었을 경우에도 성 안에서 성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지하로 연결된 터널을 이용하여 예루살렘의 유일한 기혼샘으로부터 물을 길어 올리기 위한 것이었다. 여호수아와 판관들에 의한 가나안 점령기에 12지파에게 점령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천연적인 방어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부스 사람들은 다윗이 공격을 해오자 업신여기며 조롱을 하였으나 다윗의 부하들은 이 지하수로의 비밀을 알아내고, 수로를 타고 올라가 철옹성 같던 시온 산성을 쉽게 정복 할 수 있었다.
> 2사무 5,6-9 :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다 6 다윗 임금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에 사는 여부스족을 치려 하자, 여부스 주민들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너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도 너쯤은 물리칠 수 있다.” 그들은 다윗이 거기에 들어올 수 없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7 그러나 다윗은 시온 산성을 점령하였다. 그곳이 바로 다윗 성이다. 8 그날 다윗이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여부스족을 치려는 자는 지하 수로로 올라가, 이 다윗이 미워하는 저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을 쳐라.” 여기에서 “다리저는 이와 눈먼 이는 궁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 생겨났다. 9 다윗은 그 산성에 살면서, 그곳을 ‘다윗 성’이라고 하였다. 다윗은 밀로 안쪽으로 성곽을 둘러쌓았다.
1역대 11,4-7 :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다 4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예루살렘 곧 여부스로 갔다. 그 곳에는 그 땅의 주민 여부스족이 있었다. 5 여부스 주민들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너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그러나 다윗은 시온 산성을 점령하였다. 그곳이 바로 다윗 성이다. 6 그때에 다윗이 말하였다. “누구든지 제일 먼저 여부스족을 쳐 죽이는 이가 우두머리와 장수가 될 것이다.” 그러자 츠루야의 아들 요압이 제일 먼저 올라가 우두머리가 되었다. 7 다윗은 그 산성에 살았다. 그리하여 그곳을 ‘다윗 성’이라고 하였다.
이 지하수로는 발견자의 이름을 따라 ‘워렌 수직통로’(Warren Shaft) 또는 ‘워렌 수구’라고 부른다. 여부스족이 이용했던 이 수직통로는 암반에 나타난 수직 균열과 자연적으로 침식된 석회암 동굴 등 천연적으로 형성된 터널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1.입구 2.기원전 18세기의 도시 성곽 3.워렌 수직 통로 4.히즈키야 터널 5.가나안 터널 6.키드론 계곡
히즈키야 터널(Hezekiah's Tunnel)기원전 701년경 유다 왕 히즈키야는 아시리아 제국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입하려는 것을 알고,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의 급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도성 밖에 있는 기혼샘의 물줄기를 막고, 지하 터널을 파서 물을 예루살렘 성안으로 끌어들였다(2열왕 20,20; 2역대 32,1-5). 이렇게 기혼샘에서부터 실로암 연못까지 연결한 지하 수로를 ‘히즈키야 터널’이라고 부른다. 히즈키야 터널은 로마 제국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수로로서는 가장 획기적인 지하 수로로 손꼽힌다. 그 이전에 있었던 워렌 수직 통로는 수로가 아니라 물을 길어 올리는 통로였기 때문에 많은 양의 물을 원활하게 공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하 수로를 생각하였을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유일한 샘이었던 기혼샘은 다윗 도성 동쪽의 키드론 계곡에 위치해 있고 그 동쪽 건너편(현재 실로완 마을)에는 다윗 도성과 비슷한 높이의 언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혼샘을 성 밖에 두고 성벽을 건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도시 남쪽에서는 실로암 연못을 포함하여 낮은 지역에 성벽을 건설할지라도 그 근처에 보다 높은 언덕이 없기에 적으로부터 방어가 용이하였다. 이와 같이 히즈키야 왕은 아시리아 제국의 산헤립이 공격해 올 것을 대비하여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한 성벽과 우물을 확보함으로써 예루살렘을 지킬 수 있었다.
2열왕 20,20 히즈키야의 나머지 행적과 그의 모든 무용, 그리고 그가 저수지와 수로를 만들어 도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인 일에 관해서는 유다 임금들의 실록에 쓰여 있지 않은가?
2역대 32,1-5.30 1 이렇게 일을 충실하게 이루어 놓은 다음이었다.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쳐들어왔다. 그는 유다에 쳐들어와서 요새 성읍들을 점령할 생각으로 진을 쳤다. 2 히즈키야는 산헤립이 와서 결국 예루살렘을 공격하리라는 것을 알고, 3 대신들과 용사들과 함께 의논한 뒤, 도성 밖에 있는 샘들의 물줄기를 막기로 하였다. 그들이 임금을 지지하자, 4 많은 백성이 모여 모든 샘과, 이 땅에 흐르는 시냇물을 막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아시리아 임금들이 와서 어찌 많은 물을 얻게 내버려 두겠는가?” 하고 말하였다. 5 히즈키야는 용기를 내어 허물어진 성벽들을 모두 쌓고 탑들을 높였으며, 성 밖에 또 다른 성벽을 쌓았다. 그는 다윗 성 안에 있는 밀로 궁을 보수하고 표창과 작은 방패도 넉넉하게 만들었다.
30 기혼 샘의 위쪽 물줄기를 막아 다윗 성 서쪽 밑으로 돌려 끌어들인 것도 바로 히즈키야이다. 히즈키야는 하는 일마다 성공하였다. 히즈키야 터널은 지도상의 직선거리로는 335m이지만 ‘S’자형 굴곡을 이루고 있어서 터널의 전체 길이는 533m이다. 터널 입구의 수로 시작 부분과 터널이 끝나는 지점의 높낮이 차이는 불과 30cm 차이로 533m나 되는 긴 거리를 무척 완만한 경사로 만들어 물이 흐르게 하였다.
1880년에 발견된 ‘실로암 비문’으로 인해 히즈키야 터널의 공사 과정이 밝혀졌다. 터널은 양쪽 입구에서 안으로 파 들어갔는데 터널 입구 쪽 내부의 높이는 2m 정도이고 남쪽 출구 쪽에서는 5m, 굴 폭은 80cm-100cm 정도로 완전한 암석 지대를 파서 만든 터널이다. 터널이 'S'자형으로 굽어져 있는 것은 지하의 균열된 틈을 따라 굴착 작업을 했거나 아니면 터널 위에 있던 다윗 왕가의 무덤을 피해가기 위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1.히즈키야 터널 입구 2.가나안 터널 3.양쪽에서 터널을 파 나오다 중간에서 만난 지점 4.실로암 연못A.B.C는 히즈키야 터널의 단면도. 입구쪽에서부터 출구까지 여러 곳에서의 단면도를 보여줌. 입구쪽에서보다 출구쪽은 높이가 상당히 높음을 알 수 있다. A는 히즈키야 터널의 입구쪽인 북쪽 B.중간 만난지점 C.실로암 연못쪽인 남쪽부분.
히즈키야 터널은 1838년 미국인 성서학자인 로빈슨(Edward Robinson)에 의해 발견 되었다. 다윗 도성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하면 워렌 수직 통로와 히즈키야 터널을 돌아볼 수 있다. 히즈키야 터널을 통과 하는데 대략 40분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며 물의 깊이는 계절과 시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히즈키야 터널을 들어가는 입구 쪽에서 허리 정도에 차는 작은 물웅덩이가 있고(대략 70cm 정도), 그곳을 통과하면 출구까지 일정한 무릎정도의 일정한 물높이가 계속된다. 워렌 수직통로는 조명 시설이 잘 되어 있지만 히즈키야 터널은 손전등을 준비해야 한다.
기혼샘으로 내려가는 계단...
533미터의 터널을 지나며 중간중간 찍은 사진들...망치로 파낸 터널 벽을 만져보고, 흐르는 물과 터널의 높낮이 그리고 터널의 폭 등 조금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기를...
흐르는 물높이를 가늠해 보실 수 있겠지요...그리고 반바지를 자세히 보면 젖은부분과 마른 부분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가장 깊은 곳의 높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실로암 연못에 다다르기 직전에 왼쪽에 실로암 비문이 발견된 곳...원본은 터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중이고...이것은 사본입니다.
실로암 비문(Siloam Inscription)1880년에 발견된 ‘실로암 비문’은 실로암 연못에서 수영을 하던 마을 아이들에게 우연히 발견 되었다. 실로암 연못 쪽에서 6m 쯤 들어간 히즈키야 터널동쪽 벽에서 발견 되었는데 높이 38cm 길이 72cm인 이 비문은 초기 히브리어로 된 것으로 왕국 시대에 속하는 중요한 히브리어 본문이다. 이 비문은 현재 터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히즈키야 터널 출구 쪽, 즉 실로암 연못 가까이에 있는 '실로암 비문' 왼쪽 검정 안내판과 그 아래는 비문 모형, 그리고 사진 중앙에 밝은 부분은 실로암 연못 쪽 출구.
실로암 비문이 발견됨으로써 히즈키야 터널의 공사 과정이 생생하게 밝혀졌다. '굴은 두 팀에 의해서 양쪽에서 중심부를 향해 파 들어갔고 중간 지점에서 만났다.' 히즈키야 터널을 보면 파들어 가다가 중단한 곳들이 여러 군데가 있는데 양쪽에서 파 들어간 공사 과정의 실수로 인한 것이다. 비문에는 '중심부를 향해 파 들어가고 있을 때 3큐빗(1큐빗=52.5cm) 정도 남겨 놓았을 쯤 반대쪽에서 동료들 간에 서로 말하는 소리가 암벽 틈을 통해 들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돌을 깎아 나갔고 기혼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은 1200큐빗 거리를 흘러 들어갔다. 사람들의 머리 위에 있는 바위까지의 높이는 100큐빗이나 되었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침식된 석회암 지대를 따라 터널을 넓게 확장한 것으로 추정한다.
실로암 연못(Siloam Pool)“파견된 이”라는 뜻을 가진 실로암 연못은 “잔잔히 흐르는 실로아 물”(이사 8,6)과 히즈키야의 터널을 언급하는 역대기 하권(2역대 32,30) 그리고 여러 군데에서(이사 12,3; 느헤 3,15; 요한 7,37-39) 언급하고 있다. 실로암 연못은 길이 17.4m, 폭은 5.4m, 깊이는 5.7m이었다고 하며 신약성경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인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기적과((요한 9,1-12) 실로암 탑이 무너져 사람들이 죽은 사건을 언급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장면(루가 13,1-5)에서 나온다.
비잔틴 시대인 기원후 5세기에 황후 에우도치아(Eudocia)에 의해 소경의 눈을 치유하신 기적을 기념하여 실로암 연못 위에 성당이 건축 되었다. 이 성당은 마다바 지도(Madaba Map)에도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 후 성당은 페르시아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고 이슬람 사원이 건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실로암 연못은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고고학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실로암 연못의 여기저기에 비잔틴 시대에 성당 기둥으로 쓰였던 돌기둥들을 볼 수 있다.
요한 9,11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히즈키야 터널의 출구 쪽...히즈키야 터널은 다윗 도성을 통해서만 들어가도록 했다. 실로암 연못 쪽에서는 관리하는 아랍 사람에게 입장료를 주고 웃돈을 주면 실로암 연못 쪽에서 조금 들어갔다 나오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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