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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님의 글

~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열며,,, ~

2013년 9월 10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제1독서 콜로 2,6-15

형제 여러분, 6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7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8 아무도 사람을 속이는 헛된 철학으로 여러분을 사로잡지 못하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이 세상의 정령들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9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10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권세와 권력들의 머리이십니다. 11 여러분은 또한 그분 안에서 육체를 벗어 버림으로써, 사람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12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
13 여러분은 잘못을 저지르고 육의 할례를 받지 않아 죽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분과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15 권세와 권력들의 무장을 해제하여 그들을 공공연한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을 이끌고 개선 행진을 하셨습니다.


복음 루카 6,12-19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어느 성당의 이야기를 주교님으로부터 듣게 되었습니다. 글쎄 어떤 사건으로 인해서 성당 사람들이 두 파로 나눠진 것입니다. 그래서 한쪽에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다른 쪽에서 반대를 하고, 또 다른 쪽에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온갖 비난과 비방으로 이쪽 역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러한 상태이니 성당이 어떻게 조용하겠습니까? 항상 시끄러웠고 문제 많은 성당으로 교구 내에서 아주 유명한 성당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어떤 신부님께서 새롭게 부임해서 가셨습니다. 그리고 두 달 만에 이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하셨답니다. 그냥 조용한 성당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 문제 많은 성당을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성당으로 바꿔 놓은 것입니다. 그 방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 신부님께서 워낙 말씀을 잘 하셔서? 아니면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아니었습니다. 이 신부님께서 하신 것은 함께 기도하자는 말씀만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당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새벽미사와 성체강복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통해 서로를 돌아보는 시간,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 스스로를 회개하고 사랑의 주님을 닮는 시간을 가졌던 것이지요. 그 결과 딱 두 달 만에 그렇게 심했던 모든 갈등이 사라졌습니다. 도저히 없어지지 않을 것 같은 다툼과 갈등이 사라지고, 서로를 먼저 생각하는 사랑의 본당 공동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인간적인 능력과 말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 아버지만이 해결할 수 있으며, 이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기도를 얼마나 하고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주로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성경 안에서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으로 되어 있지요.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았고,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서 진복팔단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수난 전 날 올리브 산에서 피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나가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는 열두제자의 선택을 위해 밤을 새워 하느님께 기도하러 산에 가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인 예수님께서도 중대한 결정을 위해 밤을 새워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성급하게 판단하고 결정했을까요? 혹시 아무런 기도 없이 순간적인 생각과 말로 일치된 하느님의 뜻이 아닌, 공동체의 분열을 가져오는 내 뜻만을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인간의 능력만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대신 그 자리에 기도로써 주님을 초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인간적인 잘못들에서 벗어나 주님의 뜻이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훗날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이정하).


우리들의 마음이 가득 담긴 정성된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예수님을 자랑스러워하십니까?

예수님 믿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십니까? 식사 때에 보면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지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당당하게 천천히 성호를 긋고 정성껏 식사 전 기도를 하는 사람은 예수님 믿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신앙인이라는 것을 티내기 싫다면서 식사 전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사람이 볼까봐 1초도 걸리지 않게 성호를 대충 긋는 사람은 어떨까요? 과연 예수님 믿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일까요?

그런데 이러한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과연 자랑스러워하실까요?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그 만큼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부끄러워하실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를 자랑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믿음을 더욱 더 굳건히 키울 수 있도록 노력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