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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님의 글

~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열며,,, ~

2013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제1독서 민수 21,4ㄴ-9

4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5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6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8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9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복음 요한 3,13-17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신학교에 처음 입학해서 살기 시작한 기숙사의 방은 16명이 함께 사는 방이었습니다. 16명이 함께 산다고 하니 무슨 집단 수용소처럼 생각도 되었지만, 원래 그렇다는 선배들의 말에 ‘그러려니’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럿이 사는 것에 문제점이 하나 있더군요. 그것은 한밤중에 들리는 친구의 심한 코골이 소리였습니다. 그 친구보다 먼저 잠들어 버리면 상관이 없지만 그 친구가 먼저 잠들어 버리면, 그날은 코골이 소리 때문에 양 숫자를 하염없이 세면서 긴 밤을 보내야만 했지요.

그리고 몇 년 뒤에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어떤 친구가 코를 심하게 골더군요. 저는 다음 날 아침 이 친구를 향해 말했습니다.

“야! 너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어.”

그런데 이 친구가 오히려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야! 네가 더 심하더라. 너는 이도 갈던데?”

저는 제가 코골이를 하는 줄 몰랐습니다. 제가 코 고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그냥 조용히 꼼짝도 안 하고 잘 자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더군요. 어쩌면 제 주변에는 착한 사람들만 있어서, 저의 심한 코골이 소리를 꾹 참아준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배려를 늘 받으면서도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그래서 남 탓만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사랑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배려하지도 못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가장 큰 위선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감히 ‘사랑’이라는 단어를 써서는 안 됩니다. 배려하는 사랑, 희생하는 사랑, 아낌없이 나눠 줄 수 있는 사랑.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이 세상 안에서 주님의 십자가가 들어 올려진 것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모세가 광야에서 들어 올려진 뱀을 본 사람만이 구원을 얻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이 세상 안에서 주님을 바라봐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을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세상 안에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남을 배려하고, 자신을 희생하고,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이 세상 안에 들어 높여진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을 바라봅니다. 개인이 중심이 되고, 물질에 대한 욕심이 점점 크고 넘치는 세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주님의 사랑이 세상에 들어 높여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을 세상에 들어 높일 수 있는 오늘을 만들어 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뒤돌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냥 뒤로 묻힐 뿐인 것이 돼 버린다. 내가 뒤척이지 않으면, 나를 뒤집어 놓지 않으면 삶의 다른 국면은 찾아와 주지 않는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모두 뒤에 있는지도 모른다(이병률).


세상에 주님의 십자가를 들어 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의사 전달 수단

우리들이 사용하는 의사전달 수단들이 있지요. 바로 듣기, 말하기, 쓰기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의사전달의 수단은 ‘듣기’라고 합니다. 전체 소통의 약 50% 이상을 듣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쓰기보다 5배, 읽기보다 3배, 말하기보다 2배 이상 사용하는 것이 바로 듣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남의 이야기를 듣는데 상당히 약하다는 것입니다.

남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 오히려 나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시킬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 역시 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내가 말하는 것을 통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주님의 뜻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이 세상 안에서 참 행복의 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의사 전달을 하고 있나요? 이제는 말하는 것보다는 듣는데 더욱 더 최선을 다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