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명연신부님의 글

~ 빠다킹신부님과 새벽을 열며,,, ~

2013년 10월 17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로마 3,21-30ㄱ

형제 여러분, 21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26 이 죄들은 하느님께서 관용을 베푸실 때에 저질러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어, 당신께서 의로우신 분이며 또 예수님을 믿는 이를 의롭게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27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그리되었습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입니다. 28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29 하느님은 유다인들만의 하느님이십니까?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은 아니십니까? 아닙니다.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30 정녕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복음 루카 11,47-54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7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48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49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0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51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52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53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54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큰 꿈을 품고 있는 청년이 주님께 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큰 인물이 되도록 해주십시오.”

매일 이렇게 기도했고 또한 그러한 인물이 되기 위해 스스로도 열심히 생활했지만 세상을 변화시키기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 청년이 40대가 되었지요. 그런데 그 동안 자신이 한 것을 떠올려보니 세상을 변화시킬 일을 하나도 한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기도가 헛된 기도였음을 깨닫게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인물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다음과 같이 바꿨다고 합니다.

“주님, 저를 먼저 변화시켜 주소서!”

이런 기도를 매일 바치면서 그는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먼저 성찰하였고, 내 삶 안에서 바꿀 수 있는 작은 부분들을 하나씩 바꾸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바꾸는 그 노력들이 모아지면서 점차 저절로 이 세상에서 영향력이 있는 존재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남을 바뀌게 하리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 일이지요. 바로 내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나를 바꾸는 것보다는 남을 바꾸려는 불가능한 일에 더 큰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본인 스스로도 힘들어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 아픔과 상처를 전해 주지요.

주님께서 원하는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이 세상 안에서 얼마나 큰일을 하느냐?’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이 세상 안에서 주님께서 기뻐하실 존재가 되느냐?’를 원하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꾸짖고 있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이 변화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율법이라는 무기를 내세워 다른 이들을 죄인으로 만들고 무조건 변화하라고 명령하고 있지요. 정작 자신들은 겉으로만 그럴싸하게 보이면서 대접받고 존경받기를 원하면서 전혀 변화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이러한 충고조차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오히려 독한 앙심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변화되지 않는 이 모습이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역사에 기록된 커다란 잘못을 범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들도 과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해서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맞고 남은 틀리다는 편협된 생각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내 자신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불행하여라!”라는 말이 아닌, “행복하여라!”라는 말을 주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습니다.

내게 길일(吉日)을 기다리라고 하지 마십시오. 길일은 바로 오늘입니다(자크 아탈리).


물이 흐르는 터널같지요? 사실 밑은 물이 아니라 하얀 비닐봉지랍니다. 실제와 사진은 다릅니다.


목표량을 채우자.

사업을 하는 한 사장님이 자신의 직원들에게 각자의 목표량을 달성하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목표를 달성하는 직원에게 인센티브로 자신의 멋진 바닷가 별장을 쓰게 해주겠다고 제의했지요. 그러자 한 직원이 물었습니다.

“사장님께서 해변에 별장을 가지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자 사장님은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없지. 그렇지만 자네들이 목표를 달성하면 별장을 가질 수 있게 된다네.”

그렇습니다. 직원들이 목표를 달성해주면 사장님께서는 멋진 별장을 가질 수 있게 되겠지요.

하느님께서도 우리들을 이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자신의 목표량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목표량을 채우면 하느님께 이득이 돌아가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어 온전히 우리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는, 즉 우리에게만 이득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 사랑을 기억하면서, 바로 내 자신을 위한 우리의 목표량인 사랑의 실천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