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살리는 법, 죽이는 법
-이기양 신부-
'고슴도치도 제 새끼털은 부드럽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도 있지요. 모두가 자기 자식이나 자기 사람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자기와 친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전혀 모르는 사람과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이셨지요. 예수님께서는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제자들을 지적하는 율법학자들 앞에서 제자들을 나무라기보다는 오히려 율법학자들을 나무라셨습니다.(마르7,1-8)
오늘 복음에서도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을 보고 “당신들은 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입니까?”(루가6,2)하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지적하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야단치시기보다는 오히려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야단치시지요. 그리고 안식일에 대한 논쟁이 시작됩니다.
이 안식일 논쟁은 예수님의 공생활 내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대결하게 되고 결국 죽음에까지 이를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문제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생각하는 안식일, 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안식일이 어떻게 다르길래 이렇게 극단적인 대립과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오늘 복음을 통해서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주님의 날"인 주일은 안식일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쉬는 날"과는 그 개념 자체가 다릅니다. 이 날은 오롯이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하느님의 날이었지요. 성서에도 안식일의 깊은 의미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6일 동안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7일 째 되는 날 다른 날과 달리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이렛날에는 쉬시고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창세 2,2-3)
안식일의 첫 번째 의미는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이지요. 또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을 받을 때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에 대한 명확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 와 너희 아들 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집 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야훼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께서 안식일을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출애 20,10-11)”
이렇게 안식일은 창조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날이요, 노예살이에서의 해방을 기념하는 민족사적인 축제의 날이자 하느님의 날이었습니다. 감사와 찬미, 또 시나이산의 계약을 기억하는 축제일로 지내오던 안식일을 보다 잘 지키기 위하여 서서히 법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지요. 물론 처음에는 안식일을 제대로 잘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규칙들이었지요. 그런데 이 법규가 점차 세분화되고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만들어지면서 서서히 사람들을 제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규칙을 만들어낸 사람들, 즉 율법학자들의 의견이 절대적인 세상이 되었지요. 또 그 법을 실행했던 사람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세분화된 율법과 그 율법을 만들어내고 실행했던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하느님 못지 않은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힘을 얻은 사람들은 율법 본연의 정신보다는 법규의 복종만을 요구했습니다. 마음대로 사람들을 제약하고 자신들의 뜻을 합리화시키는 방법으로 안식일의 법이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러한 부조리를 너무나도 잘 아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안식일법을 강하게 질타하시고 꾸짖으시며 바로 잡기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성서에는 안식일법에 얽힌 예수님과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대립이 여러 군데 묘사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안식일에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 수가 있습니다. 갈릴래아의 한 마을 가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가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는데(루가 4,31-37) 마침 그 날이 안식일이었지요.
안식일에 관한 두 번째 장면은 바로 오늘 복음 말씀으로 마르코 복음 2장 28절, 마태오 복음 1장 8절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먹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항의를 합니다. 안식일법을 어기는 예수님의 행위가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고 이제는 예수님께 사람들이 항의를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대립은 점차 극으로 달려가지요.
세 번째,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팔이 오그라진 사람을 고쳐주시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노려보기 시작합니다.(마태12,9-14) 소문대로 안식일법을 무시하고 있는 예수님을 목격한 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것을 모의합니다.
네 번째는 십 팔 년 동안이나 허리가 굽었던 여인을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치유하신 장면입니다.(루가13,10-17) 지켜본 회당장이 트집을 잡자 예수님께서 꾸짖으시지요.
다섯 번째 안식일 논쟁은 역시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수종병자를 고쳐주신 것에 기인합니다.(루가14,1-6)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일이 법에 어긋나느냐? 어긋나지 않느냐?”(루가 14,3)고 못마땅하게 지켜보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물으셨으나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안식일법에 대한 다툼은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극한 대립으로 결말이 나고 말지요.
“그 무렵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가야파라는 대사제 관저에 모여 흉계를 꾸며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마태26,3-4)
자기들이 만든 규칙과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서는 율법을 변용하기도 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남들한테는 혹독하게 법들을 적용하였고 그 결과 사람을 살리는 법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법으로 안식일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에 비해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법을 무엇보다도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살리는 법으로 해석하셨습니다. 법이나 규칙을 정할 때 사람을 살리려는 법이 있고 사람을 죽이려는 법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교육시키며 지키라고 내세우는 법은 어떻습니까?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것저것을 규제하지요. 자녀를 죽이기 위해서 규칙들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수가 상대방에게 들이미는 법은 살리는 법이 아니라 죽이기 위한 법입니다. 똑같은 법도 어떤 마음을 갖고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을 억누르고 따돌리는 모든 법은 하느님의 뜻에 위배되는 법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끔 이것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법은 사람을 살리고 사랑하는 방향으로 적용되어야지 죽이는 법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잘못의 지적도 법의 적용도 근본적으로 사랑을 담고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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