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땅을 탓하지 말자.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은 공관복음 모두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이다.(마르 4,1-20; 마태 13,1-23) 루가는 마르코의 전승을 그대로 베끼면서 약간의 수정을 가하였다. 마르코는 등불의 비유, 자라나는 씨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와 함께 씨 뿌리는 비유를 맨 앞에 놓았고, 마태오는 7개의 비유들(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보물의 비유, 진주의 비유, 그물의 비유)을 모아 놓은 비유설교집(13장)에서 첫 번째 비유로 다루고 있다.
서로 약간의 차이는 보이고 있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거의 같다. 특이한 점을 지적한다면,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에서는 비유의 해설이 예수의 제자단에게만 따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마르코는 예수께서 혼자 계실 때 제자들이 다가와 비유의 뜻을 물었다(마르 4,10)고 하며, 마태오는 제자들이 예수께 가까이 오자(13,10) 그들에게만 비유의 뜻을 밝혀주신 것(13,18)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행하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말씀 자체나 그에 대한 해설은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다. 물론 씨를 잘 갈아엎은 밭에 뿌리지 않고 아무 데나 뿌리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스라엘의 척박한 땅을 감안한다면 오늘 비유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
① 우선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은 곧바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에 밟히거나 새의 밥이 되고 말았다.
② 바위에 떨어진 씨앗이 싹을 피웠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지만 습기가 없어 말라 죽어버렸다. 그래서 마르코와 마태오는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고 했다.
③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은 왕성한 덤불에 숨이 막혀 죽어버렸다.
④ 마침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잘 자라서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 마르코와 마태오는 그 열매를 30배, 60배, 100배로 기록함으로써 토양(土壤)의 질(質)을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오늘 비유는 그 자체로 이해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파종(播種)의 방법이나 그에 따른 수확을 가르치려 하신 것은 아니다. 비유란 원래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므로 예수께서 ‘무엇을’ 파종에 빗대어 말씀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선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씨앗이 떨어지는 곳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
① 길바닥은 그야말로 가능성 제로의 상태를 말하며, 길바닥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은 충분히 세속적인 환경을 말한다. 하늘의 새는 그 말씀을 빼앗아 가는 악마를 뜻한다. 그래서 여기에는 믿음도 구원도 없다.
② 바위는 수분이 없어 씨앗을 감싸 않을 수 없는 마음이다. 말씀에 대한 반응은 있으나 세상의 시련과 고통이 닥치면 뿌리가 없어 믿음도 사라진다.
③ 가시덤불은 말씀을 받아들이기 전에 이미 세속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힌 마음이다. 말씀을 수용하여 믿음의 생활을 하지만 그 마음은 늘 세상의 온갖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더 가까이 있음을 뜻한다. 이것들에 눌려 믿음의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것이다.
④ 좋은 땅은 바르고 착한 마음을 뜻한다. 이 마음은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믿음의 뿌리와 생활의 줄기를 뻗어 꾸준히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나무에게는 슬픈 운명이 있다. 씨앗이 뿌려진 그곳에 싫든 좋든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한번 뿌리를 내리면 자신의 힘으로 옮겨 다닐 수 없는 슬픈 운명이다. 심겨진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햇빛과 비바람을 맞으며 더워도 추워도 옷 한 벌 벗고 입지 못하는 그런 슬픈 운명이다. 그러나 진작 나무는 자신의 그런 운명을 슬퍼하지도 나무라지도 트집 잡지도 않는다.
자연이라는 큰 섭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저 슬프다고 생각하는 쪽은 우리 인간이다. 우리 인간은 자신을 늘 남과 비교하기 때문에, 남의 것이 더 크고 좋게 보이면 기뻐하고 격려하기보다는 슬프고 실망하며 포기한다. 그래서 불행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의 마음은 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토양과도 같다. 그러나 그 마음을 지닌 사람은 자유로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닐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의 토양을 더 좋게 만들 수도 있고, 더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 사람이 나무에게서 배울 점은 많지만, 분명한 것은 나무와 사람은 다르며, 나무보다는 사람이 더 낫다는 것이다. 길바닥이나, 바위나, 가시덤불과 같은 자신의 딱한 처지와 환경을 나무는 불평해도 바꿀 수 없으나, 사람은 바꾸어 개선(改善)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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