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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 야곱 신부의 편지 2 " / 류해옥 신부님



"야곱 신부의 편지 2"/ 글 류해욱 요셉 신부님 예수회

 

 

      야곱 신부님은 자기에게 더 이상 마음의 짐을 나누는 편지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점점 생기를 잃게 되고 노쇠해집니다. 편지가 없느냐고 묻는 야곱 물음에 레일라가 없다고 무뚝뚝하게 말할 때 신부님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만듭니다.

      야곱 신부님에게는 편지가 당신의 존재 이유였는데, 이제 그것이 없으니까 다른 환상을 보게 됩니다. 혼배가 있다고 레일라에게 성당에 가자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올 것이라고 하며, 신부는 시간에 늦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들떠서 서둘러 성당으로 가지만 거기 아무도 없습니다.

      혼배는 자기에게 익숙한 일이라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부부의 연을 맺어 주었고,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독백하지만 모든 일은 다만 환상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없다고 하자, 아마 세례식일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 혼배도 세례식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촉촉이 비가 내리고 적막만이 흐르는 성당에서 야곱 신부님은 혼자 미사를 드리고 그리고 제대 앞에 쓰러지듯 눕습니다. 그 머리 가까이 천장을 새어 들어온 빗방울이 정적을 깨웁니다. 이제 더 이상 어느 누구도 신부님께 마음의 짐을 나누지도, 신부 본연의 일인 혼배나 세례식도 청하지 않습니다. 늙고 병들고, 눈이 보이지 않아 이제 아무 쓸모없는 자신의 모습을 괴로워하며 성당 제대 앞에 가만히 누워 있는 야곱 신부님의 모습은 훗날 제 모습과 겹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야곱 신부님은 집으로 데려달라고 청하지만 그런 모습을 본 레일라는 성당에 신부님을 혼자 남겨놓고 사제관으로 와서 짐을 싸고 택시를 부릅니다. 레일라의 그런 모습은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 신부님의 모습에서 레일라는 자신의 모습, 자신의 처지를 보았고, 그것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택시 기사의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에 아무 대답을 못하던 레일라는 결국 택시에서 내리고 다시 사제관에 머물게 됩니다. 신부님의 환상을 보는 약하고 초췌한 모습은 레일라를 무척 혼란스럽고 당황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레일라는 떠나려고 하지만 오히려 자기의 처지를 보게 되는 레일라에게 신부님께 마음의 문을 열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제 그녀에게 하나의 삶의 의미가 주어진 것입니다. 바로 야곱 신부님께 다시 삶의 의미, 그의 존재 이유를 찾아주자는 것입니다.

      이미 언급한대로 우편배달부는 자신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적개심으로 그를 멀리 쫓아 보냈습니다. 그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거부하고 그 시선에 위축될 수 밖에 없었던 그녀였습니다. 그래서 자살까지 시도하지만 그녀는 이제 삶의 의미를 찾았고, 그것을 위해 우편배달부를 직접 찾아갑니다. 그리고 이제 야곱 신부에게 편지를 배달하라고 부탁합니다. 한 때, 야곱 신부님께 오는 편지들을 읽어주고 답장을 쓰는 일이 귀찮아서 우물에 슬쩍 버리기도 했던 그녀는 신부님에게 삶의 의미를 되찾아주기 위해 편지를 찾게 됩니다.

      그런데 우편배달부는 더 이상 신부님께 편지가 오지 않는 거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옛날처럼 “야곱 신부님, 편지 왔어요.”라고 소리를 지르며 오라고 부탁합니다. 우편배달부는 레일라의 말대로 아주 오랜 만에 멀리서부터 소리칩니다. 그런데 우편배달부의 소리치는 외침에 늘 창문을 열고 바라보던 신부님은 이제는 정말 못 들었는지 별 반응이 없습니다.

      레일라의 청을 들은 우편배달부가 가지고 온 것은 다만 잡지였습니다. 그런데 레일라는 다시 편지가 왔다고, 그래서 자기가 읽어드리겠다고 하고 신부님을 모시고 전에 하던 대로 숲속 정원 의자에 앉습니다,

      전에는 늘 깔끔하게 로만칼라를 갖춰 입고 마치 중요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을 은연 중 자부심으로 차 있던 신부님은 이제 후줄근한 내복 차림에 맨발로 의자에 앉습니다. 어떤 권위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맨발로 나온 것이 정말 편지가 반가워서 맨발로 달려 나온 것인지, 다만 모든 것을 내려놓아서 이제 온전히 자유로워진 것인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그 모습이 저에게 훨씬 더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레일라는 이제 신부님을 위해 마치 진짜 편지가 온 것처럼 연기를 합니다. 잡지의 한 쪽을 뜯어 마치 편지봉투를 개봉하는 것처럼 찢는 소리까지 냅니다. 레일라는 아주 소박한 거짓말을 짓습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이 자기네 집 개가 없어졌다고 하소하는 거짓말이지요. 주소가 있느냐고 묻는 신부님의 물음에 주소는 없다고 답합니다. 시쿤둥 일어나려는 신부님에게 레일라는 하나 더 있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신부님은 묵묵히 그 이야기를 다 듣습니다.

      레일라의 이야기를 들은 신부님은 그것이 레일라 스텐에게서 온 편지냐고 묻습니다. 레일라가 그렇다고 하며 자기가 용서 받을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야곱 신부님은 대답 대신 보여 줄 것이 있다고 안으로 들어가서 여러 개의 편지 봉투 묶음을 가져와서 그녀에게 내놓습니다. 겉봉투에 이름과 주소가 분명하게 씌여 있습니다. 리사 스텐. 그녀는 동생이 무기수로 복역을 하고 있으며 자기는 동생을 사랑하는데 자기 편지를 거부하고 모두 돌려보내니, 너무 안타깝고 신부님에게 기도를 부탁한다는 내용입니다.

      레일라는 그 편지들을 읽으며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덩치 큰 그녀,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꼭꼭 걸어두었던 그녀에게도 마르지 않는 눈물의 샘이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 신부님이 레일라에게 그 편지를 천천히 다 읽고 들어오라고 합니다. 자기가 안에서 차를 준비하고 있겠다고 말합니다. 차가 아닌 커피까지 준비하겠다고 하며 안으로 들어갑니다. 진흙 속의 맨발이 어떤 상징처럼 느껴집니다.

      레일라는 그 편지를 다 읽고 그 편지 묶음을 가슴에 품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사제관 안에는 너무나 평온하게 느껴지는 정적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바닥에 떨어뜨린 찻잔 조각 너머 신부님의 쓰러진, 아니 하느님 품에 안긴 시신이 시야에 들어올 때, 차라리 슬픔이 아닌 자유가 느껴졌습니다. 김광석의 노래, ‘부치지 않은 편지’의 가사가 떠올랐습니다.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 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오래 전에 제가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찢어지는 가슴을 안아 진정시킬 수 있다면’라는 제목으로 옮긴 적이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의 찢어지는 가슴을 안아 진정시킬 수 있다면 나 정녕 헛되이 산 것이 아니어라 나 한 사람의 욱신거리는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다면 삶의 고통을 달래 줄 수 있다면 한 마리의 가냘픈 울새를 도와 그의 둥지에 다시 올려놓아 줄 수 있다면 나 정녕 헛되이 산 것이 아니어라.”

      야곱 신부님도 레일라도 정녕 헛되이 산 것이 아닙니다. 야곱 신부님은 숨을 멈추는 마지막 순간까지 한 사람의 찢어지는 가슴을 달래주면서 하느님께로 돌아가셨고, 레일라는 자기가 용서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 사랑 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도 언니의 찢어지는 가슴을 안아 주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녀에게는 갈 곳이 생겼습니다. 바로 고이 가슴에 안아 든 편지 봉투에 써져 있는 들고 언니네 집주소입니다.

      올해 예수회 안에서 가장 큰 화두는 ‘소통’입니다. 회원 서로 간의 소통, 그리고 다른 협력자들과의 소통이 예수회 안의 모임에서 거론되는 주요 주제입니다. 영화 ‘야곱 신부의 편지’의 주제도 ‘소통’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편지는 분명 아날로그 세대의 소통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가장 진실한 마음을 엿보게 하는, 느리지만 가장 깊은 차원의 소통이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가 떠나고 이제 레일라도 다시 가방을 들고 나옵니다. 처음 사제관을 찾아올 때의 무표정한 굳은 얼굴이 아닙니다. 마음의 짐을 덜어버린 편안한 얼굴이고, 손에는 자기가 찾아갈 주소가 적힌 편지봉투가 들려 있습니다. 언니의 편지를 통해 자기가 언니의 삶을 망친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 아니며 오히려 언니에게 위로와 힘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이제 언니의 품으로 가서 안길 것입니다.

      그녀가 언니를 찾아가겠지만 그녀의 가슴에는 언제나 야곱 신부님이 함께 머물 것입니다. 처음에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던 야곱 신부님의 편지를 듣고 답장을 해 주던 그 일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에게 진정 구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제는 언니와 함께 새 삶, 위로와 희망을 지닌 삶을 살 것입니다.

      ‘야곱 신부의 편지’는 영화 ‘신과 인간’ 이후 다시 한 번 신부로서의 저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불과 70 여 분의 짧은 영화이지만 아주 긴 여운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꼬집어서 표현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리뷰를 쓰는 것이 참 쉽지 않았습니다. 레일라가 편지를 읽어주는 내용 말고는 대사도 별로 많지 않아, 내용을 기억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는데, 여운으로 남긴 처리의 숨은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깊은 숙고를 통해 조금씩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림이나 사진이 여백을 통해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듯 이 영화는 여백이 압권이었습니다. 나뭇가지 흔들리는 모습의 여백이나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의 여백 등이 아름다운 수채화처럼 느껴지게 하였고, 때로 저 멀리 계곡의 물소리처럼 흐르는 음악은 처음 가 본 곳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모순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