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밑지러 오신 예수님을 닮아야지요 † ◐
- 인간의 인간다움이란 지혜와 아름다움과 선이라는 매듭으로 문명을 엮어가는 일인 것입니다. 문명이란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서” 봉사하는 것을 뜻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런데 ‘자살문명’이라니요? ‘죽음의 문화’라니요? 듣는 것만으로도 섬찟한 것이 현 시대를 주도하는 문명이고 문화랍니다. 소비주의, 쾌락주의, 그릇된 ‘밤 문화’와 황금만능주의는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사람들을 양산하여 이제 ‘인간 지옥’ 이라는 표현까지 생소하지 않습니다.
금수만도 못한 인간이 주는 절망감으로 희망은 빛을 잃고 대혼돈을 예상케 하며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는 극단적인 진단을 하기도 합니다. 이 표현대로라면 “보시니 좋더라”고 하신 하느님의 체면이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은총이 헛되지 않는 세상을 위해서,세상을 보시는 하느님의 기쁨을 위해서 ‘죽음의 문화’를 거슬러 ‘생명의 문화’를 피워낼 수 있는 방법을 윤리는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신생아 수는 사망자 수의 1/3밖에 되지 않는답니다.
산부인과나 소아과에서는 할 일이 줄어들고 장례식장은 꾸준히 늘어나 호황이랍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20-30대 사망자 가운데 자살의 비중이 가장 크다는 사실입니다. 하루 평균 3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는 통계와 OECD 회원국에서 자살률 1위를 차지한 우리 사회는 이미 ‘자살 무감각증’에 걸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살이 많다는 것은 사회 자체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뚜렷한 증거입니다.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 교회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걸쳐인간 생명의 가치가 최우선에 두어지는 일을 펼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생명의 문화를 위한 적극적인 자세가 갖추어져 있는지, 폭넓게 다루고 있는지 반성도 해야 합니다. 혼탁한 세상에게 살아계신 하느님의 넘쳐나는 생명력을 부어 주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에 ‘살아 있는 문화’의 정착을 위하여 여태까지의 가르침과 배움을 뒤엎을 필요가 있습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최고”이며 “남을 이기는 것이 승리”라는가르침을 부수고 “언제나 밑지고 진” 예수님을 이 세상이 바라보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오늘은 생명의 날입니다. 또 그리스도 성체성혈 대축일이기도 합니다. 예언서와 지혜서의 전통은 먹고 마시는 일을 하느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의 필요성에 은유하고 있습니다.그럼에도 인류역사에서 빵은 일치의 상징이 아니라 분열의 도구였습니다. 부른 내 배를 더 채우기 위해 남의 빵을 탐내었습니다. 전쟁은 어떠한 명분과 미사어구로 포장되어진다 하더라도 약탈이며 침략이고 사라져야 할 비극입니다.
이렇게 갈라진 세상에 우리 예수님은 일치의 빵이 되어 오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친교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체는 “사랑과 일치의 성사”이며 우리의 육신을 부활케 하는 요인인 것입니다.우리 신앙인이 예수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고 살아가면서 이웃의 생명을 무시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외로이“홀로 가서 기도하실”(요한 6,15)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기쁘심을 위해서 오늘도 예수님은 함께 할 일꾼을 찾으십니다.성체를 모신 우리가 곧 예수님임을 모르십니까?
예수님은 밑지고 지는 일만 하시는 분이신 걸 모르십니까? 그래서 승리하신 분이신 것을 정말 모르십니까? 우리의 갈 바는 그분의 길이고 우리의 할 바는 그분의 닮아짐인 것을 모르십니까? 내가 먼저 나누는 것으로, 나를 선물로 내어주는 것만으로 고단한 예수님께 힘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우리는 예수님께 평안을 선물할 수 있는 귀한 믿음의 사람인 것을 아는 것이 진정한 윤리인입니다. 생명의 문화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오늘 우리 예수님은 함께 할 나를 부르십니다. “너희에게는 승리의 태양이 비쳐와 너희의 병을 고쳐주리라”(말라 3,21).
미국 버지니아 주 로아노크 가톨릭고교생인 앤드류 질레스파이 골수암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머리를 깎았습니다. 이에 학교 동료 20여명이 그에게 용기를 주려고 함께 삭발했습니다. 친구를 중심으로 둥글 둥글 삭발하고 모여있는 사진을 보면서 함께하는 자리에서 풍기는 생명의 향기를 느꼈습니다. 너와 나를 구별하지 않는 그 일치의 여유는 죽음의 그늘에 생명의 광선이나옴을 느꼈습니다. 암울한 소식 가운데도 기쁜 소식도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윤리는 힘을 냅니다.
-부산 가톨릭 대학교 장재봉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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