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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데레사 말씀안에서

~ 하느님의 두 번째 부르심 / 마더데레사 ~



하느님의 두 번째 부르심


전쟁이 절정에 달한 무렵인 1943년 벵골 지방에는 엄청난 재난이 들이닥쳤다.

2천명의 사람들이 이상 한파로 인해 황량한 들판에서 굶어 죽은 것이다.

그 희생자들과 캘커타의 거리에서 매일같이 죽어 가던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마다

데레사 수녀는 몹시 괴로웠다.


불과 몇 미터, 몇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수많은 형제들이 철저하게 버림받아

죽어 가는 동안에도 자신은 계속해서 소수 특권층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수박 겉 핥기식의 교육에 치중하지 않고 학생들이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의

심각한 문제를 느낄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지만, 이 비극적 상황에서는

그 이상의 뭔가가 더 필요하고 개인적으로 투신하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여겨졌다.


어느 날 데레사는 이러한 자신의 바람이 어쩌면 하느님의 두 번째 부르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수도원 장상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였고,

뒤이어 캘커타의 대주교 페리에 몬시뇰을 만났다.

그리고 수도회를 떠나서 가난한 이들 가운데 들어가 살아갈 계획을 털어 놓았다.


돌아온 것은 완고한 거절이었다.

그렇다고 화를 내거나 흥분하지 않았다.

늘 하던 대로 '고등학교'에서 가르치기를 계속하였다.

진실로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을 부르신 것이라면 길을 열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페리에 몬시뇰은 완고하게 거절한 뒤에도 데레사 수녀의 편지를 없애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편지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어쩌다 한 번씩 생각에 잠겼다.


"이 수녀는 수도생활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비참하게 죽어 가는 사람들 속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살기를 요청하고 있는거야.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에서 성 코톨렌고에 이르는 저 위대한 성인들이 

 교회 안에서 이미 걸었던 그 길을 따르고자 하는 거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야,"


생각 끝에 페리에 몬시뇰은 이 문제를 교황께 문의하는 것이 낫겠다고 결론지었다.

그분이라면 결정을 내려주실 것이라 기대하면서.


1948년 8월 18일, 로마에서 보내온 대답이 도착하였다.

교황 비오 12세의 찬성이었다. 데레사 수녀는 수도회에서 나와 대주교의 책임과

지도 아래 가난한 이들 가운데에서 살게 되었다.


데레사는 검은 수녀복을 벗고 여느 가난한 인도 여자들처럼 하얀 사리를 입었다.

맨발에 샌들을, 호주머니에는 몇 푼의 루피를, 심장에는 커다란 신앙을 채워넣고

캘커타의 중심가를 벗어나 광대한 변두리 지역의 판자촌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