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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영성이야기

~ 최고의 영적 삶은 고행 금육 참회의 삶 / 빙겐의 힐데가드 ~



최고의 영적 삶은 고행·금욕·참회의 삶 - 빙겐의 힐데가드 

 

뛰어난 영적능력 여성 몸으로 성인 칭호


환영 통해 계시받은 신의 뜻 주위에 전달
설교에 밝아 기독교 수사학 발전에 기여 힐데가드는 3살때부터 환영을 보기 시작했다. 그 환영을 살아있는 빛의 그림자라고 했다. 지금부터 ‘인류의 위대한 스승’ 중 여자 분 몇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처음으로 등장하는 여성 스승은 빙겐의 힐데가드(Hildegard of Bingen, 독어 Hildegard von Bingen, 라틴어 Hilegardis Bingensis)이다. ‘라인의 씨빌(Sybil of the Rhine)’이라고도 하는데, 이 글에서는 ‘힐데가드’라 칭하기로 한다.

힐데가르는 1098년 경 독일 베르메르스하임(Bermersheim)이라는 조그마한 동네에서 귀족 가문의 10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생일은 불분명하다. 태어날 때부터 병약하였는데, 그 때문인지 세 살 때 벌써 환영을 보기 시작하고, 그 때 본 환영을 ‘살아있는 빛의 그림자’라 했다. 다섯 살부터는 자기가 본 환영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남녀는 서로 보완적 관계


이런 특별한 사정 때문인지 아니면 힐데가드가 열 번째 태어났다고 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힐데가드의 부모는 힐데가드를 ‘십일조’로 생각하고 교회에 바쳤다. 힐데가드는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모시던 백작의 딸 유타(Jutta)와 함께 생활하다가, 열네 살 때는 유타와 함께 몇 아이들을 데리고 일종의 암자 같은 곳에 들어가 종교 생활에 전념했다.

이곳이 커져서 그 주위에 있던 남자 수도원의 감독을 받는 베네딕토 수도원이 되었는데 힐데가드는 베네딕토 수녀로 종신 서원을 했다. 수도원에서는 성가 대원으로 노래도 부르고, 약초원이나 진료소에서 일을 거들었으리라 생각된다. 1136년 유타가 죽자 힐데가드는 38세의 나이로 동료 수녀들에 의해 ‘여자 스승(magistra)’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여자 수도사들의 수가 10명 정도였는데, 그 후 20명으로 늘었다.

힐데가드는 어려서부터 계속적으로 환영을 보았지만, 자기가 본 환영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꺼려해서 자기와 절친한 친구에게만 말했다. 그러나 그 친구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전해 수도원장까지 알게 되었다. 1141년 42세부터는 본격적으로 많은 환영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환영 중 하느님으로부터 ‘보고 들은 것을 적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병에 걸리게 되었다. 할 수 없이 하느님의 명을 받들고 자기가 받은 환영들을 적기 시작하자 병도 없어지고 더욱 큰 힘을 얻게 되었다.

그는 계속 하늘로부터 ‘그러므로 외치고 그대로 기록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자기는 스스로 생각해 내거나 남의 말을 옮기거나 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가 직접 듣고 받은 하느님의 은밀한 비밀만을 적었다고 했다. 이렇게 거의 10년에 걸쳐 적어 놓은 것이 『길을 알라(Scivias)』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자기가 본 환영 중에서 26개를 자세히 적은 글이었다.
이 책을 쓰고 있을 때 다른 수녀들과 함께 자기가 속해 있던 남자 수도원을 떠나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수녀원을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수도원 원장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추기경의 도움으로 1151년 성 루퍼트 수녀원을 창설할 수 있었다. 이 수녀원은 나중 50명의 수녀원으로 확장되었다.

힐데가드는 환영을 볼 때 자기에게 나타나는 육체적 변화를 자세히 기록해 두었는데, 어느 정신과 의사는 그런 표현들을 미루어 볼 때 그의 환영이란 것이 결국 일종의 편두통 현상이 아닌가 진단하기도 했다. 특히 빛을 보게 된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힐데가드에게 망막상(網膜上)의 암점(暗點)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라 진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의 여러 지도자들이 그의 글을 좋아했고 그것을 교황 유제니우스 4세에게도 보여 주어 그는 1147~1148년에 있었던 공회의에서 힐데가드의 환영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라 공인해주었다.

자연은 신이 주신 치료제


힐데가드는 많은 노래도 작곡했는데 그 중에 70개 이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중세 작곡가 중에서 가장 많은 수의 노래를 남긴 셈이다. 그 외에도 힐데가드는 100통 이상의 편지와 70종 이상의 시와 9권의 책을 남겼다. 9권의 책 중 3권은 그가 본 환영에 관계 되는 것들이다. 그 중에 그가 75세경에 쓴 책은 자기의 환영을 성경으로 주석해 놓은 것이다.

힐데가드가 쓴 책 중에는 『물리(Physica)』라는 자연과학 분야의 책과 병의 『원인과 치료(Causae et Curae)』라는 책도 있었다. 우주와 동물과 식물, 돌과 광물 등 자기 주면에서 발견되는 자연 현상을 주의 깊이 관찰한 기록이다. 특히 약초, 보석, 향이나 색채를 통해 병을 낫게 하는 치료법에 관한 그의 관심은 흥미롭다. 신의 모든 창조물은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기본 전제를 가지고 이들 창조물이 가지고 있는 치유 능력을 인간의 건강을 위해 활용한다는 원칙에 기초한 것이다.

힐데가드는 여기저기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영적 삶은 처녀성을 지키는 삶이라고 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의 기쁨을 말해주기도 한다. 동시에 정욕적 쾌락을 추구하는 일이나 동성애, 동성애 중에서도 특히 여성 동성애, 자위행위 등은 용납할 수 없는 죄라고 보았다. 이런 죄를 지었으면 고해를 하고 금식과 고행을 통해 참회하는 마음을 보여야 하느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인간이 이런 도착적 행위에서 벗어나 창조 본연의 아름다움을 가질 때 신의 형상을 나타내므로 신이 이렇게 변화된 인간의 얼굴을 보면 신은 무한히 기뻐할 것이라 역설했다. 인간은 이성을 부여받은 혀를 사용하여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선포하여야 한다고도 했다. 인간은 하느님의 완전한 작품이므로 남녀는 보완의 입장에서 서로 도우므로 그 완전성을 보존해야 한다고도 했다. 여자가 없으면 남자도 남자일 수가 없고, 남자가 없으면 여자도 여자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로는 함께 살아야 한다고 보았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힐데가드가 그 당시 교황이라든가 독일 황제들, 교회 지도자들, 수도원 지도자들, 귀족들과 서신 교환을 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서신들을 통해 힐데가드가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가 하는 점을 더욱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서신들을 보면 여러 사람들이 힐데가드에게 기도 부탁을 하고 여러 가지 일들을 놓고 구체적인 자문을 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네 번에 걸친 설교 여행을 위해 독일 전역을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힐데가드를 좋아하여 그의 수행비서가 된 사람도 있었고, 그의 영향으로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힐데가드처럼 신비주의자, 환영을 보는 여성들도 생겨났다.

힐데가드는 또 수사학(修辭學)에 능했다. 그 당시 여자가 설교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었다. 또 수사학은 남자의 영역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힐데가드는 그 당시 정규 교육에서 가르치는 수사학이나 변증법, 문법에 구애받지 않고 여성 특유의 수사학적 재능을 발휘하여 설교나 서신이나 시나 노래 등을 통해 표현하므로 그 당시 수사학에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여자는 남자로부터 지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자 없이는 남자도 있을 수 없다.”하는 식으로 재치 있는 말을 많이 남기고, 자기가 세운 수도원에서는 오로지 귀족 출신만 받았는데, 이것은 다른 계급 출신이 들어올 경우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열등한 위치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하는 등 사물을 나름대로의 독특한 시각으로 보고 이를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최근에는 힐데가드가 여성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힐데가드는 자기를 ‘배우지 못한 여자’ ‘성경을 해석할 줄 모르는 여자’라고 자기 자신을 낮추는 말을 할 뿐 아니라 자기가 ‘더 약한 성(weaker sex)’에 속했다고 말하는 등 계속적으로 여성 전체를 비하하는 듯 한 언사를 쓰고 있다. 이런 사실이 여성학 전공자들에게는 못 마땅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가 절대적 남성 우위 시대였다는 점, 그리고 자기가 인간적으로는 아무 자격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므로 자기가 말하는 것이 직접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더욱 실감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 보기도 한다.

결국 여자로서 하느님의 권위에 힘입어 이야기할 수 있을 때 남자들보다 더 큰 권위와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셈이다. 또 교회나 영혼을 여성으로 보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표현했다고 하는 것 그런 낱말들이 라틴어로 여성 명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성성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힐데가드는 1179년 9월 17일, 고향 빙겐(Bingen am Rhein)에서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을 때 방에 있던 수녀들은 방에서 두 줄기의 빛이 방을 가로질러 흐르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일생동안 환영 중에 빛을 보았다는 여인에게 어울리는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래·시·편지 등 저작물 남아


힐데가드는 특히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크게 주목을 받고 있는데, 그의 가르침이 인간의 웰빙(well-being)을 위한 노력은 영성과 예술과 치유를 유기적으로 종합해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오늘날의 ‘통전적(holistic)’ 접근방식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힐데가드 의학’이라든가 ‘힐데가드 넷워크’ 같은 이름의 치료 센터들도 생겨났다. 필자가 가르치던 학교에서도 힐데가드를 주제로 기말 논문을 쓰는 학생들, 석사학위 논문을 쓰는 학생도 있었다.

힐데가드는 가톨릭 여인 중에는 처음으로 성인의 반열에 오르도록 하는 시성(諡聖) 과정을 밟게 되었지만 아직 정식으로 성인은 되지 못하고 시복(諡福)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17세기 말 가톨릭교 순교자 열전(列傳)에는 그 이름이 올라 9월 17일을 그의 축일로 지키고 있다. 가톨릭 뿐 아니라 성공회에서도 다른 성인들의 축일과 같은 방식으로 이날을 힐데가드의 축일로 지킨다.

정식 성인은 아니지만 요한 바오로 2세, 현 베네딕토 16세 같은 교황들도 힐데가드의 이름을 말할 때 통상 ‘성인’이라는 칭호를 붙여 ‘Saint Hildegard’라 부른다. 힐데가드의 유해와 유물은 그가 세운 수녀원이 있던 독일 아이빙겐의 힐데가드 교구 순례 교회에 안치되어 있다. 남성들의 독무대였던 시대에 남성 못지않은 도력과 영향력을 발휘한 한 여자 스승을 통해 우리 모두 무엇인가 느끼는 바가 크다.
,br>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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