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아침기도
9월 3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저녁기도
9월 3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후 끝기도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
540년경 로마에서 태어났다. 공직에 들어가 지사로 임명되었다. 수도원에 입회하여 부제품을 받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황 사절 직분을 수행했다. 590년 9월 3일 교황이 되어 모든 일을 운영하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아 주고 신앙을 전파하며 그것을 견고히 하는 데 참된 목자임을 보여 주었다. 신앙과 윤리에 관한 저서를 많이 남겼다. 604년 3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에제키엘서에 대한 강론'에서
(Lib. 1,11,4-6: CCL 142,170-172)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에 대해 말하는 데에 내 몸을 아끼지 않습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주님이 이 말씀에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견하시는 사람들을 파수꾼이라고 일컬으시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파수꾼은 접근해 오는 것을 먼 데서 보기 위해 늘 높은 곳에 서 있습니다. 백성의 파수꾼으로 세워지는 사람도 자기의 열심한 생활로써 높은 데에 서 있으면서 모든 것을 살피고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이 말은 나에게도 정말 마음을 찌르는 말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때 내 자신에게도 상처를 입힙니다. 내 입은 설교의 직분을 제대로 이행치 못하고 또 내 생활은 내 입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실행치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죄과를 부인하지 못하겠습니다. 내 게으름과 등한함을 시인합니다. 이렇게 내 죄과를 인정함이 자비로우신 판관 앞에 아마도 내 죄에 대한 용서의 청원이 될지 모릅니다. 수도원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 내 입에서 쓸데없는 한담을 막을 수 있었고 또 내 마음을 거의 계속적으로 기도의 정신 안에 몰두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어깨에 사목직이라는 짐을 메게 된 후부터는 내 마음을 잡아당기는 일들이 많아서 그것을 내 안에다 자주 집중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당과 수도원들에 대한 소송문제를 상의해야 하고 때로는 개개인의 생활 및 행위에 대해 생각해야 하며, 세속사에 관여할 때가 있는가 하면 야만인들의 침범을 우려하여 내 보호에 맡겨진 양 떼를 위협하는 늑대의 무리를 두려워할 때도 있습니다. 한편, 법의 통치를 유지시키는 이들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원조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하는가 하면 약탈자들의 횡포를 참아내고 온갖 사랑 안에서 그들을 만나 주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도 숱한 중대한 일들에 산산이 흩어져 갈갈이 찢어진 내 이 정신은 어떻게 내 안에 들어가 완전히 설교의 직분에다 바쳐져 그 직분에서 멀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 지위가 지니는 성격으로 인해 나는 자주 세상 사람들을 접촉해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내 입을 통제하는 일에 소홀해지기도 합니다. 내 직분에 따른 근엄한 외적 자세를 취한다면 약한 이들은 나를 피해 버리어 내가 그들에게 바라는 그 목표에로 그들을 결코 이끌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 나는 자주 그들의 잡담을 인내심 있게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 역시 약한 자이기 때문에 차차 그 잡담에 끌리어 예전에 듣기조차 싫어했던 그런 것들을 즐겁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한때 넘어지기 싫어했던 곳에서 편히 누워 있기를 좋아하는 셈이 됩니다.
열심한 생활이라는 산 위에 서 있지 않습니다. 아직도 내 약점이라는 골짜기에 누워 있는 비참한 이 내 몸은 어떤 종류의 파수꾼이란 말입니까? 그러나 인류의 창조주요 구속자이신 분께서, 내 비록 부당하다 해도, 거룩한 삶의 정상에 서 있을 은총과 내 입이 효과 있게 설교할 능력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나는 그분께 사랑 때문에 그분에 대해 말하는 데에 내 몸을 아끼지 않습니다.
교부들의 가르침 : 그레고리우스 대교황
사제와 주교들 영적쇄신 강조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장인산 신부
생애
라틴 4대 교부들 중 한 분이며 마지막 인물로 꼽히는 그레고리우스 대 교황(540~604)은 로마 원로원 가문 귀족 출신으로서 한때는 32세의 나이로 로마의 집정관이 될 만큼 이름을 날리던 세상 사람이었으나, 부친의 사망 후 관상생활에 전념하기 위하여 세상 명예를 버리고 그의 저택을 안드레아 성인에게 봉헌하며 수도원으로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시칠리아에 여섯 개의 수도원을 더 설립하고 자기 영지(領地)를 수도원들에 기부하였다. 그리고는 엄격한 수도생활을 하였다.
베네딕도 1세 교황은 그를 로마의 부제로 서품하였고, 그 다음 교황인 펠라지오 2세는 그를 콘스탄티노플에 교황사절로 파견하였다. 이 때에도 수도생활에 대한 그의 염원은 대단하여 로마에서 한 무리의 수도자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와서 교황사절 관저에서 수도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는 수도자들에게 직접 영적 훈화를 하고, 몇몇 주교들 또는 황실의 열심한 고위 인사들과 영적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 행한 영적 훈화와 영적 대화들을 토대로 하여 교황이 된 다음에 방대한 성서주석서인 「욥기 주해서」를 저술하였다. 뛰어난 외교력을 발휘하던 그레고리우스는 교황사절 임무를 마치고 585년 말에 로마에 돌아와 교황 펠라지오 2세의 비서와 조언자로 일하게 하였다.
펠라지오 2세 교황이 590년 페스트로 사망하자 군중과 성직자단과 로마 원로원은 합심하여 그레고리우스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전염병이 로마시를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교황으로 선출된 그레고리우스는 평소에 지니고 있던 영적생활에 대한 갈망과 과중한 책임에 대한 걱정 때문에 처음에는 교황직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였으나 황제는 그레고리우스의 교황 선출을 승인하였다.
사목자의 모범
여러 가지 면에서 난세(亂世)라 할 수 있는 시대에 교황직을 맡게 된 그레고리우스는 준비된 교황이었다. 어렸을 때 이미 일반 학문에 대한 철저한 교육을 받았고, 2년간의 로마 집정관으로서 행정가로서의 경험을 쌓았고, 6년간의 수도생활을 통해 수덕적으로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며 또 6년간 교황사절로 있는 동안 외교적인 경험을 쌓는 동시에 심도 있는 신학 연구를 통해 신학자로서의 자질을 갖추었으며, 5년간의 교황의 비서 내지 조언자로 있으면서 로마교회의 사정을 잘 알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경험과 자질들은 14년간의 교황직 동안 조화 있게 발전되고 성숙되어 교회 안에 놀라운 결실을 맺게 하였다. 그는 로마 교회의 풍부한 유산을 관리하고 교회를 이끌어나가는데 있어서 완벽한 모델을 세상에 보여 주었다.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무엇보다 먼저 사목자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어려움을 듣고 영적으로나 물적으로 도와주려 하였다. 교황직을 맡은 초기에 쓴 긴 회람식 서간들을 통해 여러 가지 개혁과 쇄신에 대한 계획을 제시하였는데, 무엇보다 교회의 사목자들인 사제와 주교들의 영적 쇄신을 강조하였다. 그는 교회의 소유지를 적절히 활용하여 수입을 올림으로써 랑고바르드족의 침입과 전쟁으로 인해 기아와 전염병에 시달리고 있는 주민들을 도와 곡식을 분배하였고,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대농장의 농부들을 착취로부터 보호하였다.
그레고리우스는, 라벤나의 대주교 마리니아누스에게 쓴 편지에서, 사목자는 기도와 성경독서에 전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맡은 양떼에게 구체적인 사랑과 도움을 주는 실천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레고리우스는 바쁜 활동 가운데서도 엄청난 양의 저서들을 남겼다. 교회 안에 전반적인 쇄신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중요한 세 가지 저서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윤리 강령이며 실천적인 해설서인 「욥기 주해서」, 성직자들의 생활을 개혁하고 사제생활과 사목생활에 관한 대 강령인 「사목 규정서」, 그리고 수도자들이 본받아야 할 여러 성인들 특히 성 베네딕도의 행적을 제시하는 「대화집」을 저술하였다.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타 민족의 선교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영국 선교의 계획을 세웠다. 브리타니아에는 이미 로마제국 시대에 교회조직이 되어 있었으나 로마군이 407년 브리타니아로부터 철수한 이후 여러 이교민족 특히 앵글로, 색슨족이 쳐들어와 그리스도교를 몰아내고 왕국들을 건설하였기 때문에 교회는 완전히 황폐화되어 있었다. 교황은 596년 봄에 로마의 성 안드레아 수도원의 원장인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40여명의 수도자들을 영국에 파견하였다. 그들의 선교활동은 대단한 결실을 거두었다.
그는 601년에 영국의 아우구스티누스와 멜리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교방법을 제시하는데, 문화적 우월주의로 야만민족에게 그리스도교를 그냥 주입시키는 식이 아니라 가능한 한 그리스도교와 그들의 기존 종교관습의 연결점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그리스도교의 정신과 내용으로 승화시키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민족의 문화를 존중하는 선교의 이러한 토착화 방식은 지역민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하였으며, 그리스도교화 된 이들 신흥민족이 앞으로 서구라파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게 되는 기틀이 된 것이다.
여기서 그레고리우스가 쓴 편지를 한 번 읽어보자: 『이교 신전을 꼭 허물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최소한으로 제한되어야 합니다. 신전 건물은 살린 채 단지 우상들만 치우고 난 후, 성수를 뿌리고 제대를 세우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다음 건물 안에 성인들의 유해를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전의 건축 상태가 양호하다면, 우상숭배 예식에 쓰였던 부적절한 외면만 제거한 후 건물 그대로를 유지하여 이제부터는 여기서 참된 하느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들의 예배 장소가 파괴되지 않은 것을 본 백성이 그들의 오류를 버리고 참된 하느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이렇게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들이 기쁨을 외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참된 내적 기쁨이 무엇인지도 더 쉽게 알아듣도록 이끌어 주는 셈이 될 것입니다. 거친 사람들을 단번에 교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무릇 산에 오를 때에는 단숨에 뛰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한발 한발 천천히 오르는 것입니다』(서간집 11, 56).
이외에도 그레고리우스 대 교황의 업적은 전례 개혁과 성가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데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가톨릭신문, 2004년 3월 21일]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24] 대 그레고리우스의 ‘편지’에서
“성서 읽기를 간절히 권유함”
본문
당신께서는 영적 능력, 부유함, 자비의 선물뿐만 아니라 거룩한 삼위일체로부터 사랑의 선물을 받으셨지만, 세상사로 말미암아 늘 바쁘고 여러 가지 많은 일에 끊임없이 참여하여 당신 구원자의 말씀을 날마다 읽는 데에 소홀하였습니다.
성서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피조물에게 보내신 편지가 아닙니까? 당신께서 만약 여행 중에 세속의 황제가 보낸 편지를 받으셨다면, 세속의 황제가 쓴 편지를 읽기 전에는 쉬지도 잠자지도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들과 천사들의 주님이신 하늘의 황제께서 여러분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당신께 편지를 보내셨다면, 매우 고명하신 당신께서는 그 편지를 열심히 읽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영원한 것을 더 열망하고 당신의 영혼이 하늘의 평화를 간절히 바라면서 불타오르도록 하느님의 말씀을 알기 위해 날마다 노력하십시오.
- 대 그레고리우스의 「황제 주치의 테오도루스에게 보낸 편지」
“연인의 편지라면 보고 또 봤을텐데”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성서를 모르는 것
해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그리스인들만 친구로 삼으십시오. 다른 야만인들은 짐승 다루듯 해야 합니다』라고 조언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야만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그리스어로는 「바르바로이」였다. 본디 야만인이라는 낱말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버벅거린다는 의성어였다. 이 낱말은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나온 전형적인 유물이다.
4~5세기의 교회도 제국의 경계 밖에 있는 야만인에게 그리스도교를 선교하려는 열의를 보이지 않은 것 같다. 대 그레고리우스 교황에 이르러서야 다른 민족에 대한 시야가 넓어진다. 그에게 야만족들은 제국의 적이지만 동시에 구원의 대상인 하느님의 자녀였다. 이 편지는 이러한 열린 시각을 지닌 대 그레고리우스가 쓴 857통의 편지 가운데 하나이다.
이제는 통신수단이 너무 발달하여 편지를 이-메일로 주고받다보니 편지에도 사람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다. 가끔, 아니 일 년에 한두 번 친필로 쓴 편지를 받으면, 그 내용이 평범한 이야기일지라도 읽고 또 읽곤 한다.
그런데 그 편지가 몇 년 간 떨어져 있던 어렸을 때의 친한 벗이나 매우 보고픈 연인에게서 왔다면 상황이 또 틀려진다. 편지를 안주머니에다 넣고 다니면서 보고프면 장소와 시간에 상관없이 읽어볼 것이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내셨다. 우리 마음에 회개와 참회의 정신을 되살려 주고, 죄의 용서를 받는데 도움이 되며, 당신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라는 내용이 담긴 매우 긴 편지이다. 그 편지를 받자마자 암기할 정도까지 읽고 또 읽지 않겠는가? 사실 많은 교부가 이렇게 성서를 읽어 성서 전체를 암기하였다.
성서를 읽고,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는 편지를 보낸 하느님께 답장을 써야 한다. 이 답장이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인 기도이다.
성서 해석의 대가인 오리게네스는 성서를 읽을 때 깨달음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할 것을 권고하였다. 성서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이자 은총이기 때문이다.
그는 제자 그레고리우스 타우마투르구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무엇보다도 성서를 신앙의 원칙과 하느님 마음에 들려는 의도로 읽도록 전력을 기울이시오. 성서를 이해하고자 하는 이에게 대부분 기도가 필요합니다』(오리게네스, 「그레고리우스에게 보낸 편지」 3).
교부들은 성서를 지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으며, 감추어진 지식을 얻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성서에서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성서 읽기의 궁극적 목적을 하느님과 만나는 사랑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성서에서 『하느님을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고 이웃을 하느님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라고(「그리스도교 교양」 1, 7, 10) 단언하듯이 성서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가 사랑이다. 따라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성서를 모르는 것이며, 성서를 모르는 것은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다.
성전의 중요성성서와 관련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성전의 중요성이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편지나 디도에게 보낸 편지의 저자가 바오로가 아니라는 사실은 학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독일의 저명한 학자는 이 편지들의 저자가 폴리카르푸스라는 가설을 폈다. 여기서는 저자가 누구냐를 밝히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경전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리는 같은 저자의 작품일 수도 있는 「폴리카르푸스의 편지」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 신자들의 성전에 대한 한 단면이 아닐까?
신자들이 성전의 맨 앞자리와 맨 밑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수많은 보고를 담고 있는 교부 문헌들을 너무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교회는 성전(聖殿)을 짓는 일뿐만 아니라 성전(聖傳)을 연구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가톨릭 교회를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이 성서와 성전이기 때문이다.
[하성수(한국교부학연구회, 가톨릭대학교), 가톨릭신문, 2005년 9월 11일]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4. 교황편 (3) 대 그레고리오
(그림설명)오르간 연주자인 다윗 왕과 작곡을 하는 그레고리오 교황(오른쪽).
‘하느님의 집정관’…교회쇄신 한몫만장일치로 교황에 선출…‘교황권의 창시자’
“신심깊은 영성가, 탁월한 행정가며 정치가” 평
영원한 도시 로마, 찬란한 문명을 이룩하고 서구 사회의 핵심적 도시였던 로마는 410년경 게르만 부족인 서 고트인들에 의해 약탈된다. 이후 서로마 제국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민족들이 수시로 서방을 침략했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들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등불의 역할은 교회에 맡겨졌다.
특히 빼어난 능력을 지닌 교황들이 등장해 교회와 세상 안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으며 그 중에서도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의 업적은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 있는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묘비에는 라틴어로 「Consul Dei」라고 적혀있다. 「하느님의 집정관」이라는 이 호칭은 그가 사회와 교회 안에서 수행한 이중적인 역할을 함축적으로 묘사한다.
교황으로서 그는 혼란한 시대가 요구하는 소명을 뛰어나게 완수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교회 역사에서 몇몇 인물에게만 부여되는 「대」(Magnus)라는 칭호를 얻었고, 암브로시오, 예로니모,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서방의 위대한 네 명의 교회 학자』로 칭송받았다.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540년경 로마에서, 펠릭스 3세(483~492)와 아가페토 1세(535~536) 등 두 명의 교황을 배출한 부유한 원로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귀족 계층의 고등 교육을 받았고 573년경에 로마 시장이 된 그는 575년 부친이 사망한 뒤 부모의 저택을 성 베네딕도 규율을 따르는 성 안드레아 수도원으로 만들어 수도생활을 시작했고 시칠리아에 있는 가족 소유의 토지에도 5개의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는 그러나 당시 교회가 자신의 능력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기에 더 이상 수도원에 머물지 못하고 교황으로부터 불리움을 받는다. 교황 베네딕도 1세(575~579)는 578년 그를 부제로 서품하고 이듬해 교황 펠라지오 2세는 그를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궁정에 교황사절로 파견하게 됐다. 그는 제국의 수도에 머물며 외교적, 정치적, 교회정치적 경험을 쌓아, 수많은 저명한 인물들과 평생 동안 관계를 맺었다.
586년경 로마로 돌아온 그는 교황 펠라지오 2세의 측근에서 교회 일을 하다가 590년 교황이 사망하자 수도자로서는 최초이며 유례없는 만장일치로 교황에 선출된다. 이때 그레고리오는 교황직을 맡기를 사양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여전히 수도생활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그는 교황이라는 무거운 직책이 자신의 영성생활에 장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신심이 깊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론보다는 실천적이었고 매우 좋지 못한 건강에도 불구하고 중세 교황권의 창시자로 불리울 만큼 활동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레고리오의 업적은 우선 로마와 「베드로의 세습령」에 대한 통치에서 나타난다. 교황청과 방대한 영역의 로마교회 소유지역에 대한 행정 업무를 재구성해 여기서 나오는 자산들을 난민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했다. 특별히 교황청의 부동산 재정비는 후일 교황령의 기초가 됐고 중세 때 교황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동로마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거의 문제가 없었지만 595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전(全) 교회의 총대주교」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해 심각한 긴장 관계에 있었고, 이에 대해 그는 오늘날까지 교황들이 사용하는 「종들의 종」이라는 소박한 칭호를 사용했다.
당시 롬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입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대부분의 이민족은 여전히 이교인이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이에 롬바르드족과 평화적인 합의를 이루려고 노력했고 동시에 그들을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시키려고 했다.
영국에 선교사들을 파견한 일은 가장 뛰어난 업적 중의 하나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후대에 쓰여진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는 어느날 시장에서 깨끗한 피부와 금발에 얼굴이 잘 생긴 소년들을 보았다. 그레고리오는 이들의 용모에 감탄한 나머지, 그들을 영국인(Angli)이 아니라 천사들(Angeli)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곧 개인적으로 영국에 선교사로 가려 했으나 주교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교황이 된 뒤 그는 비로소 596년 안드레아 수도원의 원장과 함께 40여명의 수도자들을 영국으로 파견했다.
많은 저서를 남긴 그레고리오 교황은 교회 쇄신에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으며, 전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성직자들의 생활을 개혁하기 위한 「사목지침서」(Liber Regulae Past oralis) 4권은 사목 직무를 받는 동기, 덕목, 가르치는 방법 등을 다뤄 실제로 주교와 사제들의 영성과 사목에 대한 기초적인 각론서가 됐다. 그 외에 수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욥의 윤리」나 모든 신자를 대상으로 하는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활과 기적에 관한 대화집」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그레고리오 교황은 전례와 관련해 우리들에게도 매우 잘 알려져 있다. 물론 그레고리오 성가 이전에 이미 교회의 미사전례와 수도원들의 성무일도에서 오늘날과 거의 같은 내용의 미사곡을 비롯한 전례성가들이 불리웠다. 하지만 지방마다 제각각이던 미사전례곡들과 성무일도에 사용되던 시편, 응송, 찬미가들을 전례력에 맞춰 다시 정리함으로써 그레고리오 성가집을 편찬했고, 그로써 교회의 전례음악이 그처럼 오랫 동안 교회 안에 살아있게 된 것이다.
신심 깊은 영성가이자 탁월한 행정가, 정치가였던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재위 14년은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오는 역사적 전환기에 교회의 중흥을 이룩한 위대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신문, 2004년 1월 18일, 박영호 기자]
[그리스도교 영성사] 교황 성 대 그레고리오 1세(1)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
2천년 교회 역사에 있어서 위대한 지도자 중의 한분이자 영성가인 교황 그레고리오 1세(540?~604)는 워낙 유명하여 대(大) 그레고리오라고 한다. 성인의 영성은 루가 10, 38~42에 나오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로 말 할 수도 있고 조금 더 발전시킨다면 활동과 관상생활의 종합이라고 할 수도 있다.
540년 경 로마의 유명한 빠뜨리치오 가문에서 출생하여(이 가문에서 펠릭스 3세와 아가삐또 교황이 배출되었음) 훌륭한 교육을 받고 부모의 권유로 공직생활을 시작하여 로마의 지사와 원로원 의장을 맡아 책임감을 비롯한 여러 가지 지식과 실무 경험을 쌓았다. 부친이 사망한 후 공직을 그만두고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사저를 수도원으로 개조하여 묵상과 연구에 몰두하였다. 특히 라틴 교부들의 문헌과 성서를 연구하고 수행생활에 힘썼다.
교회의 부름을 받고 부제품을 받은 후 교황사절의 임무를 띠고 콘스탄티노플에 파견되었다. 그리스 말은 몰랐으나 해박한 지식과 공직생활의 많은 경험이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동행한 수도자들과 함께 그 곳에서도 수도생활을 하였는데 동방교회의 수도자들의 요청에 의해 구약성서 욥기에 관한 강의를 하였다. 그 강연집을 모아 후에 윤리서를 저술하였다.
로마에 돌아와 교황의 고문으로 지내다가 교황의 서거 후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너무나 겸손한 그는 교황직을 거절하였으나 "괴로운 심정으로 영예의 짐을 떠맡았으며, 너무 슬퍼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그 영혼의 눈은 슬픔으로 어두워졌다"라고 그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이때 라벤나의 교구장 요한 대주교는 교황직을 수락하기를 꺼려한 그를 꾸중하였다. 그레고리오는 교황좌에 오른 후 자신의 입장을 밝힌 유명한 사목규범서를 책으로 엮어 그에게 답신 형식으로 보냈다. 이 책에서 그는 주교직과 교회 장상의 큰 책임과 그것의 부담스러운 성격에 대하여 논하였다. 이외에도 에제키엘서에 관한 설교, 복음서 해설, 대화록이 있다. 특히 대화록은 베드로 부제를 내세워 대화를 나누면서 교황 자신의 영성적이며 윤리적인 사상을 전하고 있고 성 베네딕도에 관한 지식을 제공하는 가장 훌륭하고 실제적인 근거가 되는 자료이다.
성인의 영성은 몇 가지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영성생활의 발전 단계에 관한 그의 가르침에 의하면, 제1단계는 악습을 끊으려고 노력하고 온갖 사욕편정을 억제하려는 영적 전쟁을 하는 단계이다. 이 훈련이 잘 된 영혼은 제2단계인 덕행의 성장기로 넘어간다. 여기에는 신망애 삼덕인 신학적인 덕행들도 필요하지만 윤리 덕행이 없으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하므로 이 덕행들을 성장 발전시켜 나가는 단계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덕행은 성령의 작용으로 완성에 이르게 된다. 성령의 은사를 강조한 그는 이를 통해 높은 영적 단계인 관상생활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루가 10, 38~42에 나오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관상생활을 우위에 두었다.
특히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관상(觀想)과 보이지 않는 사물에 대한 열정이 뛰어나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는 마치 사도 성 바오로가 하늘 3층까지 올라간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위대한 활동가였던 모세도 지성소에 들어가서 천상의 일을 관상하였다. 그러므로 활동에 종사하는 영혼의 목자들과 다른 이들도 깊은 내적 생활에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관상생활은 성령의 선물을 통해 완덕으로 이끌며 활동 안에서 열매맺는다.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5일]
[그리스도교 영성사] 교황 성 대 그레고리오 1세(2)
성인은 학문적으로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남긴 작품들은 거의 사목적이었다. 그는 교회 전례와 성 음악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고 동방 교회와 기타 여러 지역 교회와 관계를 정상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특히 아우구스띠노 수사를 중심으로 40명의 수사들을 영국에 파견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였고 섹슨족, 프랑크족, 롬바르드족 등 여러 민족들과 종족들의 문화와 기질의 차이들을 구분하지 않고 수용함으로써 다소 시간은 걸렸으나 가톨릭이란 이름에 걸맞는 포용정책을 펴나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로마 교회와 수도원 제도는 전통적인 문화의 빈곤을 느끼던 여러 민족에게 그리스도교 유산을 전해줄 수 있었고 교황의 가르침이 기도생활과 수도생활 그리고 그리스도교 수덕생활에 관한 지침서처럼 인정되었다. 그 당시 여러 민족을 수용한 유럽 교회는 대중적인 면에서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있었다. 이런 면에서 그는 교부시대에 속하지만 중세기 전체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신분이었다. 성직자, 수사, 수녀, 평신도는 각 신분에 맞는 신원을 보유했으며 각 신원에 고유한 영성이 발전하게 되었다. 평신도 중에서도 일반 신자와 보다 열심한 신자로 구분되었고 그들은 세례 받기 전에 신앙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 당시 일부 이교인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혼인의 불가해소성과 목적 그리고 성실성의 의무를 강조하는 혼인의 지식을 배우고 미신과 마술을 끊고 하느님의 길을 걷는 여러 가지 방법을 조금씩 배워 익혀나갔다.
한편 경건한 신자들은 과거의 생활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자발적으로 참회하고 수도원 주위에 머물면서 신앙생활을 심화시켜 나갔다. 그들은 평신도 특권층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신도들은 수도원의 기도시간에 참여하여 함께 기도하고 검소한 생활을 지향하였다. 그리하여 소박한 옷차림을 하였고 독신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많아졌으며 기혼자들도 혼인의 의무를 충실히 해나갔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후대에 생긴 제3회원이나 재속 수도회원들의 생활양식과 비슷한 삶을 살았다고 하겠다. 그들 중의 무식한 이들을 위하여 그리스도나 성모의 호칭기도나 주님의 기도 또는 성모송을 여러 번 바치는 기도서가 생겨났다.
그 시대는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대였다. 따라서 성직자들의 생활도 안정적이지 못하였는데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가르침에 의해 주교를 중심으로 하는 사제단이 강화되었고 성무일도 기도와 사목활동, 즉 전례거행, 성사 집전 및 설교 등을 위한 성당이 지정되어 사제들이 배치되었다. 이리하여 사제들의 영성생활이 강조되었다.
이 시대의 영성에 큰 기여를 한 베네딕도 수도회는 전체 교회에 수덕생활의 모범이었다. 그 이유는 많은 주교들이 수도자 출신들이어서 훌륭한 사제 생활과 성사 집전 그리고 설교 등으로 교회를 이끌어 나갔기 때문이다. 주교들은 엄격한 수도생활을 하던 수도자들에게는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봉사를 실천하도록 권고하였고 일반 신자들에게는 육체노동을 신성시하여 그리스도교 사랑과 수행생활의 표시가 된다고 강조하였으며 공적인 전례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종합적으로 보건대 교황 대 그레고리오는 자신의 영성에 바탕을 둔 발전적이고 풍요로운 기초를 놓은 위대한 영성가이자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였다.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12일]
교사들의 수호성인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그레고리오 성인은 성 아우구스티노, 성 암브로시오, 성 예로니모와 함께 서방교회의 중요한 4대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504년 로마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레고리오의 출중한 성덕은 우연이 아니니, 어머니 실비아는 성인 반열에 오른 분이고, 아버지 고르디아노 역시 신심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유스티노 황제의 신임을 받은 그레고리오는 서른 살에 로마 시 총독에 임명되어 5년간 공직에 있다가 베네딕도회의 수도자가 되어 상속받은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돕고 로마와 시칠리아에 7개의 수도회를 세웠다. “인간이 자신의 소유물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모르지만, 자신을 초월하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다. 사람이 가진 것을 단념하는 것은 사소한 일이다. 그러나 자신을 단념하는 일은 많은 것을 요구한다”(그레고리오 대교황, 복음에 관한 설교에서).
수도자가 된 그는 전심전력으로 덕을 닦고 회칙을 엄수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지나칠 정도로 금식재를 지켰다. 펠라지오 2세 교황의 뒤를 이어 수도자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교황(590년)에 추대되었다. 그레고리오는 위대한 로마의 주교요 정치가였으며, 위대한 설교가로 교황권을 확립하고 미사전례를 개혁하였으며, 그레고리오 성가의 편집자로 추앙을 받는다.
위대한 성덕으로 하느님을 섬기면서 늘 자신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으로 자처한 그는 정말 겸손한 사람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마음을 쏟은 교황은 날마다 열두 명의 가난한 사람을 식탁에 초대하여 대접하는 애정을 보여주었다.
그레고리오 성인의 성화에는 흰비둘기가 속삭이는 모양을 그려 넣는데, 이는 성 그레고리오 교황의 부제였던 베드로가 성인이 책을 쓸 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습으로 성인의 머리 위에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다고 한 데서 기인한다. 교황직의 아버지라 부르는 그레고리오 성인은 교사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604년 3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 축일은 9월 3일.
[경향잡지, 2007년 12월호]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영성
전달수(교황청립 로마한인신학원장/신부)
1. 시작하면서
금번 [사목]이 시대 상황과 관련한 가톨릭 영성의 흐름을 주제로 삼으면서 한 시대를 살아간 영성가가 자신의 삶을 통하여 그 사회에 어떤 변화와 영향을 주었는지를 다루려는 시도는 대단히 좋다고 본다. 이는 일찍부터 교회가 “교회는 언제나 쇄신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라고 주장하고 가르쳐 온 내용과 연관을 맺고 있다고 하겠다.
가톨릭 교회의 2천 년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영성가들을 접하게 된다. 필자는 평소에 그리스도교의 영성 역사를 연구하면서 수없이 많은 인물들을 대하게 되었는데, 어떤 때는 단지 과거사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하고 어떤 사건들은 나의 마음을 심하게 아프게 하기도 한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말처럼, 이번 호의 주제는 과거를 교훈 삼아 현재를 더 잘 살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전진하라는 유훈처럼 느껴진다.
여기 소개하는 성인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위대한 영성가이다. 그의 영성은 너무나 강렬하여 중세기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관점에 따라 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으나 필자는 그레고리오 1세를 교황 264명 가운데서 특히 그레고리오 7세, 요한 23세, 바오로 6세,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과 대등한 선상의 인물로 보고 싶다. 성인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워낙 위대하여 역사는 그를 대(大)그레고리오(Gregorius Magnus)라고 부른다.
2. 시대 상황
폰테 밀비오 전투에서 승리한 사령관 콘스탄티누스가 313년 밀라노에서 칙령을 발표하여 종교 자유를 선언함으로써 그리스도교에 대한 약 3백 년간의 긴 박해가 끝났다. 이리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교회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지하 무덤 카타콤바에서 태양이 빛나는 지상으로, 사막과 산에서 더 이상 숨어 살지 않고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교회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도 예배당을 세우고 성사 생활을 지도하며 전례를 제정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올바른 신앙으로 인도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국가와 교회가 서로 협력하기 시작하고 박해 이전 이교도들이 누리던 특권과 특전이 서서히 교회로 넘어오면서 교회 지도자들의 지위가 상승되고 이에 따라 사회적 신분 상승과 지위를 바라고 그리스도교에 입문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또한 이 시대는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476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불안한 시대라 로마는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한때 복잡했던 로마의 행정 조직은 무너지기 시작하고 황제도 사라졌다. 학교는 문을 닫고 치안을 담당하던 군인들과 관리들도 사라지고 공공 시설은 파괴되었다. 야만족들의 이동과 전쟁으로 피해자들과 극빈자들의 수효가 늘어나고 아름다웠던 평야가 황폐해지자 백성들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심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6세기 후반에는 롬바르인들이 로마를 점령하여 백성의 불안은 더해졌고 교회도 자치적으로 교황을 뽑지 못하고 외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으며 교황으로 선출되어도 야만족들의 왕들과 동로마 황제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 교황좌에 오를 수 없었다. 적어도 제60대 교황 펠라지오 1세(재위 556-561년)부터는 동로마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만 교황좌에 오를 수 있었다. 제61대 교황 요한 3세(재위 561-574년)는 4개월, 그 다음 교황 베네딕토 1세(재위 575-579년)는 1년을 기다린 후 주교로 성성되고 교황좌에 오를 수 있었다. 제63대 교황 펠라지오 2세(재위 579-590년)는 동로마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고 주교로 성성되었다가 불이익을 당할 것을 염려하여 부제 그레고리오를 동로마에 파견하여 그 실수를 설명하게 하였다. 그리고 로마의 주교인 교황과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는 세계 총주교(Ecumenical Patriarch)라는 칭호를 놓고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교황 펠라지오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되어 요한 4세 총주교가 서명한 공의회의 결정을 거절하였다.
교회 내부적으로는 아퀼레이아의 총주교와 베네치아와 이스트라의 주교들은 로마와 친교 맺기를 거절하고 있었고 라벤나의 비잔틴 총독은 여러 가지로 교황을 간섭하고 있었다.
사회 정치적 상황이 이러하였으니 일반 그리스도인들과 사제들의 삶도 안정적일 수 없었다. 사회의 분위기가 그리스도교를 선호하는 경향으로 나아가자 명목상의 신자가 많아졌다. 그러나 그들은 미신과 이단적 생활을 그대로 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비그리스도교적 생활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문제가 되었다. 일반 평신도들의 생활만 이런 것이 아니라 요즈음과 같은 신학교 제도가 없었으니 성직자들 중에도 무자격자들이 있었고 세속적인 출세나 욕망을 위하여 성직에 입문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로마,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등지에서는 교리 학교에서 사제를 양성하였으나 본당이나 주교관에서 양성되는 경우도 아주 많았다. 대부분의 사제들의 삶이 훌륭했다 하더라도 교회의 상황이 이러했으니 영성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자격 있는 사제들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외부적인 교회의 세력은 확장되고 있었으나 복음의 정신이 일반 생활에 뿌리내리기까지는 더 많은 세월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위대한 성인 베네딕토(+547년)가 출현하여 조직적인 수도 생활을 시작한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로마의 생활에 염증을 느낀 성인 베네딕토는 수비아코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한 후 몬테 카지노로 옮겨 수도원을 세우고 영성의 불을 지펴 교회에 큰 활력소와 희망을 주었다.
3. 교황 대그레고리오의 등장
이런 복잡한 시기에 이미 두 교황(펠릭스 3세와 아가비토)이 배출된 로마의 명문가 파트리치우스 가문(familia patriciana)에서 그레고리오가 출현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권유로 공직 생활을 위해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신심 깊은 모친과 숙모의 도움으로 신심 생활을 배우면서 성장하였다. 로마의 지방 장관(praefectus)이 되어 원로원 의장, 로마 시의 재정, 국방, 보급 등의 일을 책임졌다. 이로써 책임감과 공무에 대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부친의 사망을 계기로 5년 동안의 짧은 공직 생활을 끝내고 수도자로 살기 위해 사저를 수도원으로 개조하고 매일 묵상과 기도 그리고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를 하면서 수행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레고리오가 베네딕토회 수사였다는 판단은 근거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레고리오는 성인의 규칙서를 읽고 이를 참조하여 생활을 그런 식으로 조정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그는 라틴 교부들의 문헌과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였다. 그리고 위장병을 앓을 정도로 지나치게 고행을 하였다고 하니 그의 수행 생활이 어떠하였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런 관상적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교회의 부름을 받아 부제로 서품된 후 콘스탄티노플에 교황 사절로 파견되어 교회의 일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말은 몰랐으나 해박한 지식과 공직 생활의 경험이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함께 수도 생활을 하던 수사들을 대동한 그는 동방에서도 수도자로 살았다. 그리고 주위의 위대한 영성가들, 특히 세빌레의 랜더와 가까이 지내고 그들의 요구에 응하여 구약성서의 욥기에 대해 강론하였다. 후에 이 강론집이 [도덕론](Moralia)이란 제목의 위대한 저서로 남게 되었다.
15년 동안 외교 사절로 지내다가 로마로 소환되었으나 바라던 수도 생활을 하지 못하고 교황 펠라지오 2세의 명을 받아 그의 고문으로 일하였다. 주로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년)에서 교황 비지리오가 삼장서(Kephalia)를 단죄한 이래 이스트리아 주교들이 로마와 분리되어 있었으므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하였다. 3년 후 589년 테베레 강의 범람으로 교황 펠라지오 2세가 변을 당해 서거하자 그레고리오는 로마 시민들과 성직자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그의 후임자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참으로 겸손했던 그는 그 직무와 영예를 받지 않으려 하였다. 문헌을 볼 때 이 점에서 그는 진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고 라벤나의 교구장 요한 대주교가 꾸중을 하면서 직무를 받아들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Registrum은 “그는 괴로운 심정으로 영예의 짐을 떠맡았으며, 너무 슬퍼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그의 영혼의 눈은 슬픔으로 어두워졌다."1)라고 기록하고 있다. 교황좌에 오른 후 그는 요한 대주교에게 [사목 규범]2)(Liber Regulae Pastoralis)이라는 책을 써서 답신 형식으로 보내었다.
그는 교황이 되었으나 동로마 황제의 승인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교황좌에 오른 그는 동방 교회의 총주교들에게 짧은 신앙 고백문과 함께 전체 교회를 위한 높은 이상과 사제 직무를 언급하는 사목적 서신을 보냈다.
4. 교황의 활동
1) 정치적 활동
이때는 민족 대이동에 따른 야만족들의 침입과 동로마와의 관계를 해결하는 과제가 교황을 괴롭히고 있었다. 568년부터는 이탈리아 북쪽에 롬바르인들이 침입하여 그곳에 왕국을 세우고 로마 근처 스폴레토와 베네벤토에 공작들을 세워 로마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교황은 롬바르드의 아길루프 왕을 만나 회담한 후 그들의 침입을 막았다. 교황이 롬바르드인들과 행한 교섭은 장차 교황을 실제 로마의 군주로 격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동로마의 황제도 라벤나의 총독도 교황을 돕지 않았다. 이에 교황은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어 황제의 도움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바라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뒤에 롬바르드 왕국은 로마의 문화에 서서히 동화되었고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해 피핀 왕에게 정복당하고 황제의 기증으로 교황 영토가 되었다.
2) 교회의 전례
복잡한 상황에서도 교황은 전례를 성대하고 신심 있게 거행하기 위하여 전례를 만들고 성가와 기도문을 제정하였다. 그레고리오 성사 예식서(Sacramentarium Gregorianum)가 전해지는데, 이는 590-604년의 교황 재위 중에 시작되어 교황 하드리아노와 대학자 알퀸(+804)의 시대를 거쳐 11세기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교황은 미사 중에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Kyrie eleison)와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Christe eleison)를 주례 사제와 회중이 성가로 응답하게 하였고 알렐루야는 참회 시기를 제외하고 항상 사용하게 하였다. 복음을 노래로 읽는 것은 부제에게 위임되었고 강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미사의 기도문(로마 전례문의 감사 기도-현재 제1양식)에 다음 기도문 “주님, 저희 봉사자들과 온 가족이 바치는 이 예물을 기꺼이 받아들이소서. 저희를 한평생 평화롭게 하시며 영원한 벌을 면하고 뽑힌 이들의 무리에 들게 하소서."를 첨가하였다. '주님의 기도'도 교황의 지시로 현재 미사의 그 자리에 놓이게 되었고 이전까지 산발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성가를 집대성하여 정착시킨 그레고리오 성가(Cantus Gregorianus)는 교황의 큰 업적으로 여겨진다. 성음악(musica sacra)의 중요성을 인식한 교황은 성가단 학교(schola cantorum)를 신설하여 육성하였다. 이 밖에도 미사의 감사송들과 여러 기도문들도 교황의 업적이다.
3) 동방 교회와의 관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 제국에 종교의 자유를 준 이후 그는 가톨릭의 박해자인 갈레리오 황제에 대한 증오심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인들이 국가의 반역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교회를 지원하였으며 정치적인 안목으로 로마 제국의 통일과 강화를 위하여 국가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러 지역을 순회한 후 콘스탄티노플을 제국의 수도로 삼고 330년 5월 11일 봉헌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교회는 로마 제국의 힘을 받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는 324년 말에 있었던 제1차 공의회를 황제가 소집하였던 역사적인 사건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콘스탄티노플 교구의 힘이 강해져 로마와의 관계가 조금씩 빗나가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황제를 이교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 국가로 변화시킨 위대한 인물인 동시에 지상에서 하느님의 권력을 대신하는 자로 여기게 되자 정치 종교적인 문제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자연적으로 이 도시의 총주교는 황제의 조언자와 보좌관이 되었고 로마 주교와 상치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제노 황제의 재가하에 발표된 헤노티콘이다. 이를 승인한 단성론자 총대주교 아카치우스를 교황 펠릭스 3세가 파문하기로 결정하자 484년에서 519년 사이 동방과 서방 교회는 한때 분리된 듯하였다. 아직까지 훔베르토(Humberto) 추기경이 교황 사절로 이 도시에 파견되어 이곳의 총주교 체룰라리우스를 파문하기까지는(1054년 동서방 교회의 분열) 5백 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에게 일어난 사건들은 동방 교회와 일어난 복잡한 문제의 서곡일 따름이었다. 황제가 교회를 간섭하기 시작하자 로마 교구장에 선출되어도 황제의 허가 없이는 교황좌에 오를 수 없었다. 라벤나 총독과 황제는 롬바르드인들이 이탈리아 북부를 침입했을 때 교황이 도움을 청했으나 전연 개의치 않았다. 교황은 정치적으로 고독하였다.
교회 내적인 문제도 정치적인 문제만큼 심각해져 갔다. 콘스탄티노플의 요한 4세 주교가 황제의 힘을 업고 자신을 최고 총주교로 칭하자 교황은 “하느님의 종들 중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란 칭호를 사용하여 대항하였다. 후대 교황들도 이를 즐겨 사용하였다. 이는 교황청은 모든 교회의 머리이며 전체 교회의 관심과 수위권이 베드로의 후계자에게 위임되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은 교회의 머리이다. 그러므로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좌도 교황좌에 예속되어 있으며 로마의 주교좌에 예속되어 있지 않은 주교는 있을 수 없다. 이러한 태도를 분명히 한 교황은 로마의 주교좌는 모든 교회들 위에 세워져 있고 각 교구는 각 지역에서 사목권을 행사하되 형제 주교들은 로마의 주교와 연관을 맺고 있다는 입장을 명확히 한 것이다.
4) 기타 교회와의 관계
그 당시 교회 사정은 이탈리아에 교구 셋, 갈리아에 교구 둘, 그리고 동방의 일리리쿰으로 되어 있었다. 교황은 로마의 주교로서 토스카니아 남부에 이르는 교회의 모든 활동을 총괄하였다. 그리고 주교의 선출을 법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 주었으며 궁핍할 때 지원해 주었다. 주교에 대한 고발은 로마에서 직접 재판하였다. 주교들은 해마다 로마에 모였다. 시칠리아의 주교들은 3년마다 로마에 가다가 교통 사정이 좋지 않아 5년에 한 번씩 로마에 가게 되었다. 로마 밖의 수좌 교구는 밀라노, 아퀴레이아(베로나, 트렌트, 폴라 지역), 라벤나(이탈리아 동북쪽 아드리아 해안 근처)였다. 그 지역에서 이스트리아 주교들은 로마와 분열 상태로 남아 있다가 여러 주교들이 교황과 화해했으나 완전한 화해는 교황의 서거 후에 이루어졌다.
교황은 아프리카 교회와의 관계에서 도나티즘(Donatismus)을 경고했다. 스페인의 교회와 좋은 관계를 맺었고 593년 아르레스의 교회와 관계를 정상화시켜 프랑크 왕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메로빈지안족들이 여러 분파로 갈라졌으나 통치자들은 교회를 서로 자기들의 교회라고 주장하였으므로 큰 문제가 없었다. 교황은 갈리아 교회의 주교들과 군주들에게 많은 서신을 보내어 성직 매매와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 특히 평신도들의 서임을 금지시켰다. 또한 그는 영국 교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앵글로 색슨족들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으나 590년 켄트 왕 에테르베르트가 파리 왕의 공주이며 가톨릭 신자인 베르타를 왕후로 맞이했다. 왕후는 프랑크의 주교 한 분을 데리고 갔다. 이에 그리스도교의 싹이 튼 영국에 교황은 자신이 시작한 성 안드레아 수도원의 수사들을 선교사로 파견했다. 책임 수사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동료 40명은 열심히 노력하여 1년 후 에테르베르트 왕을 개종시켜 서서히 가톨릭 국가로 변모시켜 나갔다. 이리하여 영국에 교계 제도가 설정되어 2개의 대주교좌와 12개의 작은 교구를 두게 되었고 캔터베리 교구가 수좌 교구가 되었다.
5) 구제 사업
교황은 명문가 출신이라 부유하였다. 사유 재산과 교회의 재산은 이탈리아, 시칠리아, 코르시카, 사르디니아, 갈리아, 아프리카와 일리리쿰(유고슬라비아 일대)에 걸쳐 있었다. 교황은 그 토지의 지주였고 수입은 교회의 유지와 필요에 사용하였다. 교황은 재산 관리를 철저히 하여 부정을 막고 극빈자들과 전쟁 피해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전쟁 포로 구제를 위해서도 사용하였다. 각 지역의 재산 관리자들에게 지시하여 늘 가난한 이들의 구제에 힘쓰게 하였다.
5. 저술가로서의 교황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저술가로도 명성이 높다. 그는 이론적인 면보다는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제적인 주제들을 다루었다. 복음에 관한 강론 40편, 에젤키엘서에 따른 강론 20편, 아가서에 관한 강론과 욥기를 주석하여 신앙인들의 윤리 생활을 정리한 [도덕론],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애와 기적, 영혼의 불멸에 관한 대화집을 저술하였다. 특히 이 책에서 교황은 자신과 부제 베드로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성인들의 성덕과 기이한 일을 찬양하고, 인생의 고귀함은 성덕으로 평가된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성인들 안에서 하시는 놀라운 일과 죽음을 다루면서 영혼의 불멸과 천당, 연옥, 지옥을 다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교황의 서한(850통)을 모은 14권의 책은 교황 재위 중에 일어난 일들이 수록되어 있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6. 교황의 영성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중책을 맡은 그가 가중한 사목직을 수행하면서도 큰 일들을 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왔는가? 역사는 그를 건강에 문제가 많았던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과연 어디에서 나왔는가? 영성 신학은 이를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한다.
1) 관상 생활은 활동 생활보다 앞선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활동(actio)과 관상(contemplatio)으로 나눈 이중적 생활 분리는 완전하지 못하지만 한때 이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관상한 것을 활동으로 옮겨 사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사랑이신 하느님과 함께 보낸 시간, 곧 기도의 결과를 활동 안에서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 두고 성 아우구스티노는 혼합 생활(vita mixta)이라 하였고, 천사적 박사는 관상한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contemplata aliis tradere)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받고 배운 사랑을 일상 생활 속에서 전하는 것이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한 것이다. 이런 삶의 모범을 우리는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삶에서 보고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저서에서 다시 한번 이 영성의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활동 생활보다 관상 생활을 더 우위에 두었다. 그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역을 다루면서 마리아를 칭찬하신 주님의 말씀에 역점을 두었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루가 10,41-42). “관상 생활은 공로에 있어서 활동 생활보다 더 위대하다. ...... 활동 생활도 좋지만 관상 생활이 더 좋다."3) 이런 사고는 늘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던 수도 생활에 대한 동경과 그 생활에서 얻은 영적 체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원래 그는 공직 생활을 끝내고 회개한 다음 자발적으로 수도 생활을 시작했으나 교회의 권위에 순종했기 때문에 그 생활을 지속하지 못했다. 또한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므로 더 더욱 수도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언제나 그 생활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는 관상 생활을 다루면서 먼저 영성 생활의 발전을 언급한다. 제1단계는 악습과 싸우고 사욕편정을 억제하려고 노력하는 단계이다. 이는 외적으로는 물론이고 내적 싸움(bellum cordis, 心戰)을 전제하는데, 결과는 생활 개선으로 드러난다. 제2단계는 수행의 단계로서 특별히 윤리 덕행을 닦는 과정이다. 그의 주장은 신학적 덕행이 우선이지만 윤리 덕행이 없으면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하므로 윤리덕을 성장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성령의 이끎에 따라 완성으로 향해 나아가는 단계이다. 성령은 성화의 원동력이므로 완덕을 향해 나아가는 영혼은 영의 이끎에 자신을 내놓아야 한다. 이러한 영적 완성을 향한 일곱 단계는 성령의 은사에 따라 발전된다.
이런 영성 원리를 제시한 그는 그리스도인 계층에 맞는 생활 신분을 명확히 구분하였다. 이 구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지속되었고 아직까지도 교회의 생활에서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의 구분이 그것이다.
이 시대의 수도자는 생활 자체가 관상 생활을 하는 신분이다. 평신도와 성직자는 활동 생활에 종사하는 신분이다. 그러나 세 신분 모두 정도에 따라 더 많이 또는 적게 관상에 시간을 바칠 수 있다.4)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관상기도에 더 매진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본성과 기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관상기도는 신분이 매우 높은 이들에게 주어지고 낮은 이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때는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이나 가장 높은 신분의 사람, 또는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게도 주어진다. 심지어는 혼인한 사람들도 이런 은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어떤 신분도 관상기도에 예외적이지 않다. 누구든지 자기의 마음을 수직하고 관상의 빛에 의해 조명을 받는다면 이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현실을 보면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이런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낮은 신분의 사람들도 이 기도의 염원을 가지고 살아갈 때 특별한 은사를 받는 경우가 있다......."5)
구체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관상할 수 있는가?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히 정신적 기도(묵상이나 관상 기도)에 관심을 두는 이는 구원의 길을 따라 그리스도를 중개자, 모범, 구원자로 여기고 그분의 신비들 안으로 들어가도록 권고한다. 그 신비들은 그분의 신성과 인성, 인성으로 당한 고통들과 영광들이다.6) 하지만 인간의 구원 업적은 성령에 의해 완성되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신 후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셨다. 성령은 뛰어난 선물 자체이며 일곱 가지 은사를 통해 각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므로 이를 통해 인간은 두려움을 넘어 지혜를 얻고 관상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여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7)
2) 활동 안에서 관상의 결과가 드러나야 한다.
비록 교황이 관상 생활을 우위에 두었지만 관상의 결과가 활동 안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가르쳤다.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며, 잘못을 교정하고, 교만한 이웃에게 겸손의 길을 제시하며 병자들을 돌보고 모든 이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며 각자의 책임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는 것 등"8)이 여기에 속한다.
선행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활동 생활은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 이것은 윤리덕의 실천이다. 신학덕은 관상기도에서 나오며 공로를 쌓는 덕이므로 윤리덕보다 높다.9)
그는 활동 생활은 관상기도를 위한 준비 단계라고 보았다. 관상한 결과를 활동 안에서 드러내기도 하지만 활동 중에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기도 안에 집합시켜 하느님과 함께 궁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관상 생활로 나아가야 하는데 활동 생활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관상 생활에 도달한 이도 이웃에게 도움이 될 만한 선행을 단념하지 않는다."10) 그러므로 그는 사랑의 계명을 이중적으로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활동 생활은 관상 생활을 위한 준비의 구실을 하고 또한 관상기도의 결과로 보았다. 따라서 마리아의 역을 칭찬하였으나 결코 마르타의 역을 배척하지 않았다.
3) 그리스도인 생활 신분 구별
그레고리오 교황의 재임시부터 8세기까지 그리스도교는 전 유럽에 급속히 전파되었다. 앵글로 색슨족, 프랑크족, 롬바르드족, 비시고트족들에게 그리스도교의 문화가 소개되었다. 이제까지는 특별한 지침이 없었으므로 교황의 가르침은 그대로 수용되었다. 이를 통해 모든 민족이 하나로 통일되어 갔다. 그것은 서서히 각 민족의 상이점들을 벗어나 하나로 묶는 가톨릭 신앙이었다. 그 중심에 교황이 있었다. 강력한 전통 문화가 없었던 야만족들에게는 가톨릭의 가르침보다 더 나은 것이 있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교회의 가르침과 수도원의 전통들이 서서히 유럽 전역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이 시대의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된 학문적 원천이 풍부하지 않았다. 수도원을 통해 기도의 실천, 수행 생활의 안내 등이 간헐적으로 알려졌으나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가르침만큼 힘있게 전해지지는 못하였다. 이 시대의 탁월한 학자들이었던 세비야의 이시도로와 베다 성인들은 모두 그레고리오의 저서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은 각 신분에 맞는 영성적 가르침을 제시하였다. 수도자는 일생을 주님께 봉헌한 신분으로서 주로 관상기도에 시간을 바치는 이들이다. 평신도에게는 두 계층이 있다. 첫째 계층은 통속적 생활(vita popularis)을 일삼는 이들이다. 이들은 세례 받기 전에 신앙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가르침을 받는다. 그것은 기도 생활, 혼인의 신성함과 목적, 불가해소성, 그리스도인의 의무 등을 교육받고 수시로 사제들의 강론과 가르침을 듣긴 하나 신앙 생활과 지식이 초보적이고 과거의 악습을 버리지 못해 미신과 같은 세속적인 생활을 즐기는 이들이다. 이들은 보통 신자들일 뿐이다. 그러나 열렬한 평신도들(Christiani ferventes)도 있다. 이들은 과거의 생활을 참회하고 회개한 다음 새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수도원 주위로 자주 모여들고 수도자들의 기도(성무일도나 축소된 소성무일도)를 함께 바치며 고행에도 관심을 가지며 수덕 생활에도 힘쓰는 이들이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속세의 삶을 살지만 삶을 성화시키려는 이들이다.
성직자들은 활동에 종사하는 이들이다. 이 시대의 성직자들은 혼란과 정비의 시대를 살고 있었으므로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들에게 적절한 삶의 교육이 필요했다. 이를 절감한 교황은 이들에게 맞는 영성 가르침을 베풀었다. 대표적인 지침서가 [사목 규범]이다.
원래 이 책은 교황직 수락을 거부한 그레고리오에게 라벤나의 요한 대주교가 꾸중을 했으므로 교황직에 오른 후 그에게 교황직을 거절한 이유를 답신 형식으로 쓴 것인데, 21세기를 사는 오늘에도 성직자들에게 불멸의 명작으로 남아 영향을 주고 있다.
우선 이 책은 그 시대 교회와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세비야의 주교 랜더는 이를 스페인 교회에 전하여 성직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아일랜드의 수사들과 주교들에게 전해져 큰 호응을 얻었다. 영국에도 전해져 9세기경 알프레드 대왕은 고대 영어로 번역하여 목자의 책(Shepherd's Book)으로 불렀고 주교들에게 분배하여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생활 개선을 위한 자료로 사용하게 하였다. 이 밖에도 [사목 규범]은 후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사제직(De Sacerdotio)은 그 내용이 [사목 규범]과 비슷하며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조도 영향을 받았다. 교황 요한 23세는 이 책을 늘 가까이 두고 읽었다는 일화도 있다. 필자는 이를 사목자들을 위한 목민심서(牧民心書)라고 생각한다.
[사목 규범]은 네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핵심은 깊은 내적 기도를 통한 사목자의 덕행이다. 깊은 기도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영성의 특징인 관상기도이다. 사목자는 교회의 직무를 위해 성품되므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내적인 태도가 더 중요하다. 그것은 깊은 기도로써 얻는다.
제1부는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특성들을 엄밀히 연구함으로써 사목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통치는 예술 중의 예술이다. 유능한 의사가 중병을 치료하듯이 영혼을 돌보는 사람도 특출한 덕으로 뛰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사목직의 외적인 영예만을 추구하여 그 자리에 오른 자는 덕행이 부족한 사목자이므로 멸망으로 나아갈 뿐이다. 지나칠 정도로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깊은 기도(묵상과 관상)에서 얻은 체험을 삶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교회의 중요한 직책을 맡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11) 목자는 반대자들도 만나며 직무 때문에 정신이 산만해질 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목자의 짐을 피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아버지 품에서 파견되신 그리스도의 사명을 묵상하면서 참 목자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12) 그것은 그리스도의 정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사욕편정에 죽고 세속적 영예를 멀리하며 내적인 것을 찾는 데 있다.13)
제2부는 사목자가 주님의 깨끗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정화시켜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서의 내용과 성인들의 삶을 묵상하고 보이지 않는 사물을 자주 묵상함으로써 내적 생활에 뛰어날 때 거룩하게 행동할 수 있고 말씀을 힘차게 전할 수 있으며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된다.14)
제3부의 제목은 “지도자가 자기의 거룩한 생활로 어떻게 수하 사람들을 가르치고 권면할 수 있는가?"이다. 그는 심리적인 측면에서 사람들을 40계층으로 나누어 목자가 각 계층에 맞는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는 사제다운 덕행과 지혜로 무장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이것 역시 깊은 내적 기도에서 나온다고 했다.
제4부는 간단히 1장으로 되어 있다. 그는 통치자가 남을 가르치고 지도하지만 거만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신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외친다. 자신 안으로 깊게 들어가는 목자는 하느님과 만나며 쉽게 깊은 내적 기도에 몰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세 계층을 다루면서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신앙인의 활동을 중시하되 언제나 더 중요한 내적 기도를 강조한다. 활동의 근원은 깊은 내적 기도에서 나온다는 그의 주요 정신이 어디서나 보인다. 그것은 관상기도를 활동 생활보다 중시한 그의 사상이다.
5. 마치면서
이상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영성을 다루면서 그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사회와 교회를 변화시켜 나간 것은 정치적인 힘이나 무력이 아니라 충실한 영성 생활과 이를 적절히 가르친 결과였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우리보다 1,400여 년을 먼저 사신 위대한 성인은 내적 생활로 인도하는 관상기도를 통하여 어려운 정치 상황에서도 과감히 대처할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얻었으며, 교회의 최고 목자로서 이를 강조하고 가르침으로써 혼란한 시대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심어 뿌리내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런 면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영성은 중세기뿐 아니라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말처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된 가르침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늘 교회를 쇄신시켜 나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의 모범과 가르침은 교회의 모든 계층에게 인생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특별히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성직자들의 삶의 쇄신을 위한 지표가 될 것이다.
독서기도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20-09-03&stype=re
삼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20-09-03&stype=mi1
육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20-09-03&stype=mi2
구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20-09-03&stype=mi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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