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9월 9일
성 베드로 클라베르 사제
St.Peter Claver
San Pietro Claver Sacerdote
(Barcellona (Spagna), 25 giugno 1580 - Cartagena (Colombia), 8 settembre 1654)
Born :1581 at Verdu, Catalonia, Spain
Died : 8 September 1654 at Cartegena, Colombia of natural causes.
Canonized :1888 by Pope Leo XIII
Pietro = pietra, sasso squadrato, dal latino
Slave of the Blacks; Slave of the Slaves
흑인 포교 사업의 수호 성인, 예수회
Pedro Claver (Spain, 1580)
Colombia, 1619-1654
1580년 스페인의 베르두에서 태어난 성인은
20세 되던 해에 예수회에 입회하여 35세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노예들의 집단 수용소에서 활동하게 된 그는 음식물과 의약품을 공급하고,
그들에게 신앙을 가르쳐 30만명을 개종시켰고,
나환자들과 죄수들을 위해서도 아낌없이 헌신하여 흑인 선교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스페인 태생인 젊은 예수회 회원 베드로 클라베르는
신세계 식민지 선교사가 되기 위해 1610년 조국을 영원히 떠났다.
그는 카리브 해를 거쳐 부유한 항구 도시 카르타헤나(지금의 콜롬비아)로 향했다.
그는 거기서 1615년에 서품을 받았다.
그때까지 근 100년 동안이나 노예 무역이 아메리카에서 성행되었고 카르타헤나는 노예 무역의 중심지였다.
운송중에 약 1/3 이 죽어 가는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상황에서 1만 명의 노예들이
서아프리카로부터 대서양을 횡단하여 매년 카르타헤나 항구에 쏟아졌다.
비록 노예 무역 행위가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비난을 받았고,
후에는 비오 9세에 의해 ’최고의 악행’이라고 명명되긴 하였지만 그것은 나날이 번창되어 갔다.
클라베르의 선구자인 예수회 신부 알퐁소는 클라베르가 스스로 ’영원한 흑인들의 노예’임을 공언하고
그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려고 카르타헤나에 도착하기 전 40여 년 동안 이미 노예들을 위해 봉사해 왔다.
노예선이 항구에 들어오자마자 클라베르는 노예들이 사슬에 묶인 채 짐승처럼 배에서 떼지어 나와
가까운 광장에 세워진 후에야 의약품,음식,빵,브렌디,레몬,담배 등을 가지고 그들 사이에 설 수 있었다.
통역자의 도움으로 그는 몇 가지 지시를 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의 인간적 존엄성과 하느님의 가호를 확실히 말해 주었다.
40년간 선교 활동을 하는 동안 클라베르는 약 30만 명의 노예를 가르치고 영세시켰다.
그의 사도직은 노예들은 돌보는 일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참으로 카르타헤나의 사도이며 도덕적으로 명망 높은 인물이 되었다.
그는 시 광장에서 연설도 했으며, 시골에서 선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군인과 무역상들에게도 포교했고,
노예 소유주와 대농장 주인들의 감시와 방해를 피하느라고 노예 숙소에서 숙박했다.
그는 4년 동안 병으로 거의 활동을 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제대로 간호를 받지 못한 까닭에 결국 1654년 9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흑인 부랑자들에 대한 그의 열성을 불쾌하게 생각하던 시장도 그가 죽자
공금으로 그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르도록 지시했다.
그는 1888년에 시성되었으며 교황 레오 13세는
1896년 그를 전세계 흑인 포교 사업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했다.
성령의 굳셈이 클라베르의 대담한 행동과 중요한 결정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결코 돌아오지 못할 조국을 떠나려는 결정은 현대인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엄청난 의지적 행위를 보여 준다.
모든 이들 중 가장 비천하고,거절당하고 버림받는 삶들에게
영원히 봉사하려는 베드로의 결심은 아주 영웅적이다.
우리가 그 같은 사람의 삶에 비추어 자기 삶을 평가할 때 성령의 놀라운 힘에
더욱더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잠재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된다.
베드로 클라베르는 그의 흑인 형제 자매들에게 브랜디,음식,약품 등을 나누어 주는 것과 같은
구체적인 봉사가 언어로 하는 설교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는 가끔 "우리는 입으로 그들에게 말하기 전에 우리 손으로 그들에게 말해야 한다."고 했다.
"We must speak to them with our hands by giving,
before we try to speak to them with our lips."
옛날에는 노예라는 것이 있어 사람이면서도 물건 취급을 당하여 매매되고,
그 노예를 산 사람들은 그들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가 있었다. 이런 노예의 운명은 비참한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해 조금의 자유가 없었고 온전히 주인 소유물에 불과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사람을 자기와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자 신자들은 노예까지도 사랑하게 되었다.
교회에서는 될 수 있는데까지 노예를 보호했으나 도저히 노예제도는 없앨 길이 없었다.
그래서 배상금을 모금하거나 혹은 좋은 훈계로써 그들을 석방시키도록 하는 동시에,
적어도 그들을 위안해 주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많은 열심한 신자들과 사제들은 기부금을 거둬
이런 좋은 자선 사업에 충당하는 등 이 자선 사업에 전력을 다했다.
그 중에도 이런 가련한 노예를 위해 가장 크게 활동한 최대의 은인은 아마 성 베드로 클라베르일 것이다.
당시의 노예는 대개가 흑인이었으며 그들은 백인보다 더욱 심각한 학대를 받고 있었으므로,
그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나섰고. 때로는 자신을 흑인의 노예라고까지 불렀다.
Slave of the Blacks, Slave of the Slaves.
그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근교 베르두에서 태어나 일찍이 신부가 되려는 마음을 가졌었다.
그래서 부모는 그를 바르셀로나에 보내어 공부를 시켰는데 성적도 매우 우수했다.
그곳에서 그는 예수회의 회원들과 자주 접촉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그 회에 입회하게 되었다.
수련이 끝나자 그는 흑인 노예를 개종시키기 위해 남미에 파견해 줄 것을 청했다.
그 즉시 승낙을 얻지는 못했으나 1610년에 뉴 그라나다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남미에 도착하자, 규정된 학문과정을 마치고 신품 준비를 해 1615년 카르타제나에서 서품되었다.
이미 자신은 그만한 학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바르셀로나에서 친하게 지냈던
평수사 성 알폰소 로드리게스(축일:10월30일)로 부터 완덕에 대한 수덕 신학을 배웠다.
그가 흑인 노예에게 전교를 하게된 연유는 성스러운 친구의 덕택이 컸던 것이다.
그는 학문을 닦고 준비를 한 후 흑인 노예들에게 전교하기 위해 부임했다.
카르타제나 지방에서는 광산, 도시, 농천 할 것 없이 많은 노예들이 강제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매년 1만명 내지 1만2천 명씩 수입되어 짐승과 같이 매매되고 혹사되는 것이었다.
그 중에는 혹은 병에 걸리고 혹은 절망적 상태에 빠져
주인이나 감독에게 불붙는 듯한 반감과 증오심을 품은 자도 적지 않았다.
베드로는 이런 가련한 자들을 위로해 주기 위해 부임된 것이라 선내(船內)에서부터
과일과 과자를 나누어 주며 갖은 친절을 다해 그들과 접근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들은 이 역시 자기네들을 학대하는 동료인 줄 알고 도저히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베드로의 변함없는 친절에 그들은 안심하고 차차 가까워졌다.
성부와 성자와 함께 성 이냐시오.
베드로는 그들을 위로하고 하느님의 사역이나 예수에 대해서
그 수난하심과 부활하심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들은 아직 천주교를 몰랐으므로 이런 말들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는또한 어린이나 병자들을 알뜰히 보살펴 상처를 씻겨 주고 약을 발라 주며
부모보다도 더한 깊은 애정으로써 대했다.
이러한 사랑의 행실이 헛된 일일 리가 없었다.
불행한 사람들은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이 생각하고 따르며 타인에게는 결코 걸 수 없는 신뢰를 갖게 되었다.
베드로는 그들을 위해 여러 가지를 궁리했다. 그들의 오락을 위해 악기를 사다 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자기를 가까이 하지 않는 흑인,
혹은 자기를 멸시하고 욕을 하는 흑인들에게도 똑같은 친절로써 대해 주었다.
노예의 주인들은 그의 일을 방해하는때가 물론 가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과 노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능히 극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랑의 행위는 전교상에도 대단한 성과를 냈다.
그가 노예를 위해 일한 44년간에 세례를 받은 사람의 수효는 30만을 훨씬 초과했다고 한다.
그는 깊은 산골에 있는 흑인 노예들에게 전교를 하기 위해, 또는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기 위해
강을 건너고 늪을 지나며, 밀림 속의 맹수들과 싸우며 먼데까지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어려움도 달갑게 생각하는 베드로의 열심이 하느님 대전에 의합되었음인지,
가끔 그의 기도로 기적도 일어나곤 했다.
이러한 베드로의 존재는 사방에 알려져 이제는 흑인 노예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의 도움을 구하러 오는 이가 적지 않았다.
그리고 부탁을 받은 일은 결코 거절하지 않으며 상대가 천주교이건
회교인이건 토인이건 외국인이건을 막론하고 아무 차별 없이 가능한 모든 도움을 주었다.
그는 많은 기도를 바치고 낮에 시간이 없으면 밤에라도 이를 행하고,
게다가 준엄한 고행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몸을 괴롭히면서도 그런 활동을 했다는 것은 이 역시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순명과 청빈에 대한 덕은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었다.
그의 인내심이며 부드러운 마음씨는 사람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는데,
실은 그의 본래의 성질은 그와 반대였으나 수덕의 결과로 이같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1650년, 그는 어떤 페스트 환자에게서 병이 전염되어 겨우 생명은 건졌으나 몸이 매우 허약해졌다.
그로부터 4년 후 그를 돕기위해 사제 한 분이 유럽에서 파견되어 왔다.
몸이 쇠약해져 마음대로 활동을 못하는 그에게는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생명이 붙어있는 동안 자기의 의무를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의 위독함이 전해지자 전 시민은 비탄에 잠기고 위문객들은 쇄도해 왔다.
그가 영원히 쉬게 된 날은 1654년 성 마리아의 탄생 축일이었고, 그의 나이는 74세였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Ad Majorem Dei Gloriam)
*예수회 창립자,성 이냐시오 축일
*예수회 www.sogang.ac.kr/~gesukr
1. 예수회의 기원
예수회는 성 이냐시오 로욜라와 그의 '영신수련'(靈神修練)으로 단련받은 초대회원들로 부터 유래한다.
그들의 시대는 16세기의 대격변기였고 종교개혁의 시대였다. 성 이냐시오가 '주님안의 벗들'이라고 부른
그의 동료들은 오로지 하느님만을 섬기려는 열망으로 자신들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여 찾았다.
하느님의 섭리는 이냐시오 성인을 통해서 복음적 권고를 따르는 삶가운데 새로운 생활양식을 일으켜
하느님 백성의 모임인 교회에 봉사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공동으로 갖게된 비젼안에서 고유한 예수회의 생활양식이 자라났으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가진 성직 수도회가 결성되었다.
예수회는 1540년에 사도좌의 인가를 받아 교회 안에서 탄생하였다.
2. 예수회의 행동양식
예수회의 유일한 목적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회원 자신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웃의 구원과 완덕을
전심전력으로 추구하는데 있다. 더우기 그 모든것에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 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이 목적은 예수회의 행동양식을 결정하며, 예수회를 수도적이면서 특히 사도적인 단체로 만든다.
예수회의 사도적 활동은 세계 전역을 대상으로 하고 제한없는 기동성을 요구하며 더 어려운 사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한다. 따라서 교회의 필요에 즉각적으로 응해 어디나 가서 활동할 자유를 얻기 위해,
이전의 전통적인 수도생활 양식 안에 있던 여러가지 방해 요소들을 과감히 포기하여
근본적으로 쇄신된 수도생활 양식이 성립되었다.
예수회의 행동양식은 '영신수련'(靈神修練)을 통해 관상한 그리스도, 즉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전적인 자기헌신에서 나오는 영적이며 인간적인 태도이다.
그리스도는 예수회원 모두에게 삶과 일의 원형이 되시며, 또한 각자의 상황안에서 사도적 적응성을 가지고
항상 '그 이상의 것'을 선택하도록 재촉하신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회원은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관상가가 되며,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과의
특별한 유대속에서 교회와 함께하는 정신으로 봉사한다.
예수회원은 무상으로 봉사할 마음을 가지며, 기도로써 길러지고 체득된 식별의 감각을 지니고
세상안에서 활동한다. 예수회 전통은 봉사의 질과 자기도야에 있어 엄격함을 유지하여 왔으며,
인간적인 것에 대한 고결한 감각으로 참으로 인간다운 것을 존중한다.
예수회원의 행동양식은 외면상으로는 평범하고 또 그것을 추구하나,
내적으로는 자신의 목적의 탁월한 완성을 위해 노력한다.
3.오늘날의 예수회원
예수회는 그 시대와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관상하면서 영감을 받아
거기에서 사도적 활동력을 보존할 통찰을 길어 내었다.
따라서 우리시대 인간들의 염원과 필요를 보되 그리스도의 눈으로 봄으로써,
오늘날의 예수회원들은 스스로의 신원과 사명을 자각한다.
오늘의 예수회원은 이냐시오와 같이 '예수의 벗'으로 부름받았음을 인식하면서,
'주님 안의 벗들'인 동료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께 결속하여,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투쟁인 신앙의 봉사와 신앙에 내포된
정의 구현에 헌신하는 사명을 받아 파견된 사람이다.
예수회원은 세가지 서원을 통해 이러한 봉사에 필요한 사도적 자유를 얻어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면서 세계의 현실 한 가운데로 뛰어든다.
예수회 Society of Jesus,
colombia. Mass in Prison
Campesinos at Buga, Colombia
colombia.Training in the use of Wheelchairs
축일:9월9일(9월8일)
복녀 세라피나 스포르자, Poor Clare
Beata Serafina Sforza (Sveva Feltria) Clarissa
(Urbino, 1434 - Pesaro, 8 settembre 1478)
Bl. Serafina Sforza
Born :1432 at Urbino, Italy as Sueva
Died: 8 September 1478 at Pesaro, Italy of natural causes;
body exhumed several years later, and found to be incorrupt;
entombed in the cathedral at Pesaro
Beatified: 17 July 1754 by Pope Benedict XIV (cultus confirmed)
복녀 세라피나 스포르자는 1434년(1432년) 이태리 우르비노에서 태어나
1478년 선종하였다.
1754년 베네딕도14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몬테펠트로의 백작 딸로서 이탈리아의 우르비노(Urbino)에서 태어난 그녀는 수에바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나, 어릴 때에 부모를 여의었다. 그 후 그녀는 삼촌인 콜론나 왕자 집에서 자랐고, 16세 때에는 페자로(Pesaro)의 알렉산데르 스포르차 경과 결혼하였다. 이 사람은 두 자녀를 둔 홀아비였으나 그녀와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한번은 그녀가 친정에서 머무는 동안에 남편이 파치피카란 여인과 지냈다. 세라피나는 온갖 수단을 강구하였으나 수포로 끝나자 이를 포기하고 오로지 기도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결국 남편은 그의 아내를 집에서 내쫒았다. 그래서 그녀는 클라라회에 들어가서 세라피나라는 수도명을 받고 엄격한 회개생활을 시작하니 그녀의 덕은 날로 높아만 갔다. 그러던 중에 남편은 죽었다. 그녀가 수녀가 되었을 때의 나이는 25세였고, 20년 동안 회개생활을 하였다.
(가톨릭홈에서)
제주성글라라수도회 홈에서
우리 수도회의 영성
성 클라라 수도회는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라 성교회 안에서 거룩한 복음을 그대로 본받음을 생활양식으로 하고, 산 위에서 기도하신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기도생활로써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인 그리스도 신비체의 완성을 위해 봉헌된 관상 수도회이다. 성 클라라 수도회, 또는 가난한 자매 수도회라고 불리며, 프란치스코회의 제2회를 이루고 있다.
본 수도회의 생활양식이란 교회생활, 형제애, 가난, 관상이다.
우리 수도회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성모 마리아의 발자취를 따라 성령의 정배가 되어 오직 하느님만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가족적 일치를 이루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은 삶을 살아가는 봉쇄 안에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께 그 마음을 두는 관상생활을 한다.
그러므로 “성자를 당신 마음에 꼭 들어하시는” 성부와 함께 산 위에서 관상 중에 계시는 그리스도(마태 17,5)를 본받아 증거하며 살아가는 관상 수도회이다.
침묵 안에 끊임없이 회개의 정신을 새롭게 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을 끊임없이 바라봄으로써 모든 사람과 사물과 모든 사건 속에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발견하게 되어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
이 찬미와 감사는 성체신비의 거행에서 절정을 이루며, 교회의 심장 역할을 다한다. 이로써 교회는 이 생명의 샘에서 한없이 새로워진다.
이렇게 자매들은 자신의 삶 전체로 온 누리의 찬미를 수행하며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축제에 들어감으로써 하느님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그 영광스러운 몸의 연약한 지체들을 받치는 받침대가 된다.
▒ 복음적 교회생활
성녀 클라라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에 절대 순명하며 교회에 종속됨을 근본가치와 이 성소의 주춧돌로 삼았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심장 안에 살면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맥박이며 교회를 존재케 하고 유지시켜주는 전례, 특히 성체성사에 이 공동체생활의 중심을 두고 있다. 교회의 딸로서 자녀를 양육하는 어머니와 같이 성체성사를 통해 한 빵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그리스도와 결합되고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으로 그의 신비체인 교회의 전 지체와 일치함으로써 교회를 지탱시켜 나아가고, 특히 나약하고, 버림받고, 고통받는 지체들의 보조자로서 영적 봉사를 하는 것이 본회의 주요 소명이다. 이에 교회에 충성함으로써 교회의 어느 지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교회정신과 완전히 일치하여 복음을 생활함을 기본원칙으로 한다.
▒ 복음적 형제애
성녀 클라라는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거울삼아 상호 형제적 일치를 깊이 보존하며 복음 이상의 완성을 향해 나아감을 핵심으로 삼았다. 또한 이 심오한 자매적 일치를 이루는 사랑의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되고 전 공동체가 하나되어 전 지체, 교회에 형제애 일치의 표징이 되고 활력을 주며, 이로써 누리는 기쁨은 복음적 생활의 결실이며 참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이 자매애 안에 복음 정신은 구체화되고,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는 그리스도 사랑 안에 모두 하나되는 구원의 신비를 실현하게 된다.
▒ 복음적 가난
성녀 클라라에게 복음적 생활은 성령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절대적 가난의 생활이다. 가난은 그 자체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법에 의한 복음적 가난이다. 즉 구유에서 가난하게 나셨고, 십자가 위에서 맨 몸으로 달리신 가난한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개인적으로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가난하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생활로써 따름이 본 회의 영성에 근본을 이룬다.
순례자로서 단순과 겸손으로 온전히 주님께 의존하며 기쁜 마음으로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로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아 살아가는 가난한 자, 작은 자의 생활이다. 즉 모든 것은 은총이며 하느님의 선물임을 의식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청빈(가난. 겸손)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을 철저히 비우고 성령의 자유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된 참된 자유인으로서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장차 도래할 하느님 나라에 마음을 두고 모든 것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절대적 신뢰 안에서 늘 감사하는 참된 의미의 복음적 가난이다.
▒ 복음적 관상생활
성녀 클라라의 복음적 생활양식은 관상이다. 봉쇄된 수도원 안에서 깨끗한 마음과 주님의 정신으로 철저하게 성령의 지시를 따르는 고요와 침묵의 기도 생활에 있어 산 위에서 기도하신 그리스도는 이 고요와 관상적 고독의 모범이다. 관상 중에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뵈옵고 추구하는, 특히 그리스도의 탄생, 수난과 죽음, 성체성사의 신비를 묵상하며 이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우리의 아버지되심을 모든 것 위에 감사하며 기쁨과 평화 중에 끊임없는 찬미의 제물을 바치는 것이 본 회의 사도직이며 이는 하느님의 영원한 만민 구원계획과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관상생활은 교회가 그 현존을 드러내기 위한 중요한 본질적 표징이 된다.
▒ 활동분야
우리의 사도직은 관상생활이며, 사도적 활동은 없다. 자급자족을 위한 한 수단으로 봉쇄 구역 안에서 소규모의 밭농사를 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생활 양식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나눔의 실천이며, 인근 주민과 같은 형태의 육체적 노동을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의 정신에 따라 택한 서민적 생활 수단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 안에서 이 육체 노동은 낮은 자들의 수고를 함께 하는 것이며 고통 당하고 굶주리며 억압 당하는 그리스도의 지체들과 함께 실생활로써 이 낮은 자되는 어리석음을 받아들여 창설자의 정신으로 복음적 가난과 단순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지향적 삶은 육체적 노동에서뿐 아니라 각자의 소임과 고유한 분야 안에서도 한 맥이 되어 기도와 침묵으로 살아 움직인다.
세라핌적 가난의 특전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성녀 클라라에게 허가한(1228. 9. 17.) 세라핌적 가난의 특전
하느님의 종들의 종 그레고리오 주교는 아시시 교구의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수도적 공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경애하는 딸들인 그리스도의 시녀들, 클라라와 그 자매들에게 인사하며 사도적 강복을 보내노라.
1.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대들은 오직 주님께만 자신을 봉헌하기 위하여 세속의 모든 부귀 영화를 포기하였소. 그리하여 그대들은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여지신 그분,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분의 발자취를 모든 점에서 따르며 어떠한 경우에도 그 길에서 떠나지 않기 위하여, 더 이상 어떠한 재산도 결코 소유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소.
2. 이러한 그대들의 결심은 어떠한 물질적 곤란을 당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사랑의 마땅한 도리로 결심하고 스스로를 영의 법에 굴복시킨 그대들 육신의 허약함은 임의 왼손이 머리 받쳐 도와 주실 것이기(참조: 아가 2,6; 8,3) 때문이오.
3. 뿐만 아니라 하늘의 새들을 먹이시고(참조: 마태 6,26) 들의 꽃들을 입히시는(참조: 마태 6,26) 그분께서는 그대들에게도 무엇이건 모자람이 없게 보살펴 주실 것이며, 그분을 마주뵈올 영원의 나라에서는 당신 바른손으로 그대들을 안아주시고(참조: 아가 2,6; 8,3), 그분의 식탁에 자리한 그대들 사이를 오가며 손수 시중들어(참조: 루가 12,37) 주시리이다.
4. 이렇게 우리는 그대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지극히 높은 가난에의 결심을 사도적 호의로 뒷받침하고 보증하며, 어느 누구도 그대들에게 재산 받아들이기를 강요할 수 없게 이 문서를 통하여 사도적 권위로 확인하는 바이오.
5. 어느 누구도 우리가 인준하고 확인하는 이 기록을 훼손하거나 이에 대해 무모한 반대를 하지 말 것입니다. 누가 무엄하게도 이런 행동을 하려고 하면 전능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진노를 부르게 되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페루지아에서 교황 즉위 제2년 9월 17일
(제주성글라라수도회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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