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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 성 고르넬리오 교황 순교자 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

 

 

축일: 9월16일
성 고르넬리오 교황 순교자
San Cornelio Papa e martire
St. Cornelius (Papa dal 03/251 al 06/253)
Roma (?) - Centumcellae (Civitavecchia), maggio 253
Died :martyred in 253; buried at the cemetery of Saint Callistus at Rome
Cornelio = nome di antica famiglia romana(name of ancient roman family)
Name Meaning : battle horn


고르넬리오는 251년에 로마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노바시아누스 이단에 맞서 열심히 싸웠고 치프리아노의 도움으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할 수 있었다.

갈로 황제는 그에게 유배형을 내렸다.

고르넬리오는 253년 치비타베키아(Civitavecchia) 근교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나중에 그의 유해는 로마로 옮겨져 갈리스토 묘지에 안장되었다.

(buried at the cemetery of Saint Callistus at Rome)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심했기 때문에 파비아노 성인의 순교 이후 14개월 동안 교황이 없었다.

그 기간 동안 사제단이 교회를 다스렸다.

고르넬리오의 친구인 치프리아노는, 고르넬리오가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판단에 따라, 대부분 성직자의 증언에 따라, 신자들의 투표로써,

원로 사제들과 선한 사람들의 동의로써 교황에 선출되었다."고 적고 있다.

 

교황으로서 2년간의 재임 기간 중 고르네리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박해 시기에 배교했던 그리스도인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과 고해 성사에 관한 것이었다.

극단적인 두가지 견해로 결국 둘 다 단죄받게 되었다.

 

아프리카의 대주교인 치프리아노는 배교자는 주교의 결정에 따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자신의 주장을 확립시키려고 교황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고르넬리오는 로마 주교의 반대 의견에 부딪혔다.

그가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 노바시아노(교회를 다스리던 사람 중의 한 사람)라는

한 사제가 로마의 주교가 되어 그와 맞서 대항했다.

그가 바로 최초의 대립 교황이다.

 

그는 교회가 배교자뿐 아니라 살인,간통,간음,축첩 등의 죄를 지은 자들까지도

용서해 줄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을 부인했다.

노바시아니즘이 비록 몇 세기 동안 지속되기는 하였지만, 고르넬리오는 노바시아니즘을 배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특히 아프리카의 치프리아노)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그는 251년 로마에서 주교회의를 열고 배교자들도

관례적인 ’참회의 처방’으로써 교회에 되돌아올수 있다고 지시했다.

고르넬리오와 치프리아노의 우정은 치프리아노의 반대자 가운데 한 사람이 치프리아노를 고발했을 때

얼마 동안 긴장 상태에 있었으나 문제는 해결되었다.

 

고르넬리오 문서는 3세기 중엽의 교회 조직의 범위를 보여 준다.

그 문서에 의하면 46명의 사제와 7명의 부제, 7명의 차부제가 있었으며

그리스도인의 수는 약 5만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고르넬리오는 오늘날 치비타 베키아라고 하는 곳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고생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났다.

 

Cornelio는 고대 로마 가족의 이름이며 전투 경적(battle horn)이라는 뜻이다.

 

 

교회사에는 있을 수 있는 모든 오류가 수시로 제창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거의 사실인 것 같다.

3세기에는 우리가 별로 고려하지 않던 문제 하나가 해결되었다.

그것은 성찬의 전례 전에 고해를 한다는 것과 대죄를 범한 후에 교회와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르넬리오와 치프리아노 같은 사람은 엄격주의와 방임주의의 양극단 사이에서

중용의 길을 발견함으로써 교회를 도운 하느님의 도구였다.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지혜와 경험으로 새로운 경험을 평가하고,

그리스도께서 시작한 것을 계속 지키면서 영원히 살아 있는 교회 전통의 흐름을 지켜온 사람들이다.

(롤리너)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며 교회의 으뜸도 하나이다.

이 으뜸 주교좌는 본래 주님의 권위로 베드로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제단이나 다른 제관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제도를 무시하고 자신의 격정이나 무모함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짓이고 속된 것이며 독성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성치프리아노, ’가톨릭 교회의 일치’)

 

 

 

 

 

 

축일;9월 16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San Cipriano Vescovo e martire
St. Cyprianus of Carthage
Saint Cyprian of Carthage,Bishop and Martyr
CYPRIAN of Carthage(Thaschus Caecilius Cyprianus)
c.200-beheaded 14 September 258
Born :190 in Carthage, North Africa
Died :beheaded 14 September 258 in Carthage, North Africa
Cartagine (Tunisia), ca. 210 - 14 settembre 258
Cipriano = nativo di Cipro, dal greco e latino (native of Cyprus, from the Greek and Latin)
Memorial :31 August in Eastern Church

 

치프리아노는 210년경 카르타고의 이교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나 개종하여 사제가 되고

249년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매우 어지러운 시대에 자신의 모범과 저술로써 교회를 탁월하게 다스렸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에 유배되었다가 258년 9월 14일에 순교하였다.

 

치프리아노는 특히 북아프리카에서 3세기의 그리스도교 사상과

관습의 발달에 영향을 미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고등 교육을 받았으며 유명한 웅변가인 그는 30여 세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 재산을 분배했으며 세례받기 전에 순결을 맹세함으로써

그의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2년만에 서품을 받았으며, 그의 뜻과는 달리 오늘날 튀니스 근처에 있는 카르타고의 주교로 선택되었다.

 

치프리아노는 교회가 누려 온 평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신을 약화시켰으며,

 진정한 신앙을 갖지 않은 개종자들에게도 문을 열어 주었다고 개탄했다.

데치아노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교회를 떠났다.

 

이들을 받아들이는 문제가 3세기에 가장 큰 논쟁점이 되었으며,

이것 때문에 교회가 고해성사를 발전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노바투스는 치프리아노가 주교로 선출되는 것을 반대했던 사제로서

 치프리아노의 부재중에 스스로 나서서 일했으며

(그는 은밀한 곳으로 물러나서 교회를 이끌었는데 이것이 비난을 사게 되었다)

아무런 교회법적인 참회를 부과하지 않고 모든 배교자들을 받아 들였다.

결국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251년의 카르타고 공의회가 소집되었던 것이다.

이즈음에 그는 저 유명한 저서인 "교회의 일치"를 썼다.

그러나 노바투스는 로마로 가서, 치쁘리아노가 열렬히 지원하는

교황 고르넬리오를 반대하여 반교황이 되는 소동이 일어났다.

 

치프리아노는 중도의 입장을 취했는데 실제로 우상 숭배를 하던 사람들은

죽음으로써만이 친교를 회복할 수 있었으며,

반면에 우상 숭배를 했다는 증명서만을 산 사람들은 일정 기간의 참회 기간을 거친 후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것조차도 새로운 박해 동안에는 완화되었다.

 

252년~54년 카르타고에 흑사병이 만연하는 동안 치프리아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적과 박해자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도움을 주도록 촉구했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를 비난하였고, 또 격렬하게 항의까지 하였다.

이런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는 "윤리에 대하여" 란 책을 저술하였다

고르넬리오 교황의 친구인 그는 다음 교황인 스테파노를 반대했다.

치프리아노와 다른 아프리카 주교들은 이단자와 분리론자들이 행한 세례를 인정하지 않았다.

 

255년~56년에 열린 아프리카 회의는 이단자로부터 세례받은 사람들에게 재세례를 요구하는 결정을 내렸고,

치쁘리아노는 교황 스테파노와 신랄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보편적인 견해는 아니었지만 치프리아노는 스테파노의 파문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에게 추방당했고 그 후 재판을 받기 위해 소환 되었다.

 

그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순교를 목격해야만 한다는 주장과 함께 도시를 떠나기를 거부했다.

치프리아노는 친절과 용기, 격정과 인내를 함께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쾌활하고 진지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는 것인지 혹은 존경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는 세례 논쟁 동안 온화한 태도를 취했다.

그가 참회에 관한 논문을 쓸 당시에 자신의 감정을 염려했음에 틀림없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치프리아노가 영광스러운 순교로 자신의 분노를 속죄했다고 말했다.

 

그는 교회, 사목, 성서, 동정 그리고 배교자 문제에 관하여 수많은 신학 논문을 남겼다.

참으로 그는 크리스챤의 라틴 문학의 선구자로 추앙받을만 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학자 축일:8월28일*

 

 

그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가르침을 따를 수 있고

우익 또는 좌익의 어떤 과정에 의해서도 전환될 수 없는 가장 옳은 판단을 통해서

힘든 발전을 길을 가야만 했다.

 

You cannot have God for your Father if you do not have the Church for your mother....

God is one and Christ is one, and his Church is one; one is the faith,

and one is the people cemented together by harmony into the strong unity of a body....

If we are the heirs of Christ, let us abide in the peace of Christ;

if we are the sons of God, let us be lovers of peace.

 

"당신은 당신의 어머니를 위해 교회를 갖지 않듯이 당신의 아버지를 위해 하느님을 가질 수 없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며 그리고 그의 교회도 하나이다. 신앙도 하나이다.

사람은 모두 강력한 하나의 조직체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하나로 결합되어야 한다. …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상속자라면, 그리스도의 평화속에 머무르자.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아들이라면, 평화의 애호자가 되자."

(성치프리아노,’가톨릭교회의 일치’)

 

 

 

 

 

 

 

성 치쁘리아노 주교 순교자의 편지에서

(Epist. 60,1-2.5: CSEL 3,691-692. 694-695)

 

열렬하고도 확고한 신앙

 

나 치쁘리아노는 고르넬리오 형제께 문안 드립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여, 우리는 귀하께서 신앙을 용맹히 또 영광스럽게 증거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귀하께서 보여준 영예로운 신앙 고백의 소식을 큰 기쁨으로 접수하고서

우리 자신마저도 그 공로와 그 영예의 동참자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또 한마음 한뜻을 이룬다면,

동료 사제가 칭송받는 것을 보고 마치 자기가 칭송받는 듯 즐거워하지 않을 사제가 있겠습니까?

또는 형제의 기쁨을 보고 함께 기뻐하지 않을 형제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보여 준 용기의 증거 소식을 듣고 또 형제들이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

귀하께서 그들의 지도자로 거기 계셨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큰 기쁨과 마음의 용약을 느꼈는지

이루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지도자로서의 귀하의 신앙 고백은 모든 형제들의 신앙 고백으로써 한층 더 찬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귀하께서는 다른 이들을 영광의 길에 앞세움으로써 많은 형제들을 같은 영광에로 인도해 주었으며

또 귀하께서 다른 이들에 앞서 가장 먼저 신앙 고백을 함으로써 온 백성에게도

같은 신앙을 고백할 것을 설득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의 열렬하고도 확고한 신앙과 형제들의 갈림 없는 사랑 가운데

무엇을 칭송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서 온 백성의 지도자인 주교의 용맹이 환히 나타나고

그들 따라가는 신자들의 연대성도 잘 드러났습니다.

한마음 한 목소리가 된 여러분 안에서 로마의 온 교회가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여, 바울로 사도가 극구 칭찬하셨던 여러분의 신앙은 이렇게도 찬란히 빛났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여러분의 용기와 불굴의 기백을 미리 내다보셨고,

여러분이 장차 거둘 공로를 전하셨으며, 부모들을 칭찬하시면서 자녀들을 독려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도 완전한 화목과 용맹으로

다른 모든 형제들에게도 용기와 일치의 좋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여, 주님은 당신의 섭리로써 시련의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우리에게 훈계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우리에 대한 배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 시련에 대해 필요한 권고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는 상호 사랑의 일이므로 서로 도와주며

모든 백성과 함께 단식과 밤샘과 기도 안에 항구하도록 합시다.

이것들은 우리를 용감히 서 있게 하고 인내하도록 도와주는 천상의 무기들입니다.

이것들은 영신적 방어체이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거룩한 활들입니다.

화목과 영적 사랑 안에서 서로 기억해 주고 서로서로를 위해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며

서로의 사랑으로 우리의 고통을 가볍게 하도록 합시다.

 

 

 

 

 

 

성 치쁘리아노 주교의 순교에 관한 「총독의 기록문」에서

(Acta, 3-6: CSEL 3,112-114)

 

이렇게 명백한 사태에서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9월 14일 아침 갈레리우스 막시무스 총독의 명에 따라 세스티에는 큰 군중이 모여들었다.

총독은 그날 사우치오루스라고 하는 총독 관저로 치쁘리아노를 끌어내라고 했다.

치쁘리아노 주교가 그 앞에 대령했을 때 갈레리우스 막시무스는

그에게 "네가 타시오 치쁘리아노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치쁘리아노 주교는 "네, 그렇습니다."고 대답했다.

총독이 "너는 그 불경한 자들의 집단에서 지도자로 일해 왔는가?" 하고 묻자,

"그렇습니다." 하고 치쁘리아노 주교는 대답했다.

총독이 다시금 "거룩한 황제들께서는 네가 제사를 바치도록 명령을 내리셨다."고 말하자,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고 그는 대답했다.

"그럼 잘 생각하라." 하고 총독이 권고하자 치쁘리아노 주교는 "귀하가 명을 받은 대로 하십시오.

이렇게 명백한 사태에서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총독은 잠시동안 자문관들과 판결에 대해 상의한 후 마지못해 이렇게 말했다.

"너는 오랫동안 불경한 자세로 살아왔고 또 네 주위에 많은 범죄자들과 미신자들의 무리를 끌어 모았으며

로마의 제신들과 그분들께 바치는 예배 의식에 적대감을 드러내 왔었다.

그리고 경건하고 거룩한 군주들인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및

공경하올 발레리아누스 황제도 너를 공식적 예배에로 되돌이킬 수 없었다.

너는 엄청난 죄과의 장본인이요 그런 범죄를 충동한 자로서 네 죄에 가담한 자들의 표본이 되었다.

그래서 네 피로써 법 기강이 존중되어야 하겠다."

이 말을 끝내자 총독은 자기 자리에서 큰소리로 다음 판결문을 낭독했다.

"타시오 치쁘리아노를 참수형에 처하기로 결의한다."

이때 치쁘리아노 주교는 "천주께 감사." 하고 말했다.

 

선언문이 떨어지자 형제들의 무리는 "우리도 그분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싶습니다."

하고 부르짖어 형제들 가운데 큰 소동이 일어났고 거대한 군중이 그를 따라갔다.

이렇게 치쁘리아노는 세스티 평야로 끌려갔다. 거기에서 망토와 모자를 벗고는

땅에 무릎을 꿇고 겸손되이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나서 달마티카를 벗어 부제들에게 건네주고 다만 아마포로 만든 속옷만을 걸치고

형 집행인을 기다렸다.

 

형 집행인이 도착했을 때 치쁘리아노는 형제들을 보고 그에게 금 스물 다섯 냥을 주라고 했다.

형제들이 그 앞에 아마포 천과 수건을 깔았다.

그리고 나서 복된 주교는 수건을 가지고 눈을 자기 손으로 가리려고 했으나 매듭을 묶지 못하자

사제 율리아노와 차부제 율리아노가 매듭을 매주었다.

이렇게 하여 복된 치쁘리아노는 죽음을 맞았다.

 

그의 유해는 이교도들의 호기심에서 보호하고자 그 근처에다 놔두었다.

밤중에 거기에서 촛불과 횃불을 밝혀 들고 기도 가운데 장엄히 수영장 옆 마팔리우스 거리에 있는 조

달관 마크로비우스 칸디디아누스 소유의 묘 터로 유해를 옮겨갔다.

며칠 후 갈레리우스 막시무스 총독은 세상을 떠났다.

복된 치쁘리아노는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 황제 치하에서,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가운데 9월 14일 치명했다.

그분께 영예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으소서. 아멘.

 

 

 

 

 

교회 내에 이단 사설(異端邪說)이 성행하고 신앙에 대해 압박 내지 박해 하는 등 내우외환이 있을 때엔,

기이하게도 태평 무사할 때 보다 더욱 훌륭한 성인이 나타나 교회 위신을 회복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현양하는 것이 상례이다.

이는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것으로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에는 다만 감탄할 따름인데

251년에 로마 황제 데치오 때 일어난 잔혹한 박해 하에 북 아프리카에 위대한 교부(敎父)가 나타나

신자들을 인도하고 그 신앙을 옹호했다.

이 분이 바로 타쉬우드 체칠리우스 치프리아누스라는 성스러운 주교이다.

 

그는 200년경 부유한 이단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천부적인 재주가 있으므로

당시의 상류 자제들의 관습에 따라 수사학을 공부해 변호사가 되고,

가문도 매우 번창하여 마음대로 명예와 재산과 쾌락을 즐길 수가 있었으나

웬일인지 마음의 불안에 대해 어찌할 줄 몰랐다.

그는 세속만물의 허무함을 깨닫고 정신적 방면으로 마음을 돌리려고 금욕과 극기를 해 보았으나

원체 방종으로 흐른 몸이라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고 결국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46세 때이다. 그는 경험도 풍부하고 식별력이 능한 첼리치오 신부를 만나 사귀게 되고,

그의 지도로 그리스도교를 연구했던 바

이 종교야말로 가지 마음에 평화를 주는 종교라고 좋아하며, 246년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회개를 증거하기 위해 거액의 재산을 대부분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

정결의 서원을 발하여 깨끗한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교 철학자의 서적을 탐독하던 것을 중지하고 이제는 성서와 바오로의 서간경,

그리고 테르툴리아노의 호교론을 연구하여 상당한 신학지식을 얻었다.

그래서 그는 얼마 후 사제 서품을 받고, 248년 주교 도나토의 서거를 계기로

일반 신자들의 열렬한 추천을 받아 그 후임으로 가르타고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의 감탄할만한 완덕의 생활은 될 수 있는 대로 감추고자 했으나,

결국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게 되었다.

 

카르타고 교구의 각 교회는 수십 년 동안 박해를 받지 않았음인지,

신자들의 신앙에 대한 열의가 없었으므로 이를 근심한 치프리아노는

이를 바로 잡고자 솔선 수범하여 신자들에게 좋은 표양을 주고 때로는 엄격한 책망도 했으나

아무 효과도 내지 못하고 도리어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던 중 250년 데치오 황제의 대 박해가 일어나자 냉담한 신자들은 기다린 듯이

서로 앞을 다투어 관가에 가서 배교한다는 것을 신고했다.

정말로 한심한 노릇이었다. 이것을 본 치프리아노 주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비통한 눈물로 여러 날 잠을 이루지 못했으리라.

 

그는 이런 배교자들의 죄악을 홀로 걸머지고 순교로써 생명을 하느님께 바쳐 속죄를 하고자 했다.

그런데 사제들은, "주교님까지 안 계시면 그야말로 카르타고 교회는 전멸입니다.

제발 주교님은 피신하시어 남은 양들을 보살펴 주십시오"하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치프리아노는 이 말에 하느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믿고 카르타고 근처에 피신처를 정하여

이를 근거지로 무식한 신자들을 가르치며

옥중에 있는 신자들을 몰래 방문하여 위로하고 격려도 해 주었다.

 

일시적으로 박해가 두려워 배교한 이들도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교회에 돌아오기를 바랐으나,

그들은 죄에 대하여 규정된 보속을 면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자의로 하는 수작이고, 어디까지나 정의에 입각해서

교회를 다스려 나가는 주교가 그런 비겁한 청을 허락할 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주교는 교리를 밝히고 그 부당함을 나무랐더니,

펠리시시모라는 한 배교자는 이에 큰 불만을 품고 수명의 사제들과 합세해 주교를 배척하고

이교회(離敎會)를 세우게 되었다.

 

한편 데치오의 박해는 잔인 무도했으나 1년만에 종식되었으므로 주교도 카르타고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 후 치프리아노는 전력을 다해 교회 부흥을 위해 노력하고 위의 이교회를 멸망시키고

신자들의 신심 생활에 활기를 띠게 했다.

이러한 혁신을 함에 있어 그는 항상 로마의 성 베드로의 계승자와 정신을 심어 주었다.

"그리스도의 정배인 교회를 모친으로 받들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참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는

그의 말을 보아도 그의 교회에 대한 신뢰심이 얼마나 두터웠던가를 가히 알 수 있다.

 

252년에는 카르타고 및 그 부근에 악성 페스트가 유행해 신음하는 환자의 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치프리아노는 이때야말로 자선의 좋은 기회라 생각해 이 구제 사업에 나서서

신자를 권면하여 배교한 자이건 아니건 구별없이 간호해 주고,

혹은 그 시체들을 매장하는 등, 원수를 사랑하는 그리스도교적 정신을 보여 주었다.

그밖에 누미디아에 침입한 민족이 포로로 데려간 많은 로마인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거액의 보상금을 보내준 것은 역시 그의 위대한 애덕의 표현이었다.

 

데치오 황제의 박해후 교회가 형화를 누리기를 불과 6년만에 다시 교회 탄압의 마수는 뻗쳐졌다.

즉 그리스도교를 관대하게 취급하던 발레리아노 황제가

중신 마클리아노의 말을 듣고, 257년에 새로 금교령을 내리고

이번에는 특별히 성직자급을 목표로 하여 교회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치프리아노 주교도 즉시 체포되어 클루비스라는 곳에 유배가게 되었으나,

그 해 9월 14일 법관 갈레리오에게 재판을 받았다.

그리고 배교 명령에 불복종함으로 인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를 전해 들은 신자들은 비통의 눈물을 흘리며 "우리도 주교님과 같이 데려가라"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이것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치프리아노 주교를 존경했는가를 알 수 있다.

 

곧 그는 형장으로 끌려나갔으나 마치 고향으로 가는 사람과 같이 안면에는 희색이 가득했다.

그는자기 목을 벨 형리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금화 25매를 주고 어느 사제와 부제에게

자신의 눈을 가리게 하고 손을 잡아달라고 부탁하며 형리의 휘두르는 칼에 태연히 순교를 했다.

때는 258년 9월 14일이었다.

신자들은 그 이튿날 밤에 횃불을 들고 성가를 부르며 장엄한 행렬을 지어 성인의 유해를 운반하여

카르타고 근교에 있는 묘지에 정중히 안장했다.

 

 

 

 

 

 

The Virgin Mary - EL GRECO.

1594-1604.Oil on canvas, 52 x 41 cm.Museo del Prado, Madrid

 

 

9월 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Feast of Our Lady of Sorrows

Beata Vergine Maria Addolorata
Maria = amata da Dio, dall'egiziano; signora, dall'ebraico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인 오늘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세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을 마음에 되새기고,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아드님과 함께 수난하시는" 어머니를 기념하는 날로,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에 마리아의 고통을 기념한다.

 

성모님께서는 "당신 외 아드님과 함께 심한 고통을 당하셨고

아드님의 제사를 모성애로써 함께 바치셨으며 당신이 낳으신 희생자의 봉헌을 사랑으로 동의하셨다"(교회헌장 58항).

사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잉태하신 순간부터 일생을 고통 속에서 사셨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므온의 예언에서부터, 이집트 피난, 12세의 아들 예수를 잃고 3일을 근심 속에서 찾아 헤매던 일,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숨진 아들을 안고 통곡하는 등 일생을 예수님의 길을 뒤따르며 어머니로서 아드님의 고통에 함께 동참하셨다.

그래서 성 베르나르도는 성모님의 이러한 삶을 "정신적 순교"의 삶이라고 하였다.

교회는 예수님과 함께 고통을 받으시고 오늘도 우리의 죄로 인해 고통 받으시는 어머니의 고통의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이 축일을 제정하였다.

 

이 기념일은 그 기원이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011년 독일 파다본(Paderborn) 부근의 십자가 곁에 계시는 마리아에게 봉헌된 경당이 발견된다.

고통받은 동정녀께 대한 신심은 12,13세기 프란치스코 수도회 전통에서 발견된다.

이어서 두 가지 축제가 통고의 마리아를 기리기 위해 생겨났다.

하나는 마리아의 시종회에서 9월 셋째 주에 거행하였다. 이것은 교황 비오 7세(1814)에 의해 모든 교회에 보급되었다.

비오 10세는 주님의 십자가 현양 다음날인 9월 15일로 날짜를 확정하였다.

또 다른 축제는 쾰른 시노드에서 제정된 것이다(1423).

십자가와 그분의 어머니에 대한 성화를 못마땅하게 여긴 성당 파괴자 우씨티(Ussiti)들로부터 당한 신성모독 행위를 보상하는 차원에서 세워진 것이다.

 

축제는 1727년 모든 교회에 퍼졌다. 무엇보다 마리아의 시종회원들의 노력 덕분이다.

이 축제는 성지주일 전 금요일에 거행되었으며, 1969년 로마 전례 개혁은 두 가지 축일을 하나로 합쳤다.

마리아께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음을 드러낸다.

즉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깊이 참여하였음을 드러낸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한 결정적 사건을 재확인하게 한다.

 

*원죄없으신 성모기사회에서 http://www.mikorea.or.kr

 

 

Our Lady of the Seven Sorrows-ISENBRANT, Adriaen.

1518-35.Panel.O.L.Vrouwekerk,Bruges

 

성모님의 고통-성모칠고

 

1. 우리들의 삶은 피하고 싶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언뜻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그 속내를 들여야 보면 나름대로의 고통 속에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통은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멍에입니다. 고통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경중(輕重)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누구에게나 고통은 있고, 자신의 고통이 다른 누구의 고통보다도 크고 무겁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2. 성모님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계속되는 고통의 삶을 사셨습니다.

 

성모님이라 해서 삶의 고단함으로부터 예외인 존재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성서에도 예수님으로 인해 받았던 성모님의 고통이 여러 장면 등장하는데, 이중 일곱 가지 장면을 모아 성모칠고(聖母七苦)라 부르고 있습니다.

 

① 시메온의 예언(루가2,35) -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것입니다.

② 에집트로 피신하심(마태2,14) - 그 밤으로... 에집트로 가서... 거기서 살았다.

③ 성전에서 삼일 동안 예수를 잃으심(루가2,48) -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④ 예수, 골고타 갈바리아로 오르심(요한19,17) -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와 만나심

⑤ 예수,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심(요한19,25) -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가 서 있었다.

⑥ 예수, 십자가에서 내리심(요한19,40)

⑦ 예수, 무덤에 묻히심(요한19,42)

 

*성모 칠고 묵주기도*

 

 

3. 그런데 성모님의 고통이 우리에게는 희망이 됩니다.

 

당신이 겪으셨기에 우리를 위로해 주리라 희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아들 예수가 죽는 모습까지도 지켜보신 분입니다.

불효중의 불효는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일이고, 고통중의 고통은 자신보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부모의 고통입니다.

그런데 성모님은 아들의 손과 발에 못이 박히는 처참한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보셨고,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까지 십자가 아래에서 함께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성모님이 이 같은 고통을 겪으셨기에 우리가 겪는 어떤 고통도 모두 이해해주실 수 있습니다.

성모님이 이 모든 고통을 이겨 내셨기에 우리의 고통도 이겨내도록 도와주십니다.

 

4. 그러니 삶에서 고통을 느낄 때 성모님께 기도하십시오.

 

당신께서 겪으셨던 그 고통을 이제 나도 겪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당신께서도 이미 겪으셨으니 제발 나를 위로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당신의 따뜻한 사랑으로 나를 이 고통의 폭풍 속에서 건져달라고 애원하십시오. 어머니께서는 간구하는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리아동산에서 http://www.maria21.net

 

 

Mater Dolorosa(with clasped hands)-TIZIANO Vecellio.

1550.Oil on canvas,68 x 61cm.Museo del Prado,Madrid

 

십자가 현양(9월14일)을 기리는 다음난 통고의 성모란 뜻을 지닌 돌로로사를 기념한다.

십자가 밑에서 아드님을 희생제물로 바치신 마리아는 주님의 부활에 특이하게 참여 하신것 처럼

그 수난에도 그렇게 참여하셔서 자신의 승천 때보다는 더 어머니시였다.

 

칼날이 그 마음을 찌른 것도 예수님의 찔린 옆구리에서 신비체의 모든 지체에 모성이 끼어든 것도 십자가 밑에서였다.

티없는 잉태와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때와 같이 예수와 함께 수난하신 고통에 있어서도 마리아는 교회의 상징이시다.

 

세기를 통해서 이세상 어디서나 고통받는 그리스도의 수난은 계속되기 때문에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하면 그분과 함께 부활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도록 불린 것을 영광으로 알고 기쁘게 져야할것이다.

 

 

 

성모마리아의 고통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았던 슬픔과 고통을 말합니다.

성모 통고는 예수님의 구세사적인 수난과 죽음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성모 통고에 대한 신심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서 있었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또한 성모마리아가 아기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러 갔을 때 예언자 시메온이 성모님의 마음이 날카로운 칼에 찔리듯 괴로움을 받게 되리라는 예언에도 근거합니다.

 

성모통고에 대한 신심은 6세기에 동방에서 먼저 발달되어,여러 예술 작품을 통해 이를 표현 해 왔습니다.

서방에서는 12세기에 시작되어 이 신심을 목적으로한 성모 마리아의 시녀회가 창립(1233년)되면서 이 신심이 본격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성모 통고의 숫자는 처음에는 확정되지 않았는데 성모 칠락과 연관되어 칠고로 고정되었는데 이는 쿠덴베르크의 사제였던 요한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聖母七樂:

1. 領報 2.엘리사벳방문 3.예수탄생 4.예수공현 5.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으심 6.예수부활 7.성모승천

 

 

성모고통의 기념일은 16세기 세르비트회가 주창한 성모통고 신심에서 시작된 것으로 9월 셋째주일에 미사와 행렬을 하는 것이 1600년 경에는 대중화 되어,

1668년 교황 복자 인노첸시오 11세에 의해 축일로 인가 되었습니다.

1814년 교황 비오 7세가 이 축일을 전교회로 확장시켰으며, 1908년 교황 성 비오 10세가 축일의 등급을 높였으며 1913년 부터는 9월 15일로 고정 되었습니다.

 

 

The Seven Sorrows of the Virgin-DURER, Albrecht.

c.1496. Oil on panel,Alte Pinakothek,Munchen and Gemaldegalerie, Dresden

 

부속가

11. 주예수님 높이달린, 십자곁에 성모서서, 비통하게 우시네.

12. 섧고슬픈 성모성심, 수난칼에 깊이찔려, 참혹하게 뚫렸네.

13. 여인중에 복된성모, 독생성자 수난하니, 그고통이 크시네.

14. 아들수난 보는성모, 맘을에는 비통중에, 하염없이 우시네.

15. 예수모친 이런통고, 받으심을 보는우리, 누가울지 않으리?

16. 십자가상 아들함께, 고통받는 성모보고, 누가통곡 않으리?

17. 아들예수 우리죄로, 채찍모욕 당하심을, 애처로이 보시네.

18. 기진하여 버려진채, 죽어가는 아들보고, 성모슬피 우시네.

19. 사랑의샘 성모시여, 저에게도 슬픔나눠, 함께울게 하소서.

10. 제마음에 주예수님, 사랑하는 불을놓아, 타오르게 하소서.

11.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맘속에 주님상처, 깊이새겨 주소서.

12. 저를위해 상처입고, 수난하신 주님통고, 제게나눠 주소서.

13. 사는동안 주님함께, 십자고통 아파하며, 참아받게 하소서.

14. 성모따라 십자곁에, 저도서서 한맘으로, 슬피울게 하소서.

15. 동정중의 동정이여, 괴롬슬픔 나누시어, 저도울게 하소서.

16. 예수님의 죽음수난, 깊은상처 마음새겨, 우러르게 하소서.

17. 아들상처 저도입고, 십자가위 흘린피로, 흠뻑젖게 하소서.

18. 정결하신 동정성모, 심판날에 저를지켜, 영벌면케 하소서.

19. 그리스도 수난공로, 은총으로 돌보시고, 저를길러 주소서.

20. 제가죽어 세상뜰때, 천국영광 주예수님, 만나뵙게 하소서.

 

-오늘의 말씀에서-

 

 

Pieta - UNKNOWN MASTER,German.c.1400.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강론에서

(Sermo in dom. infra oct. Assumptionis, 14-15: Opera omnia, Edit. Cisterc. 5[1968], 273-274)

 

당신의 어머니께서 십자가 곁에 서 계셨다.

 

동정 마리아의 순교가 시므온의 예언과 주님의 수난기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경건한 노인 시므온은 아기 예수께 대해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될 것입니다." 하고 말하고

마리아께는 "예리한 칼이 당신의 영혼을 찌를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복되신 성모여, 예리한 칼이 당신의 영혼을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칼이 당신의 영혼을 찌름 없이는 당신 아드님의 육신을 꿰뚫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의 것이지만 특별히 당신의 것인 아들 예수께서 숨을 거두신 후, 그 잔혹한 창은 그분의 영혼에 가 닿을 수 없었습니다.

실상 그분이 죽임당하신 후 불능의 상태에서마저 마냥 두지 않은 그들이 그분의 옆구리를 펼쳐 놓았을 때,

그분께 고통을 줄 수 없었지만 당신께는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창은 당신의 영혼을 찔렀습니다. 그리스도의 영혼은 더 이상 거기에 계시지 않았으나 당신의 영혼은 거기서 떨어져 나오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영혼은 고통의 창으로 찔리었기에 우리는 당신이 순교자들을 능가하시는 분이라고 마땅히 일컫습니다.

당신 아드님의 수난에 참여함은 그 강렬함에서 순교의 모든 육체적 고통을 능가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는 그때 그 말씀은

당신의 영혼을 창으로 찌르고 당신의 영혼과 마음을 갈라놓을 정도로 깊숙이 들어간 칼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오, 놀라운 교환이여! 당신은 예수님 대신에 요한을, 주인 대신에 종을, 스승 대신에 제자를,

하느님의 아들 대신 제베대오의 아들을, 참 하느님 대신에 일개 인간을 받으셨습니다.

그 말씀을 기억할 때 돌이나 쇠보다 더 굳은 우리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지는데, 하물며 그 말씀은 당신의 섬세한 영혼을 찌르지 않았겠습니까?

 

형제들이여, 마리아께서 영신의 순교자가 되셨다는 말을 들을 때 놀라지 마십시오.

그 말을 듣고서 이방인이 지닌 최대의 결점 중에 하나는 동정심이 없는 점이라고 사도 바울로가 지적한 것을 잊어버리는 사람만이 놀랄 것입니다.

마리아께는 물론 그런 결점이 없었고 또 마리아를 섬기는 이들에게도 그런 결점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누군가가 "마리아께서 당신 아드님이 죽으셔야 한다는 점을 미리 알고 계시지 않았겠는가?" 하고 물어 볼지 모르겠습니다.

네,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아드님께서 즉시 부활하시리라는 확실한 희망을 갖고 계시지 않았겠는가?"

물론 갖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마리아는 슬픔을 느끼셨겠는가?"

더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셨습니다. 그런데 형제여,

마리아의 아드님이 느끼신 슬픔 자체에 대해서보다 그 수난에 참여하신 마리아의 고통에 대해 더 놀라는데

당신은 도대체 누구이고 무슨 판단을 가지고 있길래 놀랍니까?

아드님께서 육신으로 죽으실 수 있었다면 마리아께서는 영신으로 그 죽음에 참여할 수 없으셨겠습니까?

 

아드님은 다른 어떤 사람의 사랑보다 더 위대한 사랑으로 죽임을 당하셨고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를 제외한 다른 어는 누구의 사랑에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으로 그 죽음에 참여하셨습니다.  

 

 

 

Mater Dolorosa - QUELLIN, Artus I.1650.Polychrome wood.Sint-Jacobskerk, Antwerp

 

성모 통고

 

교회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낸 다음 날에 성모 통고 축일(9월 15일)을 지낸다.

이렇게 마리아 어머니의 고통을 지내는 신심은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복음서에 근거하고 있고, 또 이 축일은 풍성한 영신적 이익을 가져다 주고 있다.

 

1. 복음서의 근거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가 서 있었다"(요한19,25).

마리아 어머니가 갈바리아에서 함께 자리하신 것은, 예수를 성전에 봉헌할 때 성령이 시메온으로 하여금 예언하게 한 그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 있었다.

그때 시메온은 이렇게 예언하였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루가2,35).

 

복음서를 보면 우리는 마리아의 다른 고통들도 익히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를 낳을 때 큰 불편을 겪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혔다"(루가2,7).

베들레헴의 아기 학살 사건이 있었다(마태2,16-18). 3일 동안이나 예수를 걱정하며 찾아다녔다(루가2,41-50).

나자렛 주민들이 아들 예수를 들고 일어나 동네밖으로 끌어냈고,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 하였다(루가4,28-30).

그 후 예루살렘의 율법 학자들로부터도 같은 곤욕을 치루셨다(루가11,53-54, 19,47-48 등등). 그 외에도 수난 기사들이 있다.

 

바오로 6세는 "마리아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의 신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계시며, 야훼의 고난받는 종의 어머니로서 고통을 당하셨다"고

마리아의 고통을 이사야 53장을 암시하면서 설명하셨다(마리알리스 꿀뚜스 7).

 

 

 

2. 마리아의 연민

마리아와 함께 십자가 밑에 서 있으려는 것이 옛 신자들의 기도이자, 기도의 이상적인 모델이었다.

4-5세기에 걸쳐서 살았던 "사막의 교부" 포에멘 원장은 오랜 탈혼에서 깨어난 뒤에 이렇게 혼자말을 하였다:

"내 영혼은 구세주의 십자가 밑에서 울고 계시는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와 함께 있었습니다.

나 역시 마리아 어머니와 함께 흐느껴 울고팠습니다."(APOTHEGMA 144).

 

4세기의 성 에프렘 시리아 사람은 예수의 십자가 밑에 서 계신 마리아의 애가를 썼는데, 이 마리아 애가는 성 토요일 저년 기도에서 지금도 불려지고 있다(시리아 전례).

500년경의 성 로마노 작곡가는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마리아 찬가"를 썼는데,

이 찬미가 속에는 예수께서 당신 모친에게 고개를 돌려 십자가의 신비를 설명하신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서방 교회의 대성인들도 마리아의 고통을 묵상하고 가르쳤는데, 그들 중에서도 성 암브로시오와 안셀모 그리고 베르나르도가 가장 돋보이는 인물들이다.

이 영성의 주제(통고)는 13세기에 이르러 아주 보편적이고 대중적으로 보급되었는데, 특히 프란치스코회 설교자들과 성모의 종 수도회들의 공로가 가장 크다.

이 시대의 성모 통고 신심을 알려 주는 좋은 시는 야꼬뽀네 다 또디(+1306)가 강렬한 슬픔을 표현한 "마돈나의 비애"가 있다:

 

오 아들아, 네 영혼이 널 떠났구나,

오 아들아, 기가 죽었구나,

오 아들아, 멀어져 가는구나,

오 아들아, 힘이 쇠하였구나!

오 아들아, 붉고 흰 피로 목욕하였구나.

오 아들아, 비할 데 없구나,

오 아들아, 난 누구에게 가야 하리?

오 아들아, 너는 날 떠났구나!

 

이러한 분위기는 중세기 성모 신심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이었는데,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성자 곁에서 그 모친 마리아도 함께 수난하였다"는 사상이 짙게 깔려 있는 성시이다.

이어서 나온 시가 저 유명한 "십자가길의 성모"(STABAT MATER)이다. 그리고 11세기에 나온 "그리스도의 생애 묵상"이란 책에서 보편화되어 알려진,

소위 "성모님의 발작설"은 서서히 사라졌고 또 교황과 신학자들도 이를 인정치 않았다.

 

 

 

3. 마리아의 통고

마리아 통고 신심은 14세기 초에 나타났다. 이런 신심을 크게 보급시킨 분은 아마도 헨리코 수소(1295-1366) 성인인 듯 하며,

이 밖에도 도미니코회 라인강 주변의 신비가들의 공로가 크다고 한다. 갈바리아의 중심 장면에서부터 수난 전체로 묵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즉 예수님의 체포에서부터 장례 때까지를 묵상하던 중에 이 신심이 표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신비가들은 먼저 "마리아의 다섯 가지 기쁨"을 대중적인 신심으로 보급시킨 뒤, 성모님의 다섯 가지 고통 신심을 전파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나중에는 성모 칠고로 발전되었다. 성모 칠고 묵상은 두 가지 형태가 있다.

 

마리아의 통고 내용은 예수님의 수난 내용과 같다. 예수의 수난이 곧 마리아의 수난이었다.

1. 예수, 체포되시고 매맞으으심을 묵상합시다.

2. 예수, 빌라도에게 끌려가 재판받으심을 묵상합시다.

3. 예수, 사형 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4. 예수,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묵상합시다.

5. 예수, 숨을 거두시고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을 묵상합시다.

6. 예수, 십자가에서 내리움을 묵상합시다.

7. 예수, 베로 감아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합시다.

 

그러나 복음서 전체를 보아서 예수의 어린 시절이 포함된 "성모 칠고"도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시메온의 예언.

2. 무죄한 어린이들의 학살과 에집트 피신.

3. 예수, 예루살렘에서 잃어버리심.

4. 예수, 체포되시고 재판 받으심.

5. 예수,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심.

6. 예수, 십자가에서 내리움.

7. 예수, 베로 감아 무덤에 묻히심.

 

이 신심의 또다른 변형은 당신 아들이 생활하시고 활동하시다가 사형당하신 곳을 찾아보시는 "성모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이다.

이 신심은 야고보 데 보라지네의 "황금 전설’에 따른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성모 칠고" 신심은 14세기에서 보편화되었고, 또 수많은 묵상과 기도를 그리고 시들이 쏟아져 나와 이 신심을 더욱 고취 시켰다.

물론 성모 칠고를 그린 회화와 성상들도 제작되었는데 저 유명한 "피에타"는 곧 이 신심의 영향으로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1464년초, 도미니꼬 회원인 앙렝이 "동정 마리아의 새로운 시편"(매일 성모송 150번 바치는 기도)을 전파하고 다닐 때,

그는 성모성 50번마다 우리 주님의 수난과 당신 모친의 통고 그리고 최후의 만찬부터 장례까지를 묵상의 주제로 추천하였다.

1475년에 쾰른에서 처음 생겨난 로사리오회는 "다섯 가지 통고"가 포함되어있는 15가지 신비 목록을 만들어 묵상토록 하였다.

위의 "다섯 가지 통고"는 게쎄마니의 비애, 매맞으심, 가시관을 쓰심, 십자가 지고 가심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다.

 

1482년, 플란델의 교구 사제인 요한 드 쿠당베르그는 아래와 같은 형식으로 성모 칠고를 묵상하도록 가르쳤다:

1. 시메온의 예언(루가2,34-35).

2. 에집트로 피신하심(마태2,13-21)

3. 삼일 동안 예수를 잃으심(루가2,41-50).

4. 갈바리아로 오르심(요한19,17).

5. 예수, 십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심(요한19,18-30).

6. 예수, 십자가에서 내리심(요한19,39-40).

7. 예수, 무덤에 묻히심(요한19,40-42).

이 신심은 오늘날 "성모 통고회"가 보전하고 있고, 또 교황의 승인도 받았다.

 

 

 

4. 영성

구세주 예수의 수난에 대한 성모 마리아의 동참은 성서 신학이 다시금 활력을 불어넣어 준 마리아 영성의 중요한 일면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마리아를 "죄에 떨어진 원조에게 약속된 뱀에 대한 승리 속에 이미 예언적으로 그 여인의 모습이 암시되어 있는"(교회 55) 여인,

그리고 "시온의 훌륭한 딸"(교회 55)로 부르고 있으며, 바오로 6세께서는 주의 봉헌을 언급하시면서, 마리아를 "옛 이스라엘의 사명을 완수하신 분이자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의 모델"(마리알리스 꿀뚜스 7)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갈바리아의 마리아는 "하느님의 일을 완수하신"(참조. 요한 19,30) 성자의 수난으로 그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팠던 것이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스라엘과 교회 모두를 위해 "해산의 고통과 괴로움 때문에 울고 있었다"(묵시 12,2).

 

성서적인 이런 입장에서 보면, 마리아의 기쁨과 고통(신적 모성과 십자가의 고통)은 마리아와 교회에 대해 불가분의 성격을 띄는 것이다.

그러므로 9월 15일, 성모 통고의 전례는 사도 바오로의 다음 말씀을 상기시키는 중요한 신심이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 1,25).

 

그리고 성모 통고 축일의 본기도는 다음과 같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당신 성자 곁에서 그 모친 마리아도 함께 수난하게 하신 천주여,

당신 교회로 하여금 성모와 함께 그리스도의 수난을 나눔으로써 그 부활에도 참여케 하소서. 성부와..."

 

-성바오로수도회에서 http://www.paolo.net

 

 

 

Mater Dolorosa - MEMLING, Hans.

1480s.Oil on wood, 55 x 33 cm.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시라는 존엄한 지위에 계시니, 그 마음은 항상 환희에 가득 차 계실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는 큰 오해이다.

참으로 그녀는 비애의 어머니라고 불릴만큼 여러 가지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다.

이는 원조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저지른 이래 모든 인류의 죄악을 수난으로써 속죄하는 구세주의 대업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어머니로서

또는 모든 여성의 대표로서 협조하시고 고통을 나누시는 것이 당연하고 또한 필요했기 때문이다.

 

성모의 고통을 기억하기 위해 교회에서는 1년에 두 차례의 기념일을 정했다.

즉 사순절 중 성지 주일 후 금요일과 9월 15일이 그때인 것이다.

각 교회에 열심한 신자의 실정이나 교회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많은 신자들은 성모의 고통을 특별히 공경하고 위로해 드렸다.

이런 의미에서 봉헌된 무수한 성당이며 또는 화가, 조각가, 시인들의 걸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는 누구나가 일단 부모의 입장이 되면 그 자녀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까닭에 슬퍼함은 면치 못하는 것으로

우리 모두 통고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잘 공경하며 그 훌륭한 모양을 잘 따르고자 하는 것이다.

 

성 베르나르도는 슬퍼하시는 성모를 가리켜 "정신적 순교자"라 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예수께서 악인들에게 매질을 당하시고 요구를 당하시고 조소를 받으시고 멸시를 받으시는 이 모든 것이 직접 당신이

당하시는 것보다 오히려 더 뼈아프게 느꼈고,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에도 당신이 친히 죽는 것보다 더 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실제의 정신적 순교이다.

그러므로 성모께서 지금 천국에서 ’순교자의 모후’라는 존칭을 받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야코포네 더 토디의 작품인 성모 통고사 중에서 그 한 구절을 배우며 애통하시는 성모님의 희생심을 따르기로 하자.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