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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 성 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 축일 / 성녀 힐데가르다 /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주교 학자 기념일 +++

 

 

축일: 9월17일

성프란치스꼬의 거룩한 상흔 축일

San Francesco d’Assisi, Impressione delle Stimmate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사건은

육화와 수난을 통한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정도를 성 프란치스코에게 정확히 알려준 사건이며

동시에 성 프란치스코의 십자가에 대한 사랑이 극치를 이룬 사건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랑은 프란치스코로 하여금 그리스도화를 가능케 해 주었던 것입니다.

 

 

 

사부님의 오상 사건에 대해서는 성 보나벤뚜라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성 보나벤투라의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 13장 3항)

“그는 그리스도가 세라핌의 모습을 띠고 그토록 은혜 가운데 자기를 배려해 준 방법에 대해서 대단히 기뻤으나,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이 그의 영혼을 동정심으로 가득찬 비애의 칼로 찔렀던 것이다.

그는 이 기적적인 환시를 보고는 놀라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의 고통은

세라핌의 영원 불멸하고도 영성적인 본성과는 함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 환시가 사라지자 그것은 그의 마음을 열심히 불타오르게 하였으며

그의 몸에 기적적으로 그와 꼭 같은 것을 박아 놓았다.

그 때 거기서 그의 손과 발에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의 환시에서 본 것과 똑같이

못 자국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손과 발은 중앙이 못으로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못의 머리부분은 손바닥과 발등에 나 있었고,

반면 못 끝 쪽은 반대편 위로 튀어나와 있었다.

못 머리 부분은 검고 둥글었으나 그 끝은 마치 망치로 박힌 듯이 길게 뒤로 휘어 있었다.

그 부분은 주위의 살보다 튀어나와 있었다.

그의 오른쪽 옆구리는 마치 창으로 꿰뚫린 것 같았으며 검푸른 상처가 찍혀 있었는데,

자주 피가 흘러나와 그의 수도복과 바지가 피에 물들었다.”

 

*성 보나벤투라 축일:7월15일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

 

 

 

St. Francis Receiving the Stigmata - GRECO, El

1577-79.Oil on canvas.Walters Art Gallery, Baltimore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인 권고

13.인내

1)"평화의 사람은 복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태5,9)

하느님의 종은 일이 뜻대로 잘 될 때에는

어느 정도의 인내심과 겸손을 지니고 있는지를 본인 자신도 알 수 없습니다.

2)그러나 자기의 뜻을 받들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이 자신을 반대 할 때

그가 보여 주는 그 정도의 인내심과 겸손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 그 이상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Legend of St Francis: 19. Stigmatization of St Francis.

1297-1300.Fresco, 270 x 230 cm. Upp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십자가에 못박힌 세라핌을 닮은 모습의 환시(토마스 첼라노 전기 제1생애,제2부 3장)

 

94. 프란치스코가 자기의 영혼을 하늘에 되돌리기 2년 전,

그러니까 그가 알베르나 은둔소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하느님의 환시 안에서, 여섯 날개를 가진 세라핌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 하나를 자기 위에서 보았다.

그 사람은 두 손을 뻗고 있었으며, 두 발은 모아진 채 십자가에 고착되어 있었다.

날개 둘은 머리 위로 펼쳐져 있었고, 두 날개는 날으려는 듯이 펼쳐져 있었으며,

나머지 두 날개는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지존하신분의 복된 종은 이것을 보자 그만 감탄하였지만, 이 환시가 무엇을 뜻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너그럽고 인자한 세라핌의 모습에 그는 무척이나 즐거웠고 기뻤다.

그 천사의 아름다움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천사가 십자가에 못박혀 있다는 사실과,

그 찌르는 듯한 아픔이 차츰 프란치스코를 두려움으로 몰아갔다. 그러자 그는 일어섰다.

그는 이를테면 슬프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으며, 즐거움과 괴로움이 그 안에서 서로 교차하였다.

도대체 이 환시는 무엇을 뜻하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의 영혼은 그 뜻을 알아내려고 노심초사하여 괴로와하기에까기 이르렀다.  

 

이제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그 뜻을 정확히 알아낼 수가 없게 되었고,

그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환시가 성인의 가슴을 곤혹스럽게 만드는가 했더니,

그 못자국들이 성인의 손과 발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가 방금 전에 그의 위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에게서 본 그대로의 자국이었다.    

 

95. 그의 손과 발 한가운데가 못으로 뚫린 것 같았고, 못대가리가 손바닥과 발등에 나타났으며,

뾰족한 못끝은 반대편에 있었다.

손의 자국들은 손바닥 쪽에서는 둥글었고, 손등 쪽에서는 길어져 있었다.

손등 위로 밀려 솟은 작은 살점들은 못의 끝모양을 하고 있었다.

발에도 마찬가지로 못자국이 찍혀 있었고, 그렇게 비슷하게 딴 살보다 솟아 있었다.

또한 오른쪽 옆구리는 마치 창에 찔린 듯하였고,

그 상처로 피가 자주 쏟아져 나와 그의 투니카와 팬츠를 여러 번 물들였다.  

 

애석하여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의, 십자가에 못박힌 이종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의 옆구리에 있는 상처를 볼 만한 자격이 있었던 사람은 정말 한둘에 불과하였으니!

그가 살아 있을 때, 그 상처를 보기에 합당했던 엘리아는 행복하였다.

손으로 직접 만져 본 루피노 역시 행복하였다.

이 루피노 형제가 한번 거룩한 사람을 문질러 주려고 그의 가슴에 손을 댔을 때에

루피노의 손이 우연히 프란치스코의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가 보배로운 상처를 건드리게 되었다.

손이 닿자마자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은 몹시 고통스러워하면서 그의 손을 밀어냈다.

그리고 하느님께 루피노 형제를 용서해 주십사고 소리쳤다.  

 

프란치스코는 수도원 밖의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상처를 숨기기에 온갖 노력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측근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도 그것을 매우 세심하게 숨겼기 때문에,

항상 곁에서 헌신적으로 따르는 대부분의 형제들조차도 오랫동안 이 상처에 대해서 알지 못했었다.  

 

지극히 높으신 종이자 친구인 그는

자신이 마치 가장 값진 보석으로 꾸며지듯 많고 큰 진주로써 치장이 되어 있고,

신묘한 방법으로 딴 모든 사람의 영광과 영예 위에 안배되어 있음을 보았지만,

그는 마음이 우쭐해지지 않았으며, 또한 헛된 영광을 찾아서 남을 기쁘게 해 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의 호감이 그에게 주어진 은총을

조금이라도 앗아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으로 그 사실을 숨겼다.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Scenes from the Life of Saint Francis: 1. Stigmatization of Saint Francis - GIOTTO di Bondone

1325.Fresco, 390 x 370 cm. Bardi Chapel, Santa Croce, Florence

 

오상 축일은

성프란치스꼬가 천상 세계로 옮겨가기 2년전 라베르나에서 미카엘 축일(9월29일)을 준비하는

40일 기도를 하던 중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세라핌 환시를 보게 되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14일*

 

 

이 때 세라핌의 6 날개 가운데 십자가를 보았으며 환시가 사라진 뒤

성인께서는 뜨거운 열정으로 불타는 마음과 더불어 주님의 다섯 군데의 수난 상처가 각인 되어 고통을 느꼈다.

 

성프란치스꼬의 오상은 수난 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닮도록 자신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의미를 지니며

그리스도의 케노시스 즉 가난의 구체적 표지이며 성인의 일생을 극적으로 요약하는 사건인 것이다.

성프란치스꼬는 오상을 받음으로 완전한 해방 체험을 하게된다.

 

성인이 돌아가신 후 면밀한 조사를 거쳐 교회 법적으로 진실임이 선언되었고

1304년 베네딕도 11세가 축일로 제정하였으며

14세기말부터 프란치스칸들은 특별한 전례로서 이 날을 기념하고 있다.

 

Stigmatization of St Francis - GIOTTO di Bondone

1300.Tempera on wood, 314 x 162 cm.Musee du Louvre, Paris

 

성 보나벤뚜라가 쓴 성프란치스꼬의 소전에서

 

거룩한 오상을 통하여 프란치스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녔네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무렵의 어느 날 아침 그 산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불같이 빛나는 여섯 날개를 가진 세라핌이 하늘 높은 데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 천사는 빠른 날개 짓으로 하느님의 사람 프란치스꼬에게 가까이 와 공중에 떠 있었다.

이때 프란치스꼬는 그 천사가 날개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이 광경을 본 프란치스꼬는 매우 놀랐다. 그의 마음은 곧 환희와 비탄으로 가득 찼다.

그리스도의 이 은혜로운 출현이 그렇게 다정하고 경이로운 모습일 수가 없어서

말할 수 없이 강한 환희를 느꼈지만,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소름 끼치는 광경을 바라보고는

그만 영혼이 저미는 듯이 한없는 비탄과 연민을 느꼈다.

 

내밀하고도 다정한 대화 후 발현이 사라지자 그의 마음은 내적으로 세라핌과도 같이 활활 불타 올랐고,

그의 몸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각인 되었다.

즉시 그의 손과 발에 못 자국이 드러났다. 손등과 발등에는 못 머리가,

그리고 손바닥과 발바닥에는 못 끝을 볼 수 있었다.

오른쪽 옆구리는 창에 찔린 것 같았고 그 주위의 살은 벌겋게 충혈 되었고

그 상처로부터는 거룩한 피가 흘러내렸다.

 

프란치스꼬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새겨진

그리스도의 상흔에 대한 이 새롭고 탄복할 기적은 전 세기에는 결코 일어난 적이 없었다.

이렇게 그는 새사람으로 산을 내려왔다.

이제 그의 몸에는 예술가의 손으로 돌이나 나무에 새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손으로 새겨진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www.ofmconv.or.kr

 

 

Stigmatization of St Francis - GADDI, Taddeo.

Stained glass window.Cappella Baroncelli, Santa Croce, Florence

 

사도 바오로의 디모테오 1서 말씀입니다. 3,14-16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속히 가서 그대를 만나게 되기를 바라면서 이 편지를 씁니다.

만일 내가 늦어지더라도 그대가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이고 진리의 기둥이며 터전입니다.

우리가 믿는 종교의 진리는 참으로 심오합니다.

그분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성령이 그분의 본성을 입증하셨으며, 천사들이 그분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만방에 전해져서 온 세상이 그분을 믿게 되었으며, 영광 가운데 승천하셨습니다.

 

 

 

St Francis Receiving the Stigmata - MASTER of San Francesco Bardi
1240-50 Tempera on wood, 81 x 51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축일 : 9월 17일

성녀 힐데가르다

ST. HILDEGARD von BINGEN

Sant’ Ildegarda di Bingen

Kreuznach, castello di Bockekheim (Germania), 1098

- Bingen (Germania), 17 settembre 1179

Ildegarda = coraggiosa in battaglia, dal tedesco = brave in battle, from the German

 

독일 뵉켈하임의 귀족가문 출신인 그녀는 어릴 때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는데,

디쎈베르그의 유따라 불리우는 유명한 은수자의 지도를 받고 인근에 있던 베네딕또 수녀원에 입회하였으며, 1136년에 원장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는 범상치 않은 영적 체험을 하였고, 미래를 예견하는 특이한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시대는 서방교회의 혼란기였으므로, 그녀의 예언이 큰 몫을 담당하게 되었다.

 

1147년, 그녀는 루페르츠베르그 공동체로 옮겨가 그곳에 큰 수도원을 지었고, 자신의 "신탁"과 "계시"를 발표하여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1141년부터 그녀는 수많은 책을 저술하였는데,

묵시 문학적인 "스치비아스"가 유명하다. "Scivias" {Know the Ways of the Lord)

또 복음서와 성 베네딕또 규칙서에 대한 해설서를 펴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과 인체 및 질병에 관한 글도 썼다.

 

또 그녀는 게르만어와 라틴어를 혼합시킨 언어를 개발하였고, 자신의 환시를 설명하기 위하여 독일 전역을 순회하였다.

그녀는 중세시대의 가장 뛰어난 여성으로 손꼽히고, 그녀의 저서는 단떼와 윌리암 블레이크에 견줄만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공식적으로 시성된 사실은 없다.

 

 

 

사제는 곧 하느님과 사람과의 중개자로서, 하느님께 대해서는 사람들을 애련히 여기심을 구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하느님을 대신해 진리를 가르치고 죄를 용서해 준다.

그런데 때로는 보통 신분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천벌을 예언하고

세상의 죄악을 질책하며 특별한 속죄의 길을 권고해 주는 이가 없는 바도 아니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도 그러했고, 성녀 힐데가르다도 나약한 여자의 몸으로 그러한 사명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1098년 독일의 베케르하임 성주의 열 번째 딸로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혼자 있기를 좋아하며 비세속적 성격을 가진 아이로 인정되었으므로,

양친은 그녀를 8세 때 유타라는 동정녀에게 보내어 그곳에서 라틴어와 성가와 다윗의 시편과 교리를 배우도록 했다.

이 동정녀는 백작의 딸인 귀족 출신으로 일찍이 세상의 헛됨을 깨닫고 디센베르크 산중에 들어가 은수 생활을 하소 있던 덕망 높은 분이었다.

 

 

힐데가르다는 아직 어린 몸으로 이미 초자연적 계시를 받는 특전을 받았다.

순진한 그녀는 처음에 그런 묵시가 누구에게나 다 보이는 줄 알고 그럴때마다 그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옆에 있는 사람에게 보라고 했으나,

그 사람들은 매우 놀랄 뿐 아무것도 보지 못함을 알고 그때부터는 자기 혼자만 묵묵히 마음속에 간직하며 남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동안 유타 밑에는 수도 생활을 원하는 소녀들이 점점 많이 모여왔다.

그래서 조그만하 초막으로는 매우 부족함을 느껴 큰 수녀원을 짓기로 하고,

근방에 성 베네딕토 남자 수도원이 있음을 다행으로 여겨 그 회의 규율을 채용해 회칙으로 삼고 자신이 원장이 되었다.

힐데가르다도 15세때 수도서원을 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덕을 닦고 날로 깊은 신비경(神秘境)에 들어갔는데,

그녀가 38세 때에 원장이 서거했으므로 온 수녀들의 추천을 받아 그 후임 원장이 되었다.

하느님께서 성녀에게 계시한 것 중에는 그녀 자신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대한 것, 또는 후세에 관한 것도 적지 않았다.

 

성녀는 주님의 뜻에 따라 그 모든 계시를 기록해 두었는데,

이는 바로 성 베르나르도와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절찬을 받은 "주님의 길을 알라.Know the Ways of the Lord" 라는 책이었다.

 

 

 

힐데가르다가 예언을 하며 기적으로 병을 고친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지자,

매일같이 먼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와 혹은 영적 지도를 받고,혹은 병치료를 청하고, 혹은 기도를 청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지도하에 수도하려는 소녀들이 날로 증가했으므로 그 건물이 너무 협소함을 알고

성에 더 큰 건물을 세우고, 1147년에 그곳으로 이동했다. 이것이 곧 성 로베르토 수녀원이다.

그녀는 수도원장으로서 심한 일을 하는 한편 전교에도 힘쓰면서 교회를 위해 전력하고

또한 서한이나 강론으로 죄인을 회개시킨 예는 실로 허다하다.

아나스타시오 교황이나 독일의 황제 발바로사는 모두 그녀에게 깊은 존경심을 가졌고

그녀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처럼 들었다고 한다.

 

이같이 훌륭한 성덕을 쌓은 그녀는 82세의 고령을 맞이한 1179년 9월 17일에

사랑하는 하느님의 얼굴을 친히 뵈옵고자 이 세상을 하직하고 영원한 본 고향으로 떠났던 것이다.

그녀는 중세 시대의 가장 뛰어난 여성으로 손꼽힌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축일:8월20일

성 베르나르도(똘로메이)축일:8월21일

 

 

 

힐데가르트


가톨릭신문에서 / 기사입력일 : 2005-09-18  <이주연 기자>miki@catholictimes.org 
 
‘환경시대의 수호 성인’으로 부각

철학 작곡 명상 자연요법 문학 의술… 다양한 능력 지닌 독일의 여성 신비가

 

『사랑이 모든 것에 넘쳐흐른다. 저 깊은 바닥에서 샘솟아 별들의 세계 위로 덮어 흐르며 사랑은 모두에게 기꺼이 함께 한다. 우리 왕, 가장 높으신 주에게 평화의 입맞춤을 하였기에』(빙엔의 힐데가르트).

 

 

 

중세 최초의 여성 철학자 

중세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여성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힐데가르트(Hildegard 1098~1179). 그는 철학과 작곡, 명상과 자연요법, 식물학과 광물학, 문학 및 의술까지 아우르는 능력을 지녔던 독일 최초의 여성 신비가로 알려진다.
살아있던 시기에 이미 「라인 지역의 시빌」 「라인 지역의 데보라」로 알려졌던 힐데가르트는 여러 저술을 통해 인간과 세계 그리고 하느님을 살아있는 질서로 제시하며, 「하느님의 법칙 아래 있는 모든 것은 서로에 대해 응답한다」는 세계관을 펼친 바 있는데 이같은 의견은 특별히 자연 환경과 생명의 위기를 맞고 있는 현대에 이르러 유럽의 녹색주의자 등으로부터 「환경시대의 수호 성인」으로 불리며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그만큼 그에 대한 연구는 종파를 넘어 교회 밖 여러 분야에서 이뤄지고 있으며 독일어 권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신비주의 의학 정신의학 심리요법 비교종교학 자연치료 생태학 페미니즘 음악 미술치료 명상 분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다.
교회에서 정식으로 선포한 성녀는 아니지만 이미 독일 권에서는 공식적이든 아니든 「국민적 성녀」로 여겨지고 있는 힐데가르트는 마치 미래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쓴 것처럼 여겨진다. 약 900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더 많은 청중들을 얻고 있고 그의 사상과 학설들에 대한 책들이 넘쳐 나는 현상들을 볼 때 그렇다. 

 

 

여덟살 때 공동체에 맡겨져 

1098년 독일 브레머스하임 성 힐데베르트 귀족 가문의 10번째이자 막내로 태어난 그는 힐데가르트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의 가족적 배경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형제들 중 네명이 성직 수도직에 있었던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신앙적으로 매우 독실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여덟살 되던 해 힐데가르트는 은수자 유타의 관상 공동체에 맡겨져 유거 생활을 하게 된다. 여기에는 당시 십일조 개념에서 10번째 자식은 하느님께 바친다는 신앙적 요소도 작용했고 또 그 시대에는 어린 소녀들이 이같은 공동체에서 읽고 쓰는 것을 배울 수 있었던 배경도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그곳에서 공동 생활을 통한 삶을 배우게 됐고 읽고 기도하면서 라틴어와 성서 시편 그리고 성음악을 익혔던 것 같다.
유타의 공동체가 베네딕토 수도회 계열 수도회로 성장하면서 14~17살 사이 힐데가르트는 베네딕토 규칙에 따라 종신 허원을 하게 된다. 이때의 수도생활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데 단지 힐데가르트가 병을 앓았고 비전을 보았다는 것만 전해진다.
1136년 수녀 원장에 선출된 그는 1150년 남자 수도자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처음으로 여성들만의 수녀원을 건립했으며 1165년에는 아이빙엔에 대수녀원을 축성했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건축가 시인 희극작가 신비가 작곡가 미술가 신학자 예언자 의사 설교가 정치가 치유가 자연주의자로서의 삶을 보였는데 전문가들은 이때부터 라인강변을 따라 수녀원 문호와 신비주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평한다. 그것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이같은 분위기에 힘입어 독일 신비주의를 본격화 했다는 시각에서다.

 

 

 

세살 때 현시 능력 가져 

힐데가르트는 세상의 빛을 보기 이전부터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신비적 계시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심어주셨다고 고백했는데 그 말처럼 그녀는 세 살 때부터 현시의 능력을 가졌다.
그러나 유타 수녀와 폴마르 수녀 등 몇몇에게만 그에 대해 이야기했을 뿐 다른 사람들에게는 침묵을 지켰다. 마침내 1141년 나이 마흔 세 살 되던 해 「네가 보고 들은 것을 쓰라」는 계시를 받고 10년에 걸쳐 그가 들은 모든 것을 말과 문자로 표현했다.
「쉬비아스- 길의 조명」이 바로 그것으로 이 책은 35개 그림을 통해 신의 창조와 인간 구원에 대한 역사를 보여 주고 있으며 천사의 창조와 타락, 인간의 창조와 타락 및 인간-우주-신 이라는 관계를 하나의 유기적인 연결고리로 이야기 하고 있다.
사실상 무학 출신이었던 힐데가르트는 쉬비아스를 쓰면서부터 생을 마치는 81세까지 3권의 신학저서와 77편의 시와 노래, 그리고 36점의 그림 및 500가지의 식물 동물 광물에 대한 자료와 보석 치료, 자연 치료에 관한 의학 관련 책을 펴냈다.

 

 

  

시복시성 작업 추진 

또 수도원의 대명사인 성 베르나르도를 비롯 교황 에우제니우스 3세 등 성직자 정치인 평신도들에게 올바른 삶을 설명한 300통 이상의 편지를 남겼다.
무엇보다 힐데가르트는 세상을 창조하고 또 그 창조의 뜻을 완성하도록 이어가고 구원하는 원리와 근원을 「사랑」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사랑의 근본은 삼위일체의 신비로 규정됐다.
교황 그레고리 4세와 이노센트 4세가 시성을 제안했고 글레멘스 22세는 시성 작업을 추진한 바 있으나 아직 시성 승인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 지역 교회 주교들 합의로 1971년 전 독일어권에서 매년 9월 17일을 힐데가르트 축일로 경축하고 있다.

 

 

    독일 남서부 알자이(Alzey) 부근 작은 마을인 베르미스하임(Bermersheim)에서 귀족인 아버지 힐데베르트(Hildebert)의 10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성녀 힐데가르데(Hildegardis)는 어릴 때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8세 때 병약한 관계로 디지보덴베르크(Disibodenberg)에 있는 베네딕토 수녀회에 맡겨져, 스판하임의 메긴하르트(Meginhard von Spanheim) 백작의 동생인 유명한 은수자 유타(Juttta)의 보호하에 읽기와 쓰기, 찬미가 부르기, 수작업과 음악 등의 교육을 받았다. 성녀 힐데가르데는 12세 때부터 은수생활을 시작하였고, 14세 때에 수도 서약을 하였다.

   1136년 유타가 세상을 떠나자 38세의 힐데가르데가 수녀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1141년 그녀의 마흔 세 번째 생일날,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하면서 예언자적 소명을 받았다. 그녀는 처음에 이 체험을 거부하여 내적인 갈등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스승이며 고해 신부에게 상담을 하였고, 마인츠(Mainz) 교구 대주교의 지시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그녀가 체험한 환시가 사실임을 확인한 후 그녀의 환시를 글로 기록하는 일을 돕도록 수도승인 폴마르(Volmar)를 임명하였다. 특히 성녀가 살던 시대는 서방 교회의 혼란기였기 때문에 그녀의 예언자적 소명이 더욱 큰 몫을 담당하게 되었다.

   1148년 그녀는 빙엔의 루페르츠베르크(Rupertsberg)에 새로운 수녀원을 설립하고, 1150년 다른 수녀들을 데리고 디지보텐베르크 수도원을 떠나 그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에 첫 번째 저서인 "쉬비아스"(Scivias Domini)를 완성하자 그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녀는 계속해서 자연과 치료에 관한 책, "책임 있는 인간"(Liber Vitae Meritorum), "세계와 인간"(Liber divinorum operum) 등을 저술하였고, 1165년에는 라인 강 건너편 아이빙엔(Eibingen)에 두 번째 수녀원을 설립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환시를 설명하기 위해 독일 전역을 네 차례나 도는 설교 여행을 하였다. 그녀는 1179년 9월 17일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루페르츠베르크 수녀원에 묻혔다.

   성녀 힐데가르데는 중세 시대의 가장 뛰어난 여성으로 손꼽히며, 다양한 방면의 연구를 통한 그녀의 저서는 단테(Dante)나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에 견줄만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공식적으로 시성된 사실은 없다. 그러나 1664년부터 독일 마인츠 교구의 시간 전례서와 미사 경본에 9월 17일을 그녀의 축일로 기념하기 시작하였으며, 1940년부터 이 축일을 교황청에서도 받아들였다. 그녀는 비록 시성되지는 않았지만 "로마 순교록"에도 성녀로 수록되어 있다.
 

 참고자료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녀 힐데가르다 동정',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526-528쪽. 
  존 키르반 저, 이현주 역, 빙겐의 힐데가르다와 함께하는 30일 묵상, 서울(바오로딸), 2001년. 
  페르디난트 홀뵉 저, 이숙희 역, 성체의 삶을 위한 성체와 성인들 - '빙겐의 힐데가르트 성녀', 서울(성요셉출판사), 2000년, 78-83쪽.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2권 - '힐데가르트, 빙엔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6년, 9938-9944쪽.
(가톨릭홈에서) 

 

 

 

 

 

축일;9월 17일

성 로베르또 벨라르미노 주교 학자

St. Robert Bellarmine
St. Robert Francis Romulus Bellarmine
San Roberto Bellarmino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Born :4 October 1542 at Montepulciano, Tuscany, Italy
Died :17 September 1621 at Rome; relics in the church of Saint Ignatius, Rome
Beatified :1923 by Pope Pius XI
Canonized :1930 by Pope Pius XI 
Roberto = splendente di gloria, dal tedesco(dazzling of Gloria, from the German)

 

 

 

Painting. Abell Board Room. Bellarmine College.

 

1542년 토스카나의 몬테풀치아노(시에나)에서 태어났다.

18세 되던 해에 로마에서 예수회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는 훌륭한 토론회를 가졌고 콜레지오 로마노에서 강의했다.

교황의 자문 역할 및 카푸아의 대주교와 추기경,예수회의 관구장들의 조언자로서 활약하였다.

그는 일반 민중들이 학식이 깊은 사람의 생활을 예의 주시하고

그들 생활이 단순하고 담백하기를 바라고 있음을 알고 그렇게 생활하려고 노력하셨다.

 

그는 루터파 및 칼빈파 신학자들과의 신학 논쟁으로도 유명하며

지금 우리시대에서도 크리스찬 교리 교육의 지침서로써 쓰이는

17세기 교리 논쟁을 모아 조그만 교리 문답서를 만들었습니다.

로베르토 성인이 새로운 크리스찬 세대의 형성에 기울였던 정성과 교리 교육적 지침은

그를 교회의 학자로 성찬 받게 하였습니다.

예수회 www.sogang.ac.kr/~gesukr

 

 

로베르토 벨라르미노가 1570년 서품을 받았을 때, 교부들은 교회사의 연구에 무관심한 상태였다.

토스카나 지역의 유망한 젊은 학자로서 그는

개혁자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교리를 체계화하고 성서를 연구하는 두 가지 일에 그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루뱅에서 예수회 회원으로는 처음으로 교수가 된 사람이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3권으로 된 그리스도교 신앙의 ’논쟁에 관한 토론’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교황의 세속권과 평신도의 역할에 관한 부분들이다.

그는 ’왕권 신수설은 유지될 수 없는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영국과 프랑스의 분노를 초래했으나 한편 로마 교황의 세속권을 발전시켰다.

비록 그가 스코틀랜드의 철학자인 버클레이와 대항하여 교황을 옹호했지만 교황 식스토 5세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벨라르미노는 "학식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교황 클레멘스 8세에 의해 추기경이 되었다.

벨라르미노는 바티칸 궁전에서 지내는 동안 자신이 실천해 오던 내핍 생활을 전혀 완화하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이 먹는 음식만을 먹으면서 꼭 필요한 것 이외에는 가계비 지출을 제한했다.

그는 군에서 탈영한 한 군인의 몸값을 치르었고 "벽은 감기들지 않을 것이다.the walls won’t catch cold."라고 하면서

자기 방의 커튼을 가난한 이들의 옷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교황 클레멘스 8세 시대의 신학자로서

그의 많은 활동 가운데 특히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친 두 개의 교리 문답집 준비를 들 수 있다.

 

 

벨라르미노의 일생에서 마지막으로 있는 중요한 논쟁은

1616년에 일어난 일로 그가 찬양하던 자기 친구 갈릴레이에게 충고를 해야 했던 것이다.

 

벨라르미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성서에 위배된다고 결정한 교리 성성을 대신하여 그에게 충고를 했다.

이 충고는 아직 완전히 입증되지 않은 것을 가설 이상으로 지나 치게 비약시키는 데 대한 하나의 경고였다.

이것은 성인들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의 본보기이다.

 

벨라르미노는 1621년 9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복은 1627년에 시작되었으나 그의 저서에 연유된 정치적 이유로 인해 지연되었다가

비오 11세가 1923년 시복,1930년 시성,1931년 교회학자로 공표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라 추구된 교회의 쇄신은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따르기에는 어려운 일이다.

변화의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확고한 영도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든든한 정통의 기둥과 권위를 지니고 확실하게 밝혀 놓은 노선에 따라 철저한 지시가 주어지기를 바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에서,

"어제도 내일도 언제나 영원히 같은 그리스도안에 궁극적인 바탕을 가지고 변하지 않는 많은 사실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준다.

 

로베르토 벨라르미노는 성서와 가톨릭 교리의 연구에 그의 일생을 바쳤다.

그의 저서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신앙의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뿐아니라

그것이 예수의 현존이며-그 분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이 보여준 것-계시 종교의 근원이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도와 준다.

우리 신앙의 진정한 근원은 단순히 일련의 교리가 아니고 오히려 오늘날 교회 가운데 여전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가 그의 사도들을 떠났을 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의 현존을 확신시켰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 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모든 교회를 함께 돌보고 있는 주교들은 주교성성을 통하여 받은 주교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며,

교황과 일치하여 교황 권위 밑에서 모두 한 단체와 한 몸이 되어, 하느님의 교회 전체에 대한 교도직과 사목 행정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주교들의 교회 사목직에 관한 교령’ 3항)

 

 

성 로베르또 벨라르미노 주교의 「하느님께로 향한 인간 정신의 상승」에서

(Grad.1: Opera omnia 6, edit.1862,214)

 

내 마음을 당신 계명에로 기울게 하소서

 

"주여, 당신은 좋으시고 인자하시며, 당신께 비는 자를 크게 어여삐 여기시나이다."

당신의 아버지다운 통치가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조금이나마 맛보기 시작하는 이라면 마음을 다해 당신을 섬기지 않을 자 있겠습니까?

주여, 당신의 종들에게 명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당신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위에 내 멍에를 메어라."

당신의 멍에란 무엇을 말합니까?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당신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메는 자를 내려 누르기는커녕 오히려 힘을 주며 무거움을 느끼게 하기는 커녕 안식을 얻게 해주는 그런 멍에를 누군들 기꺼이 메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당신은 응당히 다음과 같이 부언하셨습니다. 내 멍에를 메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피곤하지 않게 하고 안식을 가져다주는 당신의 이 멍에는 무슨 멍에 입니까?

분명히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입니다.

선과 미는 사랑을 애호하는 것보다 더 쉽고 더 좋으며 더 즐거운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 나의 하느님이시여, 당신은 이 모든 것입니다.

당신의 계명은 그 자체로 보아 황금 더미보다 더 바랄 만하고 꿀보다 더 달콤한 것인데도,

더욱이 그것들을 지키는 이들에게 상급을 약속까지 하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은 하나의 상급, 사도 야고보의 말씀에 따라, 크나큰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이들에게 생명의 월계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월계관이란 무엇입니까?

이사야의 말씀에 따라 복된 바울로 사도가 말하듯,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큰 선입니다.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베푸시는 상급은 참으로 큽니다.

가장 크고 첫째가는 이 사랑의 계명은 그것을 명하시는 하느님께보다 그것을 지키는 인간에게 더 유익합니다.

여타 모든 계명들도 그것들을 지키는 이들을 완전케 하고 고양시키며 교훈하고 밝혀 주며, 한마디로 어질고 복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당신이 정말 슬기로운 사람이라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창조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인 당신의 목표이고 영혼의 중심이고 당신 마음의 보화입니다.

이 목표에 다다른다면 당신은 복된 사람이 되고 거기서 멀리 한다면 불행한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 목표에로 인도하는 것만을 당신에게 선익이 되는 것으로 여기고 그 목표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것을 악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번영과 곤고, 부유와 가난, 건강과 질병, 영예와 수치, 그리고 생명과 죽음을 그 자체로 구하지도 피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것들이 하느님의 영광과 당신의 영원한 행복에로 이끄는데 이바지한다면 좋고 기대할 만한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과 당신의 영원한 행복에 장애물이 된다면 악으로 보고 피해야 합니다.

 

 

이탈리아의 벨라프미노 가문에서 태어난 이 성인은 성 베드로 가니시오와 같이 예수회 수사 신부

16세기 프로테스탄트 교파가 세상을 어지럽게 할 무렵 교회의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 하느님께 특별히 간택된 분이었다.

 

그는 1542년 10월 4일 플로렌스 주의 몬테 풀치아노 시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고향에서 중학교 다닐 때부터 탁월한 재주와 학문에 대한 열심으로 종종 스승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18세때에 예수회 입회를 신청하자 그의 재주의 비상함을 알고있던 원장은 이를 쾌히 승낙햇다.

20세가 되자마자 일찍이도 수사학의 교수로 임명되어 잠시 그 임무를 완수한 후

다시 철학, 신학을 연구하고자 벨기에의 루벵에 가서 그곳에서 28세에 성품성사를 받고 사제가 되었다.

 

그가 자신의 박학과 웅변으로 설교를 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품전 신학 연구 때부터인데 특별히 교회의 진리를 지극히 명석하게 설명하므로,

프로데스탄트 신자들도 그의 명성을 사모하여 일부러 영국에서부터 설교를 들으러 와 그의 조리있는 설명을 듣고,

이단에서 개종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루벵 대학을 졸업한 벨라르미노는 즉시 모교의 교수로 임명되어 6년간 신학 강좌를 담당했다.

그동안 그이 평판은 멀리 로마에까지 퍼져 1576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그를 초빙하여 대학의 변증학 교수로 임명했다.

 

그 임무를 맡고 있었던 12년 동안, 변증 호교학을 잘 강의하며

당시 새로 일어난 이단설의 오류를 지적 논파하자 마치 쾌도로 난마(快刀亂麻)를 절단하는 거와 같았고,

펜으로는 ’현대 이단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변박서’라는 서적을 저술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는 바가 컸었다.

그 명석한 논지와 온화한 필치는 한 번만 읽고도 반드시 교회로 개종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정평까지 있어서,

많은 이단자들의 개종을 초래했으므로 이단자들은 대단히 놀라며,칼빈파의 수장 베자 같은이는 급히 그 저서를 읽는 것을 금했다.

한편 교회측에서는 이 서적에 대해 크게 환영하며 받아들였다.

 

 

그의 강의는 항상 수많은 학생을 끌었고 그 중에는 각국에서 온 많은 개신교 청강생들이 모여왔는데

그로 말미암아 영원한 진리를 깨달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 후 학생들은 자기 고향에 돌아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가 참된 종교임을 전하여

그 영향은 점차 커졌고 벨라르미노의 교회에 대한 공로는 실로 측량할 수 없었다.

 

성 알로이시오도 그의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Spiritual father of Saint Aloysius Gonzaga)

이 순결한 청년이 그처럼 빨리 성인이 된것은 주로 은사였던 벨라르미노의 열심한 훈육에 기인한다.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축일:6월21일

*성 베드로 가니시오 사제 축일:12월21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축일:7월31일

 

 

 

 

Wood Carving.Horrigan Hall. Bellarmine College.

 

얼마후에 그는 나폴리 왕국에 있는 예수회 수도원의 관구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교황 클레멘스 8세는 곧 그를 로마에 다시 불러들여 교황청의 고문으로 임명하고

1599년에는 교회의 최고 직분인 추기경에 임명했다.

또한 벨라르미노는 두번이나 교황의 후보자로 추천되었으나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이를 사양했다.

 

벨라르미노의 저서는 상당한 수에 달하지만 그

중에는 학문에 관한 것도 있는가 하면 ’선종의 길’과 같은 신심서가 있고,

그래도 제일 유명한 것은 교리서인데 이는 실로 60개국어로 번역되고

4백회 이상이나 재판된 기록을 갖고 있다.

 

 

벨라르미노는 이같이 교회를 위하여 다년간 전력한 후

79세의 고령에 달하여 임종이 가까운 줄을 알고 수도원의 한 구석에서 죽기를 열렬히 원했던 바

다행이 그 원이 채워져 1621년 8월 말경 그리운 수도원에 돌아와 9월 17일 그곳에서 선종했다.

마지막으로 병자 성사를 받을 적에 그는 누워서 받으려고 하지않고 아주 쇠약해진 몸을 일으켜 마루 위에서 무릎꿇고 받았다고 하는데,

이를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열심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임종할 때 몸에 걸쳤던 추기경의 의장은 20년 전 교황으로부터 받은 그대로였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옷을 새로 맞춘 일이 없었다.

그는 자기 재산을 생전에 모두 가난한 사람, 고학생, 경영이 곤란한 병원, 수도원 등을 위해 기부했으므로 그가 죽은 후 장의 비용도 없었다고 한다.

이 성인이 얼마나 수도자 다운 가난의 덕을 지켰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로베르토 벨라르미노의 시성 조사는 일찍이 1627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자도 없지 않았으므로 한때 시성 조사는 중지되었으나

다시 시작하여 드디어 1930년 6월 29일 성 베드로, 바오로 두 사도 축일을 계기로 장엄하고도 성대한 예식이 거행되어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유골은 본인의 의사에 의해 1923년 로마에 있는 성 이냐시오 대성당에 운반되어 성 알로이시오 제대 옆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