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 송영진 신부님 ~

천상의모후(=수호천사) 2024. 7. 22. 23:21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강론>

(2024. 7. 22. 월)(요한 20,1-2.11-18)

 

복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1-2.11-18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사랑하면 더 이상 ‘나’는 없습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1-2)”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요한 20,11-15ㄱ).”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8).”

 

1)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으로서

우리 교회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사도들이 아니라 마리아 막달레나를

당신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셨을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분이고, 사람을

차별하거나 편애하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에, 마리아

막달레나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해서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신 것은 아닐 것이고, 마리아에게 뭔가

특별한 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 ‘특별한 점’을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들도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마리아가 좀 더,

또는 아주 많이 앞서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끝까지 함께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실 때에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박해자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숨어 있었는데(요한 20,19.26), 마리아는 박해자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고,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그 모습은 ‘사랑은 함께 있음’이라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몸’만 함께 있는 것은,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과 함께 있으려고 노력해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피땀을 흘리면서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

사도들은 모두 자고 있었고, 그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태 26,40).

아마도 그때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깨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가장 큰 계명’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2,37-39).

이 말씀을, “사랑이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

바치는 일.”이라고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곧

사랑이고, 그렇게 다 바치는 것이 곧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그렇게 다 바치면, 더 이상 ‘나’는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나’ 라는 존재는 녹아 없어지고,

내 안에 주님만 계시는 상태가 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ㄱ).”

마리아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내 안에 주님만 사시고

더 이상 나는 없는” 단계를 잘 보여 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 부활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은 그 단계에

도달해 있었고, 사도들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그들도 모두 그 단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랑의 마지막 단계는 주님과 내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일치’입니다(요한 17,20-26).>

 

3) “여인아, 왜 우느냐?” 라는 천사들의 말은, “울지 마라.

주님께서는 부활하셨으니.”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울지 마라. 내가 이렇게 네 앞에 살아 있으니.”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생각과 시신이 없어졌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마리아는 천사들의 말도 알아듣지

못했고, 예수님의 말씀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한 것은

사랑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부활 신앙에 관한 문제입니다.

아직 부활 신앙이 없었던 때의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랬다가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실 때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는데(요한 20,16),

그 일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눈을 열어 주신 일입니다.

<마리아가 알아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을 알아보게 해 주신 일입니다.

주도권은 언제나 항상 예수님 쪽에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경우에도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 알아보았는데(루카 24,30-31), 그 일도 역시

예수님께서 당신을 알아보게 해 주신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