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 송영진 신부님 ~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강론>(2024. 9. 23. 월)(루카 8,16-18)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복음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16-18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17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18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신앙의 증언은 ‘말’보다 ‘삶’으로 먼저 해야 합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6-18).”
1) 이 말씀은,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등불’과 ‘빛’은 예수님의 복음을,
또는 그 복음 말씀대로 사는 ‘신앙인의 삶’을 상징합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는 “너희는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지도 말고,
침상 밑에 놓지도 마라.”이고, “복음을 감추지 마라.”, 또는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마라.” 라는 명령입니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는
“너희는 등불을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하여라.”이고, “적극적으로, 또 능동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라.” 라는 명령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는 “신앙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 복음을 감추지 말고 알려라.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라는 명령입니다.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라는 말씀은,
당신의 명령을 잘 새겨듣고 실행하라는 뜻입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라는 말씀은,
복음을 적극적으로 또 능동적으로 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신앙을 증언하면 할수록 점점 더
신앙이 강해지고,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을
하면 할수록 나 자신이 그 길을 더 잘 갈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선교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나 금방 체험하게 되는 일입니다.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라는 말씀은, 자신의 신앙을 숨기면, 결국에는
신앙을 잃게 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도 복음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기도하지도 않고, 선교활동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냉담’ 상태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17절의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를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 읽으면,
“너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을 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질 때가
올 텐데, 그때가 되면 ‘복음 전하는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받을 몫’이 없다.”로 해석됩니다.>
2) 선교는 교회의 설립 목적이고, 모든 신앙인의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5-16).”
<신앙인의 임무는 복음을 전해 주는 것까지입니다.
그 복음을 전해 받은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 것은 신앙인의 책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에,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12-13).”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한 집’은, 사도들과 선교사들이
전하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을 뜻하고,
‘마땅하지 않은 집’은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해 받은 사람이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은 그 사람 자신에게 있을 뿐이고,
사도들과 선교사들의 책임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3) 복음을 전하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말’로 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신앙인 자신이 믿는 대로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답게 살지 않는 사람은 신앙을 증언할 수도 없고,
남에게 믿으라는 권고를 할 수도 없습니다.
‘첫 신자 공동체의 생활’이 좋은 모범이 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2.44-47).”
여기서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라는 말은,
당시의 신자들이 ‘말’로 사람들을 설득한 것이 아니라
‘삶’으로 감화시켰음을 나타냅니다.
조선시대 박해 때의 상황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박해 때문에 선교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꾸준히 신자 수가 늘어났던 것은,
‘신앙인들의 삶’이 조선 백성들을 감화시켰기 때문입니다.
모진 고난과 시련을 참고 견디면서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그 모습 자체가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 되었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신앙인답게 잘 살고 있는 사람이 ‘말’만 잘하는
사람보다 선교활동을 더 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은 잘하는데 ‘삶’은 신앙인답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는 복음 선포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