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26주간 목요일 / 정인준 신부님 ~

천상의모후(=수호천사) 2024. 10. 3. 10:36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제1독서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 욥기의 말씀입니다. 19,21-27
욥이 말하였다.
21 “여보게, 나의 벗들이여,
날 불쌍히 여기게나, 불쌍히 여기게나. 하느님의 손이 나를 치셨다네.
22 자네들은 어찌하여 하느님처럼 나를 몰아붙이는가?
내 살덩이만으로는 배가 부르지 않단 말인가?
23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속에서 내 간장이 녹아내리는구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2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10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11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루카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열 두 제자 외에 ‘일흔 두 명의 제자들’을 파견하신
대목을 전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히브리 원본에서 외국의 유대인 공동체(Diaspora)를 위한 고대 희랍어 번역을
위해 일흔 두 명의 학자들이 동원되었다는 숫자와 연결되고 있습니다.
 
각 지파에서 여섯 명의 학자들이 나왔다고 하는데 ‘아리스데아스의 편지’에서 이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편지에서 히브리 율법서를 72명의 학자가 모여서 72일만에 그리스어로 번역했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이 번역서를 원칙적으로는 ‘칠십이 인의 번역본’이라고 해야 하는데 부르기 쉽게
‘칠십인’이라는 뜻인 ‘셉뚜아진따(Septuaginta LXX)라고 했지요.
 
또한 창세기 10장에 소개된 세상 민족들의 숫자와 연결된다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열둘을 파견하실 때와는 달리 일흔 두 명의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에는
둘씩 짝지어 보내시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그들에게 이르시는 첫 번째 말씀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제자들을 보내시는 심정이 ‘이리 떼 가운데로 양들을 보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심지어는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평화를 빌어주고 그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고
하십니다.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조건이 더 좋은 것을 이리저리 따지지 말고
대접하는 대로 그 집에서 지내라.’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며 받아들이는 않는 집에서는 떠날 때 먼지를
털어 버리고 가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당부하신 말씀은 사실 지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 심지어는 여벌의 신발’은 사실 여행하는 데에 필수적인 것인데도
그것을 챙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런 것들이 하느님 나라 선포하는 데에 는
거치장스러운 짐이 된다는 것이지요.
 
‘길 가다가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지 말라’라는 말씀은 사람에게도 묶이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나안의 약속의 땅을 열한 지파에게는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레위지파에게는 예외로 땅을 주지 않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땅에서 상속 재산을
가질 수 없다. 그들 사이에서 너에게 돌아갈 몫은 없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네가 받을 몫과 상속 재산은 바로 나다.’”(민수 18,20)
 
기업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삶에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하느님 자신이 레위의
몫이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서에서 에즈라의 행적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는 ‘주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실천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규정과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에즈 7,11)


에즈라는 바빌론 유배 이후에 알려진 율법학자입니다. 그는 원래 사제 출신이었고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기원전 464-424)에게 간청해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허
락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대사제 가문이면서도 백성들에게 율법을 읽어주고
가르쳐줌으로써 교사와 사제 직무를 수행합니다. (에즈 8장)
 
그는 사제집안이면서도 사제와는 독립되는 율법학자의 위치에서 백성들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유배 이후에 축소된 성전의 사제들 보다 율법학자들이 군중의 지지를 더 받게 되었고
이스라엘의 특별한 권위를 세웁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제 출신인 에즈라는 율법학자로서 군중에게 율법서를 권위 있게
읽어주는 것입니다.
 
광장에 모여 율법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손을 쳐들고 환호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레위인들과 율법서의 관계에 대한 정황을 느헤미야 저자는 이렇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레위인들이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쳐 주었다. 백성은 그대로 서 있었다. 그들은 그 책,
곧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그래서 백성은 읽어 준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느헤 8,7-8)


이스라엘의 레위지파는 요셉이 열두 지파에 들어오면서 함께 등장하지만 (창세 35,23-26;
49,5) 그러나 요셉의 두 아들 에프라임과 므나쎄가 지파의 명단에 들어오면서 레위는
제외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시대에 레위는 사제직, 성전의 악사, 성전문지기, 그 외에의 레위인들은
백성을 가르치는 일을 맡았던 것입니다.
 
레위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분깃의 땅을 받지 못했어도 그들을 위해 48개의 성읍이
제공되었고 십일조 일부가 그들에게 돌아 갔습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레위인들은 비록 재력에서는 넉넉하지는 못했어도 지파와 땅의 경계를
넘어서 활동할 수 있었고 유배 중에서도 하느님의 율법을 보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귀환 후 에즈라와 사제들은 율법학자의 모습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레위들이 땅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에 또한 어느 지파의 경계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신원 때문에 유배 중에서도 율법을 보존할 수 있었고 예루살렘 귀환 후에도
율법을 읽어주고 가르쳐 주는 지도자의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다른 지파는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에 나뉘어 있던 땅과 함께 지파의 정체가 흔들리고
사라졌지만 사제들 그 세력이 약해졌지만 바빌론 유배 후에 성전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레위 지파이며 사제들의 삶이 넉넉하지는 못했어도 하느님의 성전과 말씀인
율법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제자들도 재물에서 가난했지만 어디에도 구애되지 않고 성실하게 복음선포의 충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종교가 재물과 권력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면 가속을 받은 ‘세속화(世俗化)’의 수순을 밟습니다.
 
특히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재물은 교회의 신원을 변질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레위인들에게 땅으로부터 ‘가난’을 주문하셨고 신약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물로부터 ‘가난’을 당부하셨습니다.
- 정인준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