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31주일 / 이영근 신부님 ~

천상의모후(=수호천사) 2024. 11. 3. 05:21

연중 제31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 31주일, 11월의 첫 주일, 늦가을입니다. 가을도 아름답게 익어가고, 단풍도 아름답게 익어가고, 사랑도 아름답게 익어갑니다.

 

“가을처럼 아름답고 싶습니다”(이채)

가을에 오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의 등불 하나 켜 두고 싶습니다/

가을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진실한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가을엔/ 그리움이라 이름하는 것들을/

깊은 가슴으로 섬기고 또 섬기며/ 거룩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싶습니다//

오고 가는 인연의 옷깃이/ 쓸쓸한 바람으로 불어와/

가을이 올 때마다/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 세월//

꽃으로 만나/ 낙엽으로 헤어지는/

이 가을을 걷노라면/ 경건한 그 빛깔로 나도 물들고 싶습니다//

그대여!/ 잘 익으면 이렇듯 아름다운 것이/ 어디 가을뿐이겠습니까/

그대와 나의 사랑이 그러하고/ 그대와 나의 삶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거룩한 말씀이라고 불리는 ‘셰마 이스라일’을 들려줍니다. 유다인들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맨 먼저 배우는 것이 “들어라 이스라엘아”로 시작되는 바로 이 “셰마”라는 신앙고백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적어도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이 기도를 정해놓고 드린다고 합니다. 또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를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기 위해 이마와 왼쪽 팔에 경구갑을 부적처럼 붙들어 매고 다녔고(신명 4,8-9 참조), 옷자락에 술을 달고 다녔습니다(민수 15,37-39).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십계명에 6백 조항이 넘게 보태어져 실천할 수 없게 되었고, 또 어느 계명이 큰 계명인지 토론이 계속되었는데,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도 이 질문을 예수님께 합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주었던 계명으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 29)

 

 

 

이 말씀은 먼저, ‘하느님의 존재’ 와 ‘우리의 존재와의 관계’에 대한 계시입니다. 곧 ‘한 분이신 우리 주님 하느님’과 ‘그분의 것, 곧 그분의 소유’의 관계를 드러내며, 바로 이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사랑’임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원천이요 근거요 바탕이 바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임을 밝혀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근거요 이유입니다.

 

그러니 이 관계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히:아헤브, 희:아가페오)은 본능적 호감과는 구별되는 ‘신실함’과 ‘충성’을 드러냅니다. 곧 ‘온 마음과 온 목숨과 온 정신과 온 힘을 다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12,34)고 할뿐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근본적으로 <구약>의 ‘사랑의 계명’은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모세가 말한 ‘구약의 계명’과 예수님의 ‘새 계명’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사랑의 계명과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은 어떻게 다를까?

 

 

 

우선, <구약>에서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둘째 계명의 ‘이웃 사랑’은 제한적입니다. 곧 여기서 말하는 ‘이웃’이란 동포로 한정하거나 함께 사는 이방인들까지를 포함시킬 뿐입니다(레위 19,3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가 10,30-37)에서 보여주듯이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일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마태 5,44-48).

 

또한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여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완전히 바꾸어 새 계명으로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시하십니다.

 

또한, 나아가서,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듯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신명 6,4-5)과 ‘이웃 사랑’(레위 19,18)을 한데 묶으시면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사랑의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이요,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몸’이라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인 셈이 됩니다.

 

물론, 이 때 ‘한 몸’이란 ‘너의 몸이 내의 몸이고 나의 몸이 너의 몸’이라는 혼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새 천년기](24항)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일부”인 형제들이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한 몸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일부’이기에, 형제의 아픔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먼저 ‘형제의 일부’가 되어주는 일로 이루어져 갑니다. 마찬가지로, 좀 더 확장해서 표현해본다면, 내가 형제의 일부가 되고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은 곧 ‘하느님 사랑’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이중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곧 ‘남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