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31주간 수요일 / 송영진 신부님 ~
천상의모후(=수호천사)
2024. 11. 6. 06:15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강론>(2024. 11. 6. 수)(루카 14,25-33)
복음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25-33 그때에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32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33).” 1) 여기서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라는 말씀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없다.” 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제자가(신앙인이) 된다고 해서 무조건 자동적으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은,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입니다. 이 말씀은 가족과 가정을 부정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 ‘가족’은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가족은 끝까지 함께 가야 할 영적 동반자이고,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고,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식구들이 구원의 반대쪽으로 가려고 한다면, 또는 죄를 짓는 것을 본다면, 가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따라가면 안 되고, 식구들의 구원을 위해서 그들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선’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일을 함께 하는 것이 사랑일 수는 없습니다. ‘자기 목숨’은 허무하게 사라질 육신의 목숨을 가리킵니다.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사랑과 집착을 혼동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헛된 집착을 버리고 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2)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육신의 편안함만 찾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필리 3,7-11).” 예수님의 말씀도 그렇고, 바오로 사도의 말도 그렇고, 이 가르침들에 대해서 “왜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좀 더 쉽고 편한 길은 없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어려운 길만 알려 주신 것은 아닙니다. 좀 더 쉽고 편한 길은 없습니다. 길은 단 하나뿐입니다. 그 길은 모든 것을 버려서 모든 것을 얻는 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1티모 6,7).” 라고 말합니다. 가지고 갈 수 없는 것들은 모두 버리고 가야 합니다. 27절의 ‘제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는 말씀과 33절의 ‘자기 소유를 다 버려야 한다.’는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3) ‘탑’에 관한 말씀은, “마칠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마라.”가 아니라, “끝까지 전력을 다하여라.”입니다. 시작만 하고 마치지 못하는 것은 처음부터 시작하지도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은 아예 하지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을 중간에 버린 사람은 처음부터 안 믿은 사람과 같습니다. ‘임금’에 관한 말씀은 “감히 하느님께 맞서려고 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싸우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려고(살리려고) 오신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을 이길 자신이 없어서 항복(굴복)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전쟁으로 표현하셨을까? 아마도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줄 알고 우쭐대면서 감히 하느님께 맞서려고 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꾸짖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하느님께 맞서서 자기만의 바벨탑을 쌓다가 망해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옛날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즉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 바벨탑을 쌓으면서 무슨 큰 업적을 쌓는 것으로 착각하고 혼자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