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주님 봉헌 축일 / 정인준 신부님 ~

천상의모후(=수호천사) 2025. 2. 2. 06:54

2월 2일 주일 (백) 주님 봉헌 축일 (축성 생활의 날)

 

제1독서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고전 중에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우리나라 식의 봉헌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심청전이 아니겠냐라는 억지를

부려봅니다.

 

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2,14-18
14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15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17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8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40<또는 2,22-32>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의 강론말씀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사실 구약에서도 하느님께 맏아들을 바치는 것은 생명을 바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구약과 우리나라의 고전과 시대적으로나 내용으로 맞지는 않지만 사람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우리의 표현으로는 부처님에게 바친다는 뜻으로 보면

산 사람의 봉헌의 의미로는 일맥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심청전의 줄거리가 된 효녀 설화는 황해도 황주에 거주하던 맹인 심씨의 이야기에

비롯된다고 하겠습니다. 작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줄거리를 외울 정도의 친근한 이야기입니다.

 

효녀 심청은 가난한 심봉사의 딸로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눈먼 아버지의 보살핌으로

자라나서 아버지를 지성으로 모셨지요. 그러던 어느 날 공양미 300석을 부처님께 바치면

 아버지 눈을 뜰 수 있다는 소리에 인당수 깊은 물에 항해의 안전을 위해 산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심청의 효성에 감동한 용왕님은 심청을 연꽃에 태우는데 그곳을 지난던 뱃사람이 이 귀한

연꽃을 나라님께 바쳤고 연꽃에서 나온 심청은 왕비가 되어 아버지가 보고 싶은 마음에

맹인잔치를 열어 아버지를 만났는데 딸을 보자 반가움에서 아버지 심봉사가 눈을

떴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 효성에 하늘이 감복을 해서 보답했다는

주제입니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에 형성된 작품으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고 우리 민족예술인

판소리로도 여러 모양으로 전수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날 이기적이고 어른들에 대한

효의 사상이 줄어드는 요즈음 세상에도 심청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이니다.

 

교회의 전례용어로는 봉헌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 물건, 특히 자신의

모든 행위, 기도 등을 하느님께 기꺼이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모세의 법에

따라 모태를 열고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를 하느님께 바치는 것(탈출, 13,1; 22,28-29)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주께서 사람이나 동물의 주인이심을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모세의 법에 따라 예수님의 부모도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바친 사실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는 예식으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 성전에

봉헌한 것입니다.

 

교회는 이 축일에 성당에서 쓸 초를 축성하여 성당의 전례와 가정에서 기도할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성탄 후 40일째 되는 2월2일로 성전에서 봉헌되는 것을

기념 하하며 초를 축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봉헌의 의미로 각 수도회에서는 이 봉헌축일에 첫 서원 아니면 성대성원인

종신서원을 하여 수도자의 한 삶을 주님께 봉헌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교황님께서 오늘을 ‘봉헌 생활의 날’로 봉헌된 수도자 성직자, 그리고

예비 성소자들을 위해서도 교우들이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봉헌한다는 것은 생명을 바쳐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봉헌하는 초가 빛을 내는 것은 자신을 태워서 없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서

희생제사를 바치며 하느님 아버지께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것입니다.

 

히브리 서간의 저자는 당신 자신이 대 사제이시며 동시에 십자가에서 속죄제물이 되심을

이렇게 고백하며 주님께서는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7-18)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 양처럼 주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스스로 약한 사람의

모습으로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

유혹받고 넘어지기 쉬운 사람의 사정을 누구보다 아시고 보살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봉헌축일을 맞으면서 우리 자신을 또한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 뿐 아니라 우리 가정도 우리의 신앙의 공동체도 새해를 맞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