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7주일 / 호명환 가를로 신부님 ~

천상의모후(=수호천사) 2025. 2. 23. 07:51

연중 제7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수들을 대하는 방식을 우리가 보고 배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사랑은 수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적극적인 것이고 능동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 사랑"은 너무도 가혹한 권고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그저 눈감아 주고 잊어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면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게 정말 가능할까요?

 

 

여기서 한 번 요한1서 저자의 말씀을 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권고하시는 "원수 사랑" 역시도 이 하느님 사랑에서 기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나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실 극히 어려운 일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원수 사랑"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1서 저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결국 사랑도 '나'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다른 두려움과 걱정들은 모두 내려놓고 사랑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 다른 뺨을 내밀라"고 말씀하시는데, 요한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대사제 카야파의 장인인 한나스로부터 신문을 받으실 때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3).

 

우리는 이 상황이 예수님 당신께서 하신 말씀과 모순이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저 다른 뺨을 대 주시는 것보다 더 적극적인 사랑을 그 성전 경비병에게 보여주신 것이고, 그에게 참된 인간성이 무언지에 대해 도전을 던져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성전 경비병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야말로 비폭력의 항거요 도전이었기 때문입니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려는 것은 우리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본능에 따라 행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 원수와 똑같은 모습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도 달라질게 없습니다. 여기서는 그 원수의 마음을 전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원수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셈이 되고 마는 것이겠지요?! 말하자면 "너도 그런 놈이야!"라는 식의 생각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갈등과 불화의 골이 깊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거기에는 더 잘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모순된 이성은 근본적인 "나"의 잘못을 보기보다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너"의 잘못을 보려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만약에 내가 받은 해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갚아 줄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꼬투리를 제공해 주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대방에게 "인간은 다 그런 거야!"라는 식의 생각을 더 굳게 해 주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고, 여기서 폭력의 악순환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다른 이들의 잘못을 보면서 우리의 잘못을 정당화(?)하는 무의식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도 우리 정신의 하향조정 경향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상대주의인 것입니다. 이런 심리겠지요?! "나도 잘못하고는 있지만 너의 그 악보다는 나아!"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돌려 당신의 뺨을 친 성전 경비병의 얼굴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인격 대 인격으로서 말입니다. 대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악을 행할 때 그들을 그저 하나의 대상물로 봅니다. 그러니까 얼굴과 목소리를 지닌 한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화나 이득을 위한 대상으로만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 경비병을 똑바로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인격적 현존과 그의 인격적 현존을 깨달으라고 말씀하시듯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깊이 성찰하고 새겨야 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의 순수한 인격적 현존의 중요성! 이는 선을 보고자 하는 우리 본래의 하느님 모상을 의식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든 우리가 원수라고 여기는 이들의 공격성과 폭력을 넘어 그의 인격 안으로 들어가 다른 한 인격체로서 그를 보고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이 한 인간으로서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는 대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세상을 다양한 공해로 오염시키고 있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서로에게 폭력을 가하고 서로를 죽이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원수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기다리십니다. 그것도 "어디 한 번 보자!" 하시면서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시면서 우리가 우리의 인간성을 되찾을 수 있을 때까기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말일 하느님께서 우리가 행하는 악한 행위대로 되갚아 주셨다면, 혹은 이 세상에 하느님의 자비와 그분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 주는 참된 인간성이 없었다면, 이 세상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은 이미 없어졌을지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소돔과 고모라의 상황처럼 거의 모두가 다 멸망해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수들(우리?)을 대하는 방식을 우리가 보고 배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참된 인간이 되도록, "지극히 높으신 사랑의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단순히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우리 아주 가까이에서 우리에게 당신 사랑의 힘을 불어넣어 주시며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