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 송영진 신부님 ~
천상의모후(=수호천사)
2025. 2. 25. 06:07
<연중 제7주간 화요일 강론>(2025. 2. 25. 화)(마르 9,30-37)
복음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낮춤’과 ‘섬김’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1) 35절-37절의 말씀은, ‘높아지는 방법’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높아지려고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길에서 ‘누가 더 높은 사람이냐?’를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될 뿐입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충실하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가?”, 바로 그것 하나뿐입니다. ‘하늘나라’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하면, 하늘나라는 남들보다 더 높은 사람도 없고, 남들보다 더 낮은 사람도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곳에서도 역시 ‘누가 더 높은 사람이냐?’를 묻는 것은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일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높아지는 일’입니다.> 2) 예수님의 말씀에서,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첫째가 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낮추어라. 그리고 모든 이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낮춤’과 ‘섬김’은 바로 ‘사랑’입니다.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3-15).” 이 말씀에 대해서 “그냥 사랑하면 안 되나? 꼭 ‘낮춤’과 ‘섬김’을 실천해야만 사랑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사랑’은 원래 그렇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보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서, 사랑하는 이를 섬기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내려가 주는 것”입니다.> 만일에, 자기는 내려가지 않고 상대방에게 올라오라는 요구만 한다면, 또 자기는 상대방을 섬기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 섬기라는 요구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이고, 그 경우에,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고, ‘빈말’을 하는 것입니다. 3) 자기를 낮추어서 내려가 주고 섬기는 사랑에 대해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0-1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당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을 낮추신 일이고, 우리를 섬기신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곧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라는 말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나를 낮추고, 남을 섬기는’ 사랑을 실천합시다.” 라는 뜻입니다. “꼭 그렇게 낮춤과 섬김과 사랑을 실천해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나? 그냥 신앙생활 잘하고 착하게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라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충분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것으로는 못 들어갑니다.>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리고 낮춤과 섬김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4) 예수님의 말씀에서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든지 보잘것없는 이를(‘작은 이’를) 진심으로 섬겨야 한다. 그것이 곧 나를 섬기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또는, “나를 섬긴다면 누구든지 보잘것없는 이를(‘작은 이’를) 섬겨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는,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바로 그렇게 하기를 바라신다.”입니다. 5)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3).”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우리는 낮춘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진심으로 낮추어야 하고, 섬긴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진심으로 섬겨야 합니다. 만일에 자신이 낮춤과 섬김을 실천한다는 것을 생생하게 의식하고 있다면, 그 행위는 곧바로 ‘위선’이 되어버립니다. <낮춘다는 것, 섬긴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려야 하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루카 17,10).>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송영진 신부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