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7주간 금요일 / 이수철 신부님 ~

천상의모후(=수호천사) 2025. 2. 28. 06:19

연중 제 7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정의 여정

“주님과의 우정, 이웃과의 우정, 부부간의 우정”

 

 

 

“주님, 당신의 계명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실로 내 낙이 이것이오이다.”(시편119,35)

 

 

 

우정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친구가 있습니까? 한결같이 평생 함께 하는 도반인 친구입니다. 한둘만 있어도 그 인생 성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우정관계에서 사람의 됨됨이가 잘 드러나니 참사람임이 저절로 검증되는 우정관계입니다. 공자의 논어 서두에도 나오는 인생 삼락중의 하나 역시 우정입니다.

 

 

 

“친구가 있어 멀리서 찾으오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사랑중에서 가장 탁월한 것이 우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이, 시대, 남녀, 국적을 초월하는 우정관계입니다. 주변에서 탁월한 우정관계의 사람들을 보면 참 존경스럽고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에서도 우정의 탁월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더 가고 싶을 때 절제하고, 두려울 때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탁월함이란 완성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다산>

“고요할 때 텅비면 밝고, 밝으면 통한다. 움직일 때 곧으면 공정해지고, 공정하면 넓다. 이러한 상태는 탁월함에 가깝다.”<통서; 주돈이의 책>

 

 

 

참된 우정의 여정에도 고스란히 해당되는 탁월함입니다. 정말 우정의 여정에서 드러나는 이런 탁월한 우정일 때 순수하고 아름답고 참 행복할 것입니다. 이런 우정의 본보기로 생각나는 구약의 다윗과 요나단, 조선시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그리고 다산 정약용과 그의 형 자산 정약종과의 우정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우정의 여정입니다. 단순히 이웃 형제와의 우정만 있는 게 아니라, 주님과의 우정도 있고 이웃형제와의 우정도 있고, 부부간의 우정도 있습니다. 하루 이틀만에 완성되는 우정이 아니라 우정 또한 평생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집회서의 주제는 우정입니다. 너무 적절하고 공감이 가서 전문을 인용하고 싶습니다만, 아쉽게도 집회서 후반부만을 인용합니다.

 

 

 

“성실한 친구는 든든한 피난처로서

그를 얻으면 보물을 얻는 셈이다.

성실한 친구는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어떤 저울로도 그의 가치를 달 수 없다.

성실한 친구는 생명을 살리는 명약이니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그런 친구를 얻으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자신의 우정을 바르게 키워나가니

이웃도 그의 본을 따라 그대로 하리라.”

 

 

 

정말 우정에 관한 금과옥조의 교훈입니다. 이런 우정도 보고 배웁니다. 보고 배울 이런 우정의 사람들은 그 존재자체 만으로 이웃에 큰 공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바 참된 우정의 기초에는 주님을 경외함이 전제조건임이 제시된다는 것입니다. 그 삶의 중심에 주님과의 우정이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님과의 우정과 함께 가는 형제들, 심지어는 부부관계의 우정임도 깨닫습니다. 이것은 제가 수도공동생활을 통해서도 깨닫는 체험적 진리입니다. 다 서로 다른 이들의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산다는 것은 정말 하느님 은총의 기적입니다. 주님과의 우정관계의 여정을 노래한 ‘하늘과 산’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하늘이 주님을 상징한다면 산은 우리 각자를 상징합니다. 지금도 자주 하늘과 불암산을 바라볼 때 마다 되뇌는 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

 

 

 

무려 28년전 시이지만 늘 읽어도 늘 새롭습니다. 바로 일치의 공동체 중심인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공동체 형제들 상호간의 우정입니다. 형제들간의 우정의 기초에 자리하고 있는 주님과의 우정입니다. 그러니 일치의 중심인 주님과의 평생 우정을 돈독히 함이 얼마나 본질적 중요성을 지니는지 깨닫습니다. 형제들간의 우정이 변질되거나 부패됨이 없이 평생 온전함 속에서 원숙하게 익어갈 수 있음의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주님과의 우정입니다.

 

 

 

이래서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바치는 미사와 시편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 수행이요 이보다 주님과는 물론 형제들간의 우정을 북돋우는데 중요한 수행은 없습니다. 부부간의 우정도 예외가 아닙니다. 참으로 성숙해가는 부부는 연정이나 애정으로 시작되어도 결국은 우정으로 변모되어 아름다운 친구관계의 우정이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날로 깊어지는 신뢰관계와 더불어 말이 없어도 마냥 편안한 노년 부부의 모습은, 흡사 일몰시의 평화처럼, 또 가을 단풍 짙어져가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노년 부부는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지요.

 

 

 

오늘 복음의 주제는 혼인과 이혼입니다. 예나 이제나 혼인과 이혼은 영원히 화제의 중심이 되는 주제입니다. 혼인은 이제 공통적인 의무가 아니라 선택처럼 생각되는 현실이요 혼인하지 않은, 못하는 형제자매들이 너무 많습니다. 혼인해도 이혼하여 홀로 살아가는 이들 또한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결혼관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마음이 완고하여 모세가 부득이 이혼을 허락했지만 창조주 하느님의 뜻은 한몸의 일치관계를 이루며 사는 것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혼인관의 대원칙입니다. 그러니 부부간 신뢰의 일치를 깨는 간음이 얼마나 치명적 위중한 대죄인지 깨닫게 됩니다. 간음으로 무너진 부부간 신뢰관계의 회복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간음에 대한 말씀도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그러니 부부간 평생 함께 신의를 지키며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는지요! 답이 없습니다. 늘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삶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단호히 ‘잘살고 못살고 할 것 없이 부부가 함께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이요 성인이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미운정 고운정 들면서 연정도 애정도 우정으로 승화되어 잘 익어가는 우정의 여정이 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이런 우정 역시 필히 주님과의 우정과 함께 감을 봅니다.

 

 

 

부부간 우정의 여정이 이상이라면 이혼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도저히 살 수 없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애는 황홀한 착각이요 결혼은 참혹한 이해’라는 좀 심한 말도 있습니다. 또 ‘가난이 앞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옆문으로 달아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이요 여정인지요!

 

 

 

그러나 함께 살든 혼자살든 교회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가면서 영원한 평생도반이자 친구인 주님과의 우정의 여정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웃형제들과의 우정, 부부간의 우정의 기초가, 기반이 되는 주님과의 우정입니다. 날마다 거행되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서로간의 우정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이게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자 바램입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요한17,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