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 반영억 신부님 ~
천상의모후(=수호천사)
2025. 3. 7. 06:02
3월 7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마태9,14-15)
제1독서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8,1-9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2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3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4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5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4-15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외적인 단식을 통하여 내면의 성숙을」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늘 단식 하는 것이고 따라서 재의 수요일이나 성금요일에 지켜야 하는 단식재를 별도로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진정한 절제와 희생,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보속의 마음으로 매일 아침을 먹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찮아서, 건강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먹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식재와는 거리가 멉니다. 어떤 분은 생일 잔치에 초대받아서 가보니 금요일이고, 고기국이 준비되어서 곤란했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심지어 마음에 걸려서 고기는 먹지 않고 국물만 마셨다고 하시며 고해성사를 보시는 분이 계시고, 모처럼 귀한 손님이 와서 음식점에 가서 불고기를 맛있게 먹고 보니 금요일이기에 성사 보러 왔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럴 때 고해성사를 봐야 하나요?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그것에 죄책감을 지니지 않고 다른 날을 정해서 금육재를 지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어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행으로 몰라서 궐했으니, 죄를 모면 했다고 좋아하고 넘어가는 신자라면 미성숙한 신자입니다(정하권). 진정 깨어 있는 사람은 그 법의 의미를 생각하고 내용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9,14).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슬퍼할 수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9,15). 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혼인 잔치에 온 친구들이고 신랑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즐겁고 기쁘게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직면하게 될 때 단식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지적합니다.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이사58,3). 한다면 그것은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지 단식이 아닙니다. 주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은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사58,6-7).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외적인 단식을 통하여 내면의 성숙을 가져와야 합니다. 마리아 사제운동에서는 “마음의 단식은 너희 자신과 재물과 피조물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에 대해 마음을 닫아걸고 경계함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빵과 물만 먹고 단식하기보다 혀를 억제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고 영적인 단식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단순히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단식을 통하여 욕망을 끊을 수 있는 영적인 성장을 가져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단식의 생명은 자비로움에 있습니다. 단식은 우리를 이웃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단식하는 이들은 그리스도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배고픔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부터 배고픈 이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온 정성을 기울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 맺는 단식이 됩니다. 사실 사랑의 실천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있을 때 잘해!” , “우리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 하루 종일 사랑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구엔반 투안).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반영억 신부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