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 전삼용 신부님 ~

천상의모후(=수호천사) 2025. 4. 23. 05:43
2025년 4월 23일 다해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루카 24,13-35)


복음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4,13-35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의 강론

사람의 본모습은 그 숨은 희생이다

오늘 복음은 성체성사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 줍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을 이렇게 체험합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우리가 만약에 이들처럼 성체 안에서 빵에 떼어 나누어주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만 있다면 지금처럼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기뻐서 부활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결국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 하시는 것은 말씀을 이해시키는 일입니다. 어떤 성경 말씀을 이해시키려고 하셨을까요? 당신이 빵을 나누어주시기 위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성체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말씀 안에서 그분의 수난에 대한 묵상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아주 특별한 영화 ‘시네마 천국’이 있습니다. 성공한 영화감독 살바토레, 우리는 그를 '토토'라고 부를 겁니다. 어느 날 밤, 토토는 고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아버지 같았던 존재, '알프레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죠. 굳게 닫아두었던 기억의 문이 열리고, 이야기는 수십 년 전,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공간, '시네마 천국' 극장이 있던 시칠리아의 작은 마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호기심 많고 장난기 가득했던 꼬마 토토에게 '시네마 천국'은 온 세상과도 같았습니다. 영사 기사 알프레도는 까칠한 듯했지만, 몰래 영사실을 드나드는 토토를 내치지 못하고 결국 둘도 없는 친구가 됩니다. 아버지가 전쟁터에 나가 부재했던 토토에게 알프레도는 영사 기술뿐 아니라 인생의 지혜와 따스한 정을 가르쳐주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죠. 당시 마을 신부님은 영화 속 키스신이란 키스신은 모조리 잘라내라고 명령했고, 알프레도와 토토는 몰래 그 잘린 필름 조각들을 모으곤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청년이 된 토토는 알프레도가 사고로 시력을 잃자 그의 뒤를 이어 영사 기사가 됩니다. 아름다운 엘레나와 첫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군 입대와 엇갈림 속에 사랑은 아프게 끝나버리죠. 실의에 빠진 토토에게 알프레도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작은 마을을 떠나라. 네 재능을 펼쳐. 그리고 절대 돌아오지 마라. 편지도 하지 말고, 나를 찾지도 마라. 네가 성공했다는 소식만 기다리겠다." 마치 냉정하게 등을 떠미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토토의 더 큰 미래를 위한 알프레도의 가장 큰 사랑이자 희생이었습니다.

그렇게 30년이 흘렀습니다. 성공했지만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중년의 토토는 알프레도의 장례식을 위해 마침내 고향 땅을 밟습니다. 모든 것이 변해버린 마을, 폐허가 된 '시네마 천국' 극장 앞에서 그는 알프레도가 남긴 유일한 유품, 녹슨 필름 통 하나를 건네받습니다.

로마로 돌아온 토토는 혼자 영사실에 앉아 알프레도가 남긴 필름을 돌립니다. 화면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수십 년간 신부님의 검열로 잘려나갔던 그 모든 키스 장면들이, 알프레도의 손길로 마법처럼 이어붙여져 하나의 긴 키스 몽타주로 상영되는 것이었습니다! 입을 맞추는 연인들의 모습이 쉴 새 없이 이어지자, 토토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그것은 단순한 필름 조각이 아니었습니다. 토토의 성공을 위해 기꺼이 그를 떠나보내고, 3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유일한 친구였던 토토를 보지 못하는 외로움과 그리움을 감내해야 했던 알프레도의 깊은 사랑과 희생이 고스란히 담긴 마지막 선물이었습니다. 냉정하게 등을 떠밀었던 알프레도의 아픔, 그 긴 시간 동안 토토를 향했던 변치 않는 애정. 그 모든 감정이 키스 장면에 응축되어 있었습니다.

토토는 그제야 알프레도의 진심을 온전히 깨닫고, 스크린 가득 펼쳐지는 사랑의 장면들을 통해 오랜 세월 묵혀두었던 슬픔과 그리움을 씻어내며 마음의 정화를 경험합니다. 3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러서야, 토토는 알프레도가 남긴 가장 특별한 선물을 통해 진정한 그의 사랑과 희생을 마주하고, 가슴으로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하는 행위를 단지 ‘게임’이라고 말합니다. 아들은 자신이 그 게임을 해서 살아났는지 압니다. 그러나 차차 깨닫게 되겠지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는 극심한 고통과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했음을. 이것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아버지를 만나는 과정입니다. 선물의 가치는 그 속에 스며있는 피를 볼 때 알게 되고, 그 가치를 알 때 그 주는 이를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구약에서 ‘요셉’은 왜 형제들에게 일부러 고통을 느끼게 하였을까요? 형제들에게 그가 주는 식량으로 그가 진정으로 누구인지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도둑이라는 오해를 받고 멸시받음의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면,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식량이 자신들이 팔아넘긴 요셉의 피가 스며있음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양식을 먹으면서도 진정한 요셉을 만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주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 묵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기도는 곧 성체 안의 예수님을 알아볼 준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삼용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