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부활 제 2주간 수요일 / 정인준 신부님 ~

천상의모후(=수호천사) 2025. 4. 30. 06:03

4월 30일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5,17-26
그 무렵 17 대사제가 자기의 모든 동조자 곧 사두가이파와 함께 나섰다.
그들은 시기심에 가득 차 18 사도들을 붙잡아다가 공영 감옥에 가두었다.
19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20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21 그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가 가르쳤다.
한편 대사제와 그의 동조자들은 모여 와서
최고 의회 곧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원로단을 소집하고,
감옥으로 사람을 보내어 사도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22 경비병들이 감옥에 이르러 보니 사도들이 없으므로 되돌아가 보고하였다.
23 “저희가 보니 감옥 문은 굳게 잠겨 있고 문마다 간수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 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24 성전 경비대장과 수석 사제들은 이 말을 듣고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며, 사도들 때문에 몹시 당황해하였다.
25 그때에 어떤 사람이 와서 그들에게 보고하였다.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6 그러자 성전 경비대장이 경비병들과 함께 가서 사도들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백성에게 돌을 맞을까 두려워 폭력을 쓰지는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6-21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의 강론말씀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

 

우리의 삶에서 많이 쓰는 말 중에서 ‘사랑’과 연관되는 주제가 제일 많을 것입니다.

우리의 가요 중에 얼핏 떠오른 노래의 첫 글이 생각납니다. 박재란 노래, 차경철 작사,

한복남 작곡한 ‘님’이라는 제목의 가요,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이건만 창살없는

감옥인가...’라는 노래 말이 생각납니다.

 

사랑은 목숨과 같은 것이기에 참으로 소중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사랑에는 아픔과 고통이 따르기에 참다운 사랑으로 가는 것은 쉽지가 않지요.

하느님께서도 이사야 예언서에서도 이미 예언했던 ‘주님의 종의 노래’의 주 내용이

수난 받는 메시아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구약의 이런 예언을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내주신다는 뜻은 사람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시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심판하시기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려는

사랑이신 것입니다.

 

지금은 매가 없어졌지만 저희가 자랄 때만 해도 선생님이나 부모님에게 회초리로 매를

맞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특히 친구들과 싸움을 하면 틀림 없이 어머니께서 매를

드셨습니다.

 

매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잘못에 대한 반성과 시정을 위한 것인데 꼭 협상을 하지요.

 ‘가서 회초리 가져와’하면 벌써 잘못에 대한 매를 맞을 준비를 합니다.

 ‘니가 무슨 잘못을 한 것을 알지?’ ‘몇대 맞을꺼야?’ 아들은 어떻게 하든 덜 맞기 위해

깍으려 합니다.

 

어머니가 제안하신 매가 7대 아들이 흥정한 4대에서 5대나 6대로 낙착이 됩니다.

그런데 막상 때리실 때에는 4-5대로 끝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밤에 어머니는

등잔불로 잠자는 아들의 다리를 비쳐보며 눈물을 훔치신다는 것입니다.

 

누님은 아침에 그 사실을 생중계를 해 줍니다. ‘어머니는 분명 계모’라고 생각하던

아들은 그제야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라틴어로 ‘사랑(amore)’과 ‘쓴맛(amaro)’은 어근이 같다고 하지요?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 아들을 죽음의 고통으로

몰아넣으신 것입니다.

 

대사제와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순명으로 따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듯이 대사제와 사두가이파가 함께 주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며 감옥

가둡니다.

 

그러나 주님의 천사는 감옥에서 사도들을 구출해 주시는데 사도행전은 이 사실을 이렇게

전하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보니 감옥 문은 굳게 잠겨 있고 문마다 간수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 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도 5,23)

제자들도 주님 부활을 선포하면서 감옥에 가고 미움과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 사랑을 나누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달콤함이 아니라 사랑의 고통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정인준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