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부활 제 5주간 금요일 / 정인준 신부님 ~
천상의모후(=수호천사)
2025. 5. 23. 06:17
5월 23일 (백)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성령과 우리는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5,22-31 그 무렵 22 사도들과 원로들은 온 교회와 더불어, 자기들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뽑아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뽑힌 사람들은 형제들 가운데 지도자인 바르사빠스라고 하는 유다와 실라스였다. 23 그들 편에 이러한 편지를 보냈다. “여러분의 형제인 사도들과 원로들이 안티오키아와 시리아와 킬리키아에 있는 다른 민족 출신 형제들에게 인사합니다. 24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에게서 지시를 받지도 않고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 가지 말로 여러분을 놀라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25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뽑아 우리가 사랑하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뜻을 모아 결정하였습니다. 26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27 우리는 또 유다와 실라스를 보냅니다. 이들이 이 글의 내용을 말로도 전할 것입니다. 28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29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30 사람들이 이렇게 그들을 떠나보내자, 그들은 안티오키아로 내려가 공동체를 모아 놓고 편지를 전하였다. 31 공동체는 편지를 읽고 그 격려 말씀에 기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12-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의 강론말씀 예루살렘의 초대 믿음의 공동체는 유대인들 속에서 가장 박해를 받았습니다. 사도들 중에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의 경비대장과 사두가이들에 의해서 연행되어, 유다 지도자들, 원로들, 율법학자들, 대사제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언의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도들의 말을 받아들일 리 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은 사도들을 더욱 거세게 박해하기 시작했고 식탁의 봉사자인 스테파노를 죽이고(사도 7,60), 여기에 가세해서 헤로데 임금은 유대인들에게 호감을 보이려고 요한의 형 야고보를 죽입니다.(사도 12,1) 스테파노가 순교하고 나고 박해가 심해지자 유다 교우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공동체는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사도 11,19-20) 공동체를 세우고 활발한 활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합니다. 레위지파이며 키프로스 섬 출신(사도 4,36)인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파견웠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공동체는 합니다. 여기에서 바르나바의 역할이 드러납니다. 그는 타르수스로 내려가 사울을 안티오키로 데려와서 함께 복음 선포를 시작한 것이지요. 주님의 예견의 말씀대로 사울은 안티오키아에서 장차 이방인의 사도로 발판을 마련합니다.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후 서로 친밀한 관계를 맺지만 할례문제로 심한 논쟁도 벌이기도 합니다.(사도 15,2)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는 레위인으로 (사도4,36) 자신 소유의 땅을 팔아 공동체에 내어 놓을 정도로 공동체에 열성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공동체는 안티오키아 공동체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뽑아 우리가 사랑하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뜻을 모아 결정하였습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사도 15,25-6) 또한 공동체는 편지와 함께 유다와 실라스를 또한 안티오키아에 파견합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안티오키아를 발판으로 여러 곳을 왕래하며 선교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두 번째 선교 여행을 떠나면서 바르나바와 서로 다른 주장 때문에 서로 헤어지게 됩니다.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키프로스로 떠나고 바오로는 실라스를 데리고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다닙니다.(사도 15,36-41)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2-13)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획일적인 면을 강조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한계가 있는 인간에게 실행될 때, ‘무조건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틀이 아니라 각자의 부족한 조건들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부족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이해 해야하며 용서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이해하지 못해서 속앓이를 해야하고 머리로는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꼴조차 보기 싫은 현실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보면 하느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현실에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사울이었던 바오로를 이방인의 사도가 되도록 발판을 마련해준 이는 바르나바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발판으로 삼은 안티오키아에서 그들은 서로의 주장이 맞지 않아서 헤여져야 했습니다. 바오로는 바르나바에게 그러면 안되는 것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그런데 바오로에게도 바르나바에게도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이 선포되는 데는 둘이 함께 있는 것도 좋지만 서로 떨어져서 더 넓게 다양한 지역에서 말씀이 전파되는데에는 둘이 떨어진 것도 큰 역할을 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까지도 당신 복음의 선포를 위해서 쓰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갈라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다양하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숨쉬도록 자유를 주십니다. 그래서 다르고 한계가 있는 인간을 당신의 한 없는 사랑으로 포용하며 하나로, 일치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한계가 있고 부족한 인간이지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형제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는 사랑을 주문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차지하시면 우리가 사랑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부족하 우리이지만 이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부족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전에 이미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러 세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용기있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16절)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정인준 신부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