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부활 제 7주간 금요일 / 송영진 신부님 ~
천상의모후(=수호천사)
2025. 6. 6. 08:10
<부활 제7주간 금요일 강론>(2025. 6. 6. 금)(요한 21,15-19)
제1독서 <예수는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합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25,13ㄴ-21 그 무렵 13 아그리파스 임금과 베르니케가 카이사리아에 도착하여 페스투스에게 인사하였다. 14 그들이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내자 페스투스가 바오로의 사건을 꺼내어 임금에게 이야기하였다. “펠릭스가 버려두고 간 수인이 하나 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갔더니 수석 사제들과 유다인들의 원로들이 그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면서 유죄 판결을 요청하였습니다. 16 그러나 나는 고발을 당한 자가 고발한 자와 대면하여 고발 내용에 관한 변호의 기회를 가지기도 전에 사람을 내주는 것은 로마인들의 관례가 아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17 그래서 그들이 이곳으로 함께 오자,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다음 날로 재판정에 앉아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18 그런데 고발한 자들이 그를 둘러섰지만 내가 짐작한 범법 사실은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19 바오로와 다투는 것은, 자기들만의 종교와 관련되고, 또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 20 나는 이 사건을 어떻게 심리해야 할지 몰라서,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 그곳에서 이 사건에 관하여 재판을 받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21 바오로는 그대로 갇혀 있다가 폐하의 판결을 받겠다고 상소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황제께 보낼 때까지 가두어 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15-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님의 큰 사랑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회개가 시작됩니다.』 1) 베드로 사도는, 얼떨결에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요한 18,15-27), 곧바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크게 통회했습니다(루카 22,62).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바로 잘못을 고백하면서 용서를 청했을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잘못을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고해성사’의 순서를 보면, ‘보속’은 고해성사를 본 다음에, 즉 용서를 받은 다음에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 물으시고, “내 양들을 돌보아라.” 라고 세 번 말씀하신 것은, 그에게 ‘보속’을 주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예수님의 양들을 돌보는 것이 그가 실행해야 할 보속입니다.> 2) 그런데 ‘보속’이라는 말을 ‘죗값’으로, 또는 ‘죄에 대한 벌’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보속’이 ‘죄에 대한 벌’의 성격을 띠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양들을 돌보는 일을 베드로 사도에게 맡기신 것은, 당신을 대리하는 목자 직무를 맡기신 것인데, 그 일이 ‘벌’이라면, 그것은 많이 이상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또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예수님의 양들을 돌보는 일을 ‘벌’이라고 말하는 것은, 더 이상한 일입니다. <‘사랑’이 ‘벌’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경우에는, ‘보속’을 ‘죄에 대한 벌’이 아니라, ‘치유 과정’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죄는 영혼의 병이고, 회개와 고백과 용서와 보속은 모두 그 병을 치유하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에는 병에 걸렸다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넘어져서 다쳤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데,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양들을 돌보는 일은, 그 자신이 넘어져서 생긴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 됩니다. <우리에게도 ‘보속’은 치유 과정이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벌’의 성격을 띨 수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보속’은 주님께서 주신 ‘용서의 은총’에 감사드리는 일이고, 주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그 용서와 감사와 사랑과 응답이 모두 합해져서 ‘치유의 은총’이 됩니다.> 3) 연옥 영혼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보속’과 ‘벌’을 분명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연옥은 ‘벌’을 받는 지옥과는 완전히 다른 곳, ‘보속’을 행하면서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곳입니다. <죽은 다음에 새로 부과된 보속이 아니라, 살아서 다 행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보속입니다.> 주님의 ‘용서의 은총’은 이미 주어져 있고, 실행해야 할 보속은 아직 남아 있는 상태가 연옥입니다. 연옥도 대단히 고통스러운 곳이라고 전해지긴 하지만, 그 고통은 ‘벌’을 받는 고통이 아니라, 부족했던 부분을 채우는 과정에서, 또 병들고 다친 영혼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이기 때문에 지옥의 고통과는 다릅니다. 4)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도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1요한 4,10).> 그래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은,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도 아니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강요하는 말씀도 아니고, 당신이 제자들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다시 깨우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주님의 큰 사랑’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벌 받는 것이 무서워서 하는 회개는 억지로 하는 일이고, 그것은 많이 부족한 회개, 진정성 없는 회개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여라.”가 아니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라고 말씀하셨다는 점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실현됩니다. 우리가 만일에 ‘예수님만’ 사랑하고 이웃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송영진 신부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