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국(스테파노) 신부님 말씀 강
~ 부활 제 7주간 금요일 / 양승국 신부님 ~
천상의모후(=수호천사)
2025. 6. 6. 08:16
2025년 6월 6일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제1독서 <예수는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합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25,13ㄴ-21 그 무렵 13 아그리파스 임금과 베르니케가 카이사리아에 도착하여 페스투스에게 인사하였다. 14 그들이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내자 페스투스가 바오로의 사건을 꺼내어 임금에게 이야기하였다. “펠릭스가 버려두고 간 수인이 하나 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갔더니 수석 사제들과 유다인들의 원로들이 그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면서 유죄 판결을 요청하였습니다. 16 그러나 나는 고발을 당한 자가 고발한 자와 대면하여 고발 내용에 관한 변호의 기회를 가지기도 전에 사람을 내주는 것은 로마인들의 관례가 아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17 그래서 그들이 이곳으로 함께 오자,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다음 날로 재판정에 앉아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18 그런데 고발한 자들이 그를 둘러섰지만 내가 짐작한 범법 사실은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19 바오로와 다투는 것은, 자기들만의 종교와 관련되고, 또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 20 나는 이 사건을 어떻게 심리해야 할지 몰라서,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 그곳에서 이 사건에 관하여 재판을 받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21 바오로는 그대로 갇혀 있다가 폐하의 판결을 받겠다고 상소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황제께 보낼 때까지 가두어 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15-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똑같은 질문을 세 번 반복하신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이루어진 대화가 참으로 특별합니다. 예수님께서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사랑을 확인하는 이 대목을 묵상할 때마다, 혼자 속으로 웃기도 합니다. 이팔청춘 연인 사이도 아니고, 시커먼 남자들끼리, 진지하게 서로 간의 사랑을 연이어 확인하니 말입니다. 정말이지 보편적이거나 통상적이지 않은 장면입니다. 제가 스승 같았으면 아마도 이렇게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신뢰하느냐?” 아니면 “존경하느냐?” “지지하느냐?” “추종하느냐?”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묻고, 수제자는 정말이지, 사랑한다고 세 번씩이나 꼬박꼬박 대답합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대목에서의 사랑은 우리 인간의 머릿속에 떠올리는 그런 세상적 사랑, 인간적 사랑, 찰나적 사랑, 육적인 사랑을 훨씬 능가하는 사랑입니다. 한 차원 높은 사랑, 보다 고결하고 순수한 사랑, 결국 영적인 사랑, 신앙 안에서 사랑, 주님 안에서의 사랑, 크고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 번째 받았을 때, 베드로는 마침내 스승님의 의도를 알아차렸습니다. 얼마 전 자신이 스승님을 세 번이나 배신한 수치스러운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참으로 고단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야단 한번 치지 않으시고, 언성 한번 높이지 않으시고 똑같은 질문 세 번을 통해, 수제자 배반 사건을 제대로 질책하신 것입니다. 똑같은 질문 세 번을 통해 수제자에게 고강도 정신 교육을 시키신 것입니다. 똑같은 세 번의 질문에 거듭 똑같은 대답을 반복하면서 수제자는 더욱 마음을 새롭게 하였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나는 더 이상 스승님을 배반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목숨이 끊어지면 끊어졌지 더 이상 스승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고단수이신 예수님의 특별한 제자교육방식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수제자 직분을 수여했지만 베드로 사도가 못내 못 미더웠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럭비공 같아서 언제 어디로 튈 줄 모르는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뜨겁게 타올랐다가도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다혈질 베드로 사도를 잘 파악하고 있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한번 두 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질문을 거듭하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그런 예수님의 진의를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창피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지만 마음속으로 굳은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스승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제자의 세번이나 반복되는 사랑 고백이자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 그때 마다 한 가지 당부 말씀을 건네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얼마나 고마운 예수님의 당부인지 모르겠습니다. 세 번이나 배반한 수제자, 그러나 크게 가슴을 치고 회개하며 거듭난 수제자에게 건네신 스승님의 신신당부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당신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시면서 수제자에게 양들을 잘 돌보라고 간곡히 당부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은혜롭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도 듭니다. 예수님 권고 말씀에 따라 사목자로서 양들을 잘 돌봐서 영적·육적으로 살찌우게 만들고, 기쁨과 행복을 주는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데, 그와 반대로 오히려 목자가 양들을 힘들게 만들고, 궁지로 몰아넣고, 짜증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큰 걱정이 앞섭니다. 예수님의 권고 말씀에 따라 세상의 모든 목자들의 양들을 좋은 풀밭으로 잘 이끄는 존재, 양들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존재로 거듭 회심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양승국 신부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