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 12주간 월요일 / 조명연 신부님 ~
2025년 6월 23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예전에 어느 신부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너의 글에는 깊이가 없어.”
상처를 받았습니다. 나름으로 열심히 묵상해서 쓴 글인데, 더구나 신자들이 어렵지 않게 읽고 묵상할 수 있도록 쉽게 쓴다고 쓴 것인데 이를 깊이 없다고 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역시 그 신부를 비판하고 싶었습니다. ‘너는 얼마나 깊이가 있는데?’라고 말이지요.
독일 작가 파트리트 쥐스칸트의 책 내용이 생각납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화가는 자기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깊이 없다는 말에 큰 상처를 받고 매일 고민하게 됩니다. 그 깊이를 만들려고 정말로 노력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깊이가 없다며 비판하는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화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뒤에 이 화가가 지나친 강박을 가지고 있다면서 또 다른 비판을 했습니다. 누구 때문에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를 전혀 모르면서 말이지요.
깊이가 무엇일까요? 수영장에 가면, 누구는 깊은 곳에서 또 누구는 낮은 곳에서 수영을 즐깁니다. 자기 수준에 맞는 깊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영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제일 깊은 곳에서 수영하면 어떨까요? 위험한 상황을 접하게 됩니다. 즉, 자기 수준에 맞는 곳에서 수영하는 것이 가장 옳은 선택이 됩니다.
“나의 깊이는 낮다.”라고 인정하면 편해집니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나의 비판도 생기지 않습니다. 예전에 누가 상대방에 대해 비판하면 친구들과 서로 웃으며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네 똥 굵다.”
맞습니다. 비판받았다고 해서 억울할 필요가 없고, 또 비판받았다고 해서 비판으로 맞대응할 필요도 없습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입니다. 나는 그냥 나답게 낮은 깊이로 살면 그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 7,1)고 하십니다. 이 심판은 단순한 의견이나 판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단죄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느님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이렇게 심판한다면,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향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위선자야.”(마태 7,5)
남을 쉽게 판단하거나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겸손하게 자기를 성찰하면서, 타인에게 사랑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편안한 삶을 살면서 지금을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지금의 삶은 지난날 당신이 한 생각이 현실에 반영돼 나타난 결과물이다(론다 번).
사진설명: Domenico Fetti , The Parable of the Mote and the Be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