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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영성이야기

~ 하늘의 철학을 지상으로 끌어내린 위대한 현자 / 소크라테스 ~



하늘의 철학을 지상으로 끌어내린 위대한 현자 / 소크라테스

      “서구 철학의 기초를 쌓은 ‘세계 4대 성인’
      ‘악법도 법’ 주장 후대 독재자들이 꾸민말
      “산파술로 국민들 무지-자아 회복 일깨워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는 부처님, 예수님, 공자님과 함께 ‘세계 4대 성인’으로 추앙되고 있다. 어떤 기준으로 선정됐는지 모르지만, 서양 사상사에 끼친 그의 공헌을 생각하면 그리 지나친 평가라 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철학사 전체를 ‘소크라테스 이전pre-Socratic’과 그 이후로 나눌 정도로 일종의 분기점의 역할을 한 사람이다. 키게로는 소크라테스를 두고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린 사상가”라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서구 철학의 기초를 형성한 사람으로서 플라톤과 그 이후 그리스 철학자들 뿐 아니라 서양 사상사 전체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철학자 풍유란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관계를 중국 철학에서 공자와 맹자, 순자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아테네의 가난한 석수 아버지와 산파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늦은 나이에 결혼하였는데, 그의 아내 크산티페는 ‘악처’라는 어느 정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 이들 사이에는 아들 셋을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의 용모에 대한 기록이나 지금까지 보존된 흉상에 의하면 그는 못 생긴 남자였다. 대머리에 눈도 툭 튀어 나오고 코도 뭉툭하고 입술도 두툼한데다가 배까지 불룩하여 땅딸막한 남자의 상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그는 여러 가지 탁월한 덕성을 갖추고 있어서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특히 집중력이 강하여 어느 생각에 몰두하게 되면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몇 시간이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 정규 교육은 받지 못했다. 젊어서 보병으로 세 번이나 전쟁에 참가하여 병역 의무를 수행했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철학에 심취하기도 하고 그 당시 유행하던 소피스트(궤변철학자)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러나 자연철학이나 소피스트 철학 둘 다에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지적으로 방황하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사명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자기가 할 일이 바로 아테네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우고 인간 속에서 참된 자아를 찾는 것이라 생각했다.

누추한 옷을 입고 아테네 시가를 걸어 다니며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나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얻도록 했지만, 무보수였기 때문에 가난한 삶을 면치 못했다.60세 정도에 의회 의장직을 맡기도 했지만 곧 이어 70세에 ‘국가에서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력을 도입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불경죄’로 사형 언도를 받고 다음 해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독배를 마시고 숨을 거두기 직전 “크리톤이여, 우리가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 빚을 졌지 않소. 잊어버리지 말고 그에게 진 빚을 갚도록 해주오.”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는 또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소. 각자 제 갈 길을 갑시다. 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어느 쪽이 더 좋은가 하는 것은 신만이 알 수 있을 뿐”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소크라테스 스스로는 아무 글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사상이란 사실 거의 모두 그의 제자 플라톤을 비롯하여 크세노파네스 및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기록을 통해 전해내려 오는 것이다. 그의 말들은 거의가 플라톤이 쓴 많은 저서에서 등장인물로 나타나 다른 이들과 나누는 대화를 이끌어가면서 한 말들이다.

이 때문에 학자들 중에는 우선 소크라테스가 역사적 인물인가 의심하는 이들도 있고, 또 비록 역사적으로 실존하는 인물이었다 하더라도 플라톤이 그의 저서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실질적으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상을 표현한 것일 수 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사상이란 결국 플라톤의 사상이 아닌가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문제가 철학사에서 자주 거론되는 ‘소크라테스의 문제(Socratic problem)’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복잡한 역사적 문제를 떠나 플라톤의 대화에 등장해서 소크라테스가 했다는 말을 일단 소크라테스의 사상이라 가정하고 그의 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소크라테스, 불타, 공자, 예수』를 쓴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에 의하면 소크라테스의 삶을 이루고 있는 핵심적인 요소는 세 가지였는데 1) 진리는 우리가 끊임없이 질문하면 스스로 들어난다는 것,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허무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삶에 필수적인 앎에 이르게 된다는 것에 대한 신뢰심 2) 국가의 신성성에 대한 믿음 3) 자기 자신의 다이모니온에 대한 확신이라고 했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이런 관점에서 일별해 보기로 하자.네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가 35세∼ 40세 사이 그의 친구 하나가 “아테네에서 제일가는 현자는 소크라테스이다”라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을 소크라테스에게 전해주었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당시 아테네에 사는 유명 인사들을 만나보았다. 그 결과 그들도 역시 무지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기와 이 사람들과의 차이는 자기는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테네의 다른 이들은 자기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자기의 무지를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가 아테네 제일가는 현자로 칭함을 받게 되었음도 깨달게 되었다. 이처럼 “내가 아는 것은 오로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 뿐”이라는 식으로 자기의 무지를 아는 것을 중세 철학자 쿠자누스는 ‘박학한 무지(docta ignorantia)’라 했다.

이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소크라테스는 “네 자신을 알라(gnosi seauton)”는 것을 그의 철학적 삶을 이끄는 원칙으로 삼았다. 이 말은 사실 소크라테스 자신의 말이 아니라 델포이 신전의 신탁으로 그 신전의 비명(碑銘)이었다. 아무튼 이 말처럼 아테네 사람들이 스스로의 무지를 깨닫고 무지와 편견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목적을 위해 소크라테스가 취한 방법의 특징 중 하나는 대화를 중시했다는 것이다. 아테네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하기를 좋아했지만 특히 소크라테스는 대화야 말로 진리를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이라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서 교육이란 모르는 사람이 질문을 하고 아는 사람이 가르치는 것처럼,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일방통행 식으로 지식을 주입시키는 통상적 방법이 아니었다. 이런 대화를 통해 서로 일깨움을 얻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대화할 때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이론이나 논리를 전개해서 상대방을 가르치거나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질문하고 상대방의 대답 자체에 모순이 있음을 보여주어 상대방이 스스로 자기의 무지를 깨닫고 앎에 이르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라는 것이다. 산파는 아기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산모 속에 있는 아기가 밖으로 나오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는 사람인 것처럼, 서로 대화를 통해 다른 사람 속에 있는 진리의 씨앗을 이끌어 내는 방식을 취한다는 뜻이다. 마치 용수의 공(空) 사상에서 말하는 부정의 논리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소크라테스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스스로를 아테네 사람들을 괴롭히는 쇠파리(godfly)라 했다. 안이한 생각과 지적 자만에 빠진 아테네 사람들을 성가시게 함으로 아테네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기들의 참나를 발견하도록 애썼다는 뜻이다.

소크라테스는 지식과 행동이 하나라고 주장했다. 진정으로 알면 그것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고, 실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옳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없지만, 옳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이론을 자신의 삶을 통해 스스로 보여주었다. 그가 체포되고 사형 선고를 받은 다음 사형이 집행되기 전 그의 친구가 탈옥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국가와 그 법을 저버릴 수 없다고 하여 그 청을 거부하고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악법도 법이다”는 소크라테스 자신이 한 말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기 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던 국가의 신성성에 대한 믿음 때문에 죽음을 택한 것이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기초로 하여 꾸민 말로서 그 후 독재자가 즐겨 쓰는 말이 되기도 했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 철학자처럼 모든 것을 회의하거나 모든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만 여기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천박한 변증법적 유희가 그의 사고를 인도하도록 버려두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 속에 일종의 내적 소리와 같은 것이 깃들어 있어서 자기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준다고 믿었다. 그는 이것을 ‘다이모니온(daimonion)’이라 했다. 일종의 양심의 소리, 혹은 도(道)의 힘 같은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 스스로는 학파를 형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플라톤과 다른 네 명의 소크라테스주의자들에 의해 이른바 소(小)소크라테스 학파가 성립되었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그의 애제자 플라톤에 의해 계승되고 논리적으로 더욱 체계화되고 구체화되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두고 “당대의 모든 사람 중 가장 사려 깊고 정의로운 사람이었다”고 칭송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소크라테스의 삶과 가르침을 보면서 우리는 새삼 배부른 돼지로 만족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어 우리의 삶을 검토하고 우리의 무지를 깨달음으로 참나를 찾는 경지에 이르려고 할 것인가 자문해 보게 된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