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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들의 말씀

~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 송영진 신부 ~

<사순 제2주간 토요일 강론>(2026. 3. 7. 토)(루카 15,1-3.11ㄴ-32)


복음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의 복음강론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1)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회개하고,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여라.” 라고 ‘모든 사람’을 초대하시는 말씀입니다.
‘작은아들’에게 초점을 맞추면, 늦기 전에 회개하라는 권고이고, ‘큰아들’에게 초점을 맞추면,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하느님과 함께 기뻐하라는 권고입니다.


‘작은아들’은 세리들 같은 죄인들, 또는 죄인이라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이고,
‘큰아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또는 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인데,


처음부터 ‘작은아들’과 ‘큰아들’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상황에 따라서 ‘작은아들’이 되기도 하고, ‘큰아들’이 되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작은아들’과 ‘큰아들’의 모습을 동시에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에게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의의 심판’을 내려 달라고 간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상황을 합해서 생각하면, ‘작은아들’은 ‘회개한 죄인’이고, ‘큰아들’은 ‘회개해야 할 죄인’입니다.

2) 하느님은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분이지만,

그 ‘기다림’은 ‘무한정’이 아닙니다. ‘심판의 날’은 하느님의 기다림이 끝나는 날입니다. 우리는 ‘심판의 날’이 언제인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언제까지 기다려 주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니까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4-36).”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는 작은아들이 모든 것을 탕진하고 곤궁에 허덕이다가 정신을 차린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루카 15,14-17), 만일에 돈이 아주 많아서 늙어 죽을 때까지 곤궁에 허덕이는 일이 없었다면?
인간 세상의 실제 현실을 보면, 그렇게 살다가 끝끝내 회개하지 않고 그대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불효를 깨닫고 뉘우치는 것처럼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지금 회개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최후의 심판이 아니더라도, 죽어서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그때서야 뒤늦게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3) 뉴스를 보면서, “하느님께서는 왜 저런 악인들을 내버려 두시는가? 자비도 필요하겠지만, 때로는 ‘정의의 심판’이 더 필요할 때가 있지 않은가?” 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큰아들’이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회개한 죄인을 용서하더라도, 죄에 대해서는 합당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생각.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너 자신이 지은 죄부터 회개하여라.” 라고 말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작은아들’과 ‘큰아들’의 중간쯤에 있는 사람이라면?
또는 어떤 끔찍한 사건의 실제 피해자라면?
나의 ‘큰 상처’와 ‘원한’은 그대로 남아 있고 가해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어서, 하느님의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는데, 가해자는 회개했다고 해서 용서받고 하느님의 잔치에 참석해서 잔치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런 상황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이해하는 것은, 또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하느님과 함께 기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단,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고 해서 ‘정의의 심판’을 소홀히 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에 스테파노 순교자가 순교 때에 박해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지 않고 ‘정의의 심판’을 청했다면?
그리고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바오로 사도를 만났을 때,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인정하지 않고 형제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면?


<그런데 스테파노 순교자는 박해자들이 회개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를 청하는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바오로 사도를 만났을 때, 분명히 크게 기뻐하면서 반가워했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 송영진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