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 제5주간 화요일 강론>(2026. 5. 5. 화)(요한 14,27-31ㄱ)
복음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27-31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의 복음강론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1)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라는 말씀을 묵상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부터 해야 합니다. “나는(우리는) 정말로 간절하게 평화를 원하는가?” 인간들 가운데에는 평화보다 전쟁을 더 좋아하고, 평화보다 전쟁을 더 원하는 자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말에 ‘호전적’이라는 말이 있는 것은, 전쟁을(싸움을) 좋아하고 원하는 자들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구약성경 역대기 상권에 “해가 바뀌어 임금들이 출전하는 때가 되자” 라는 말이 있습니다(1역대 20,1). 이 말은, 정기적으로 스포츠 경기를 개최하는 것처럼 전쟁을 했음을 나타내고, 또 마치 스포츠를 즐기듯이 전쟁을 즐겼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미개했던 옛날의 일만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전쟁을 좋아하고 즐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할 말은,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 26,52).” 라는 예수님 말씀뿐입니다. 2) “칼을 잡지 마라. 싸우지 마라. 평화를 추구하여라.” 라는 말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할 말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지킬 힘도 없는 사람들은 정말로 간절하게 평화를 원합니다. 문제는 힘이 있는 자들입니다. 힘이 있으면 그 힘을 쓰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일까? 인간들은 총을 가지고 있으면 그 총을 쏘고 싶어 하고, 칼이 있으면 그 칼을 사용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군대도 많고 무기도 많은 강대국이 전쟁을 일으킵니다. 개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이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참아라. 용서해라. 앙갚음하지 마라. 사랑하여라.” 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고, 그 사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 될 뿐입니다. 힘이 있는 자들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강대국이, 또 힘이 있는 자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인간 세상은 항상 전쟁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신앙인은) 강대국들과 그 나라들의 정치 지도자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박해를 받더라도 언제나 항상 ‘선한 약자들’ 편에 서야 합니다. 3)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라고 말씀하셨으면서도,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답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도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3-54)” 예수님의 평화는 ‘십자가 희생’에서 비롯된 평화입니다.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이라는 말은,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로마제국 군대보다 훨씬 더 강력한 군대라는 뜻인데, 인간 세상의 어떤 군대도 예수님의 군대에게는 상대도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힘이 없어서 당하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힘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평화입니다. 반면에 세상의 평화는 힘 있는 자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강자들만의 평화’입니다.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거짓 평화이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것입니다. 4) “세상의 우두머리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라는 말씀도, 힘이 없어서 수난을 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권한’이라는 말에서, 빌라도가 한 말이 연상됩니다. “나는 당신을 풀어 줄 권한도 있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요한 19,10)” 빌라도의 권한은 ‘선과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 의무와 하나로 묶어져 있는 권한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요한 19,4.6).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권한으로 예수님에게 무죄선고를 내리고 예수님을 석방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군중의 압박만 두려워해서 죄 없으신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권한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은 ‘직무유기’이고, 하느님을 거슬러서 사탄의(악한 자들의) 편에 선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렇게 해서 평화를 얻을 수 있었을까? 하느님을 거스르고 악의 편에 서서 ‘참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송영진 신부 - |
'여러 신부들의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 부활 제 5주간 수요일 / 반영억 신부 ~ (0) | 2026.05.05 |
|---|---|
| ~ 부활 제 5 주간 화요일 / 반영억 신부 ~ (0) | 2026.05.05 |
| ~ 부활 제 5주일 / 조재형 신부 ~ (0) | 2026.05.03 |
| ~ 부활 제 5주일 / 전삼용 신부 ~ (0) | 2026.05.03 |
| ~ 부활 제 5주일 / 송영진 신부 ~ (0) | 2026.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