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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영성이야기

** 광배와 친구들의 토마스 머튼 읽기 **

광배와 친구들의 토머스 머튼 읽기

[생활하는 신학-최우혁]

겨울바람을 맞으며 시작한 대학에서의 한 학기가 등록금 태풍을 눈 앞에 두고 종강했다. 삶과 성찰을 어찌 분리할 수 있으랴! 돌아보면 비가 내리기 전의 고요함으로 기억될 이번 학기에 맡았던 과목중의 하나는 <영성신학 개론>으로, 가능한 한 일방적인 강의가 아닌 수강하는 학생 열 여덟 명 모두와 함께 영성이란 주제로 삶을 성찰하고, 더불어 영적 신비의 주체인 인간과 하느님의 교감을 나누는 길을 모색하는 수업으로 구성하였다.

 

그 한 과정으로 우리시대의 대표적인 영성가로 알려진 토머스 머튼(1915-1968)의 일기를 그의 동료인 패트릭 하트 수사가 발췌하고 편집한 <시간> (The Intimate Merton: His Life from His Journals, 류해욱 번역, 바오로딸 출판사, 2010)을 읽으면서 그와 그의 영적 세계를 만나고, 동시에 우리들 각자의 영적 세계를 재인식하고 그 길에 접어드는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우리들의 영적 독서와 나눔이 ”영성”이란 주제에 가까이 가고픈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것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래서 이 지면을 통하여 광배를 비롯한 우리반 친구들이 토머스 머튼의 작품을 함께 읽고 나눈 이야기들과, 그의 경험을 통과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성찰한 편지, 일기 독후감으로 분류되는 글, 그림, 동영상 등, 보고서의 일부를 발췌해서 소개한다.

 

* 교수님으로부터 머튼의 <시간>이라는 책 읽기를 권고 받았을 때 책의 두께와 책 속의 난해한 문장들은 날 압도시키기에 충분했다. … 머튼의 책을 읽으면 감명 깊었던 구절에서 쓰여진 단어를 중심으로 5개의 키워드를 잡았다: 욕망, 평온, 고독, 사랑,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광배)

* 사랑에 대하여: 오직 인류를 사랑한 사람뿐만 아니라 한 이성을 진심으로 사랑해 본 사람만이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고 난 생각한다. 어찌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그것을 하나의 죄로 보는 사람이 어찌 쉽게 자신을 사랑할 수 있으며, 어찌 하느님께 쉽게 다가갈 수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도 이런저런 사랑을 겪어본 뒤에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잘 느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 일기에서 머튼은 겸손한 축에 속하는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남의 눈에 비친 자신의 왜곡된 모습을 경계하고 ‘참 자아’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45세의 나이에 아직 완전한 자아를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이 일기 자체가 그리도 흔들리는 자신을 바로잡으려 했던 치열한 노력의 증거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 일에 대한 확신과 열정이 가장 중요하다면, 머튼의 방법은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나는 우리 시대 최고의 영성가인 토마스 머튼의 일기가 마치 영성을 깨우치는 비기를 담고 있는 비서이기를 바랬다. 하지만 왕도가 없는 것이 신앙일까? 머튼의 일기에는 비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 그렇다면 왜 기분이 좋기도 했을까? 역설적으로 그 이유 또한 신앙생활에 왕도가 없다는데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신앙이 흔들릴 때 당신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하고 머튼이 묻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이성으로만 신앙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것이 안되자 내 손을 놓아버렸다. 매일매일 노력하는 머튼과 확연히 비교되는 부분이다.

* 머튼은 세속적인 평가나 제도적인 틀에서 자유롭기를 원했다. 그는 하느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의도하신 성소에 충실하기를 원했다. 그 최선의 방법이 은수자로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자기로서 머물 수 있는 상태에서 글을 적어갔다. 그는 자신의 글에 대해서 자주 혹평을 서슴지 않았지만, 그의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고독과 침묵의 결과물이며, 그 안에서 성숙하고 자라났다.

* 머튼은 하느님께 순명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다. 그는 세속의 삶을 뒤로 하고 겟세마니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자로서 살아가기 시작했는데, 먼저 작가로서의 삶과 수도자로서의 삶 사이에서 갈등하였다. … 그러나 물리적인 고독, 홀로 있음의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고, 그는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살아가며 내적 고독을 추구하는 타협점을 찾는다.

* 머튼은 자신의 일상을 마치 영적 성장의 길로 단련시키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으로 그려내고 있다. 부르심을 받은 이후 교회를 접하면서부터는 자연스럽게 교회의 전례력에 따른 피정과 사제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묘사한다. … 그는 성인이 되고자 노력했으며, 그가 말하는 성인이란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머튼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응답하며 충실하게 살아갔던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인간적으로 연약한 많은 부분들을 숨기거나 부정하지 않으려 했다.

* 요한 성인은 영혼이 병들어 하느님의 일을 지속적으로 찾다가 영혼의 일을 시작하는 것을 관상의 시작으로 보았는데, 이는 머튼이 부르심을 받고 고독과 침묵을 위해 어둔밤으로 침잠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피조물의 관심을 줄이고 자기 영혼의 가난을 인식하며 겸손 속에서 ‘죽음’을 겪는 과정 또한 그가 수도자로서 참 삶을 추구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 머튼은 이러한 관상의 과정을 혼자 독거하는 은수자로서, 그러나 은수자 그 자체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내 자신이 되어 하느님께로 다가가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한다. …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했던 머튼의 삶은 비종교인 또한 본받을 만하다. 이따금 홀로 피정의 날을 정해, 스스로를 정화하는 영적 시간을 가지는 것은 하느님을 영접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실제로 머튼은 그의 생애를 통하여 점진적이지만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다. '하느님과 일치'한다는 개념이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확장되어 갔지만, 이처럼 변해가는 통찰들이 하느님과 일치하려는 그의 노력이나 열망을 식게 하지는 않았다. … 일기에 나타난 그의 일상은 이러한 하느님을 아는 것에 대한 그의 이해와 자각의 성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 결국 머튼은 수도자로서 ‘관상 자체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이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침묵과 고독에 이르는 관문인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 1958년 9월 27일 일기에서 머튼은 ‘글쓰기는 사유이고 삶이며 기도’라고 썼다. 그는 이날 일기에서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 냄새, 풍경, 소리에 대해 기쁨을 느끼고 하느님께 감사한다. 그의 모든 일기에서 나타나는 이것이 나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 토마스 머튼과 같이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축복, 기쁨에 대해서 진지하게 탐구해보겠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온 것이며, 누구에 의해 온 것인지? 내가 그것들을 느낄 자격은 있는 사람인지 진지하게 탐구하며 생각해 본다면 지금 나의 고민도 언젠가는 깨끗하게 해결 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 머튼은 탁월한 의사소통을 통하여 독자들과 진정한 교감을 이룩하였다. 어떻게 이런 깊은 영적 교제가 가능했을까? 머튼은 자신이 하느님께 속하였으며,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체험으로 알고 있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자리라 생각한다. 머튼은 만나는 모든 사람 안에서 이 공통되는 근원을 찾으려고 했다.

* 그는 늘 무엇인가를 깨닫는 듯 하다. 하느님이 바라는 대로 자신을 돌보는 일을 일기를 통해 잘 해낸 것 같고, 다시 오지 않을 하루하루를 기록하고 감사했다. 내겐 그저 수많은 일요일 중 하루를 그는 신비스럽고 기쁜 주일로 받아들이며 행복감을 느낀 것이다. … 그리고 이일기는 12월 8일을 끝으로 한다. 왠지 예정되어있는 죽음을 보는 듯해서 가슴이 아팠다. 작가였던 만큼 그의 일기는 맛이 있었고, 내게 의문점과 깨달음을 주었다. 책 표지에 ‘내가 쓴 최상의 글은 일기 속에 있다’ 라고 쓰여있던 문구가 이해가 간다. 나와 너무 다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나랑 너무 닮았던 토마스 머튼이다.

* 머튼이 고독을 추가하기 위해 갔던 수도원에서 다시 고독을 찾아 나선다는 것이 조금은 아이러니한 수도원의 불완전함도 보여준다. 어쩌면 우리가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우리에게 이런 문제들이 따라 다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는 창조주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인 인간 그 차제로서 기뻐해야 한다. 그분도 우리처럼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 토머스 머튼의 <시간>, 이 책은 내가 읽고 독후감을 써야 할 책인데, 일단 일기 형식이라는 말과 또 남의 일기를 훔쳐볼 수 있구나 하는 기대감에 책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은 없었다. … 책을 읽으면서 나도 글을 일기 형식으로 쓰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읽지는 못하고 어쩌면 오랫동안 읽어서 일기의 기간이 길어질 수 있겠지만, 책을 읽는 동안은 머튼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를 흉내 내어 일기를 써야겠다.

2011. 3. 22 / 오늘은 머튼을 도서관에서 읽었다. 머튼의 책이 좋은 점은 일기 형식이어서 어느 때에 읽더라도 내용이 끊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 영성에 대해 경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때 빼놓으면 안될 것은 그 사람의 평범한 일상이다. 따라서 영성체험은 어느 한때를 가리키기 보다 그 사람의 인생을 가리키는 것이 정확하다는 생각이 든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의 영성에 대한 갈구나 사색이 없었다면 영성 체험은 없거나 그냥 모르고 지나쳐버릴 일이 될 것일지도 모른다.

2011. 2. 23 / 머튼은 나와 비슷한 사람이었다. 머튼에 대해 모욕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라, 책 속에서 그는 여느 위인전기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인간적이다. 머튼과 나는 또 비슷한 상황에 있는데 그것은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다. 평소 가지고 있던 감정을 머튼의 정제된 글로 읽으니 가슴이 철렁거렸다. 머튼은 자신의 일기에서 “아버지는 평생 일만 했다. 그 덕에 나는 1935년 컬럼비아 대학 교기를 꽂아놓은 깃대 난간에 앉아 데이트를 즐기지 않았던가 –

나는 그 희생의 선물을 마치 내가 신이라도 된 양 당연히 받아들였고 그 희생을 하느님 것이 아니라 내 것인 양 착각하며 살았다 – 사랑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우리가 받을 몫을 주기 위해 그들이 우리에게 온 것이라고 착각한다.” 공감을 넘어서 그냥 머튼이 나보고 읽고 양심의 가책을 받으라고 써놓은 구절 같다. 내가 양심의 가책을 받는 이유의 하나는 나도 부모님의 희생에 대해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알 정도로 나이를 먹었고 분별력이 생겼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그러면서도 머튼이 말한 것처럼 ‘고마움’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2011. 4. 30 / 비오는 날이 좋은 이유는 빗소리밖에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고요하다. 이러한 고요함 속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든 왠지 운치 있게 느껴진다. 머튼도 수도자로서의 참 삶을 추구하면서 침묵을 추구한다. 그것이 그를 기도 속으로 더욱 더 침잠하게 한다고 한다. 오늘 같은 날, 머튼도 집에서 비가 오는 것을 반기며 가만히 고요함을 느끼면서 기도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머튼도 비오는 날을 좋아했을 지도 모르겠다.

2011. 5. 3 / 머튼은 여러가지 일을 하였지만 그 속에서 항상 주님을 품고 있었다. 책에서도 말하듯이 그는 자신의 자아를 버리기를 희망할 정도로 자신을 온전히 주님에게 바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신비 체험이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를 이끌었던 것은 주님에 대한 확신, 단 한가지뿐이다. 주님은 실재하시며 나와 늘 함께 하신다는 확신. 이렇게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그의 생각에는 어떠한 고정관념도 없었고, 그러기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머튼의 이러한 바보 같은 확신이 논리와 이성이 중시되는 현대에 사는 사람에게 깨달음을 준다.

 

 


 

 

* 머튼이 주장하는 평화론이 개인적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 핵의 문제, 전쟁의 문제, 재해의 문제, 그 어떤 것에도 인간은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를 시도하는 것은 왜일까? ... 머튼의 삶은 진리라는 결과보다 구도 과정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서 보아야 한다.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가 되는 듯하다. 구도자의 삶이 고독을 갈망하고 고뇌한다는 것이라면,이것은 하느님을 믿는 우리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대두되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 그는 나이가 들어서 M을 만났고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는 영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현실적으로 눈빛으로 사랑하는 것의 유효기간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하느님은 내가 알기로는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왜 성직자들은 남녀간의 사랑을 금지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사랑하는 연인간의 성을 추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토마스 머튼은 현실을 직시해서 사랑을 끝내야 한다고 했을까. 아마 나라면 당연히 현실을 직시하고 그녀에게 가서 사랑을 퍼부었을 것이다.

* 그가 일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 가며 쓴 내면의 종교적 성찰들은 내게 남아있지 않다. 내게 남은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일기 속에서 머튼이 쉼 없이 헤매고 방향을 잃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머튼이 자신의 일기를 다른 사람들이 읽을 것을 알고서 스스로 그것을 썼다는 것이다. … 하지만 머튼이 이러한 자신의 방황을 그대로 일기에 써둔 것은 생각해볼 만하다. 즉, 머튼의 일기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머튼은 자신의 일기를 통하여 자신이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흔들리면서 이루어나가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닐까. 즉, 목표가 주님을 향해있다면 도중의 흔들리는 과정도 주님의 뜻을 이루는 부분이다. 머튼을 통해서 나는 복잡하게 엉킨 삶의 한 매듭을 푸는 열쇠를 찾았다.

* 세상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빼았길까봐 두려움에 떨 때 머튼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할까봐 두렵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침묵과 가난과 ‘홀로 있음’의 축복을 즐겼다. 따라서 모든 인간과 자연이 그에게 이르러서는 하느님과 다름이 없었다. … 토머스 머튼처럼 항상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 그런 삶을 나도 살아보고 싶다.

* “빗방울이 나뭇잎에 떨어져 튀기 시작했다. 비가 그쳤다. 하늘은 우중충하다. 새들이 지저귄다. 저 멀리 들판에서 밀이 익고 있는데, 하얀 꽃들이 바람에 춤을 춘다.” 토요일 밤, 마침 봄비가 내리고 그친 날에 이런 구절을 읽노라면 천천히 자연을 생각하며 읽느라 읽기 속도가 더뎌진다. 그래서 아직도 책갈피가 끼워진 채, 책은 아직도 삼분의 일이 남아있다.

* 토머스 머튼 님께,
사실 저는 평소에 종교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번학기에 제가 수강하고 있는 영성신학개론 이라는 수업이 아니었다면 저는 토마스 씨를 아마 평생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당신의 일기를 책으로 읽은 것은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받아 보았어요. 아, 인터넷이 뭔지 생소하시죠? 인터넷을 설명해도 잘 모르실 테니 이 이야기는 그만 할께요. 그 때 그 사이트에 쓰여있던 글 중에서 인상 깊었던 문구중의 하나가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영적 스승이라는 말이었어요.

이렇게 위대한 분이셨다니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근데 일기를 계속 읽어보니 영적 스승이라는 칭호에 걸맞지 않게 갈등도 많이 하시고 사랑도 하셨더라구요. 특히 징집 영장을 받으시고 군대에 끌려가기 싫어하셨던 걸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군대 들어가기를 좋아하는 남자는 없는 것 같아요. 여기까지만 보면,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겠지만 항상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시고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도 하느님을 연결시키면서 항상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시는 모습에 대단함을 느꼈습니다.

아저씨의 일기를 읽으면서 요즈음 저의 생활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바쁘게 살아오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나’라는 존재인 것을 잠시 잊고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저 무의미하게 하루를 끝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는 조금은 저 자신에게 무게중심을 두며 살아가려 합니다. 제가 존재하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이 다 소용없겠죠.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요한 1, 3-5)


 

▲한 친구의 그림 1.
내가 다시 태어날 때에는 처음 태어날 때처럼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처음에는 나를 단 한마디 말씀으로 만드실 수 있었다. 그러나 나를 다시 만드실 때에는 말씀도 여러 차례 하셨고, 기적도 여러 번 보여 주셨고, 숱한 어려움마저 겪으셔야 했다." (성 베르나르도)

난 온전히 하느님께 속하고 내 삶이 그분 것이기에 당연히 내 책도 그분 것이고 그분께서 당신 영광을 위해 관리하실 것이다. 나는 다만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이고 내게 주어진 작은 몫을 하면 된다. 개종했기에 나를 경원하는 사람들의 편지와 기뻐하는 사람들의 편지도 읽게 될 것이다. 모든 것에 가능성이 열려 있다. 하느님은 직물을 짜듯 심지어 나의 실수나 죄까지도 포함해 내 존재를 지으셨다.

‘모든 일이 선을 향해 이루어지도록’하기 위해 그분의 새로운 사회를 위한 계획에 나를 넣어서 지은 것이다. 내가 매를 맞아야 한다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또 그것을 통해 그분이 구원하고자 하는 영혼을 위해 기꺼이 매를 맞을 것이다. 이제 모든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안다.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의 행복과 평화와 구원이다.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과 일치하는 것, 사람들을 그 분이 누리시는 기쁨 안으로 이끌어 줌으로써 그분과 하나 되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머튼의 글 중에서)
최우혁/ 미리암, 새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 회원, 로마 떼레지아눔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하고 마리아눔에서 마리아론을 공부하고 최근 귀국했다. 현재 서강대 등에 출강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