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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들의 말씀

~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 송영진 신부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강론>(2026. 1. 9. 금)(루카 5,12-16)
복음
<곧 그의 나병이 가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2-16
12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1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14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다.
15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1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의 복음강론

『주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먼저 주시는 분입니다.』

1)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와 ‘목적’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자비’입니다. 그리고 ‘목적’은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이 세상을(또는 인간들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던’ 상태로 회복시키신 일입니다. 그 일은, 죄 때문에 잃어버린 에덴동산으로 인간들을 다시 데리고 들어가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일의 결과를 우리는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병자는, 메시아의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을 상징합니다. <사실상 인류 전체입니다.>


스스로, 즉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의 처지를, 또 하느님 말고는 의지할 곳 없는 인간의 불쌍한 처지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깨끗하게 하다.’ 라는 말은, ‘처음의 상태로 원상 복구하다.’ 라는 뜻이고, ‘치유’와 ‘구원’을 뜻하는 말입니다.


뒤의 32절에,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루카 5,31-32).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병든 이들’이고 ‘죄인들’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이 필요 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나병’이라는 특정 질병만 생각할 것은 아니고, 또 어떤 병자의 치유 이야기로만 생각할 것도 아닙니다.

2) 병자의 말에서,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은,

‘주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은, ‘주님의 권능’은 확실히 믿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병자의 말은, 주님의 권능은 믿고 있지만, 주님께서 병을 고쳐 주실 의향이 있는지는 모른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믿음이란, 주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과 주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이 합해진 것입니다. 둘 중 하나가 없거나 부족하면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를 원문대로 번역하면 “나는 원한다.”입니다. 이 말씀은, 병자가 청하기도 전에, 또는 청하지 않아도, 그의 치유와 구원은 주님께서 먼저 원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 자체가 당신이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주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고, 그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


러면 기도는 왜 하는가? 기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기 위해서 준비하는 일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주시는 것을 안 받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3) 이 이야기가 가르쳐 주는 ‘예수님의 자비’는 인간 세상의 ‘약육강식, 적자생존’과는 정반대쪽에 있습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인간 세상에서는 ‘자신보다 작은 이들’을 낙오자 취급할 때가 많습니다.


리고 전체를 위해서 낙오자는 희생시켜야 한다는, 또는 스스로 희생하라고 강요하는 전체주의자들도 많습니다. 물론 착한 사람들이 더 많고, 그리고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그래서 그런 사람들 덕분에 인간 세상이 그런대로 돌아가긴 하지만, 그래도 이 세상은 ‘남들보다 작은 이들’이 살아가기에는 무척 힘들고 어려운 세상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 <하나도 버리지 않고 전부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의 자비’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이들을 도와주는 것으로 그치신 분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스스로 작은 이가 되셨습니다. “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4-5).”
<‘도움을 주는 나’와 ‘도움을 받는 너’를 구분해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똑같은 ‘작은 이’일 뿐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송영진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