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깊은 기도
묵상하면서 바치는 기도가 두 가지 있습니다.하나는 기도하는 사람이
의식적으로 자신을 하느님의 현존 안에 자리매김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세상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이끌어 가는 것은 사랑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랑이 기도를 불러일으키기보다 오히려 통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바라건 바라지 않건 세상에서 물러나와
가능한 한 하느님의 현존 안에 자리잡게 합니다.
이때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기도는
마음이 내킬 때마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참여 여부와 상관없이
하느님께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묵상 기도를 등껍질 속으로 움츠 러드는 거북에 비유할 수 있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다고 했 습니다.
거북은 마음이 내킬 때마다 그렇게 하지만 묵상 기 도는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묵상 기도는 하느님 께서 허락하실 때만 이루어집니다.
이 기도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이렇습니다. 영혼이 사랑하 는 대상과 합일하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 존재 깊은 곳에 기쁨을 주입시켜 당신 현존을 확 인시켜 주십니다.
영혼이 자신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 사랑스런 배필과 함께 머무는 능력을 키워주십니다.
분봉할때 멀리 날아가 터를 잡으려는 꿀벌들을 금속판을 가볍게 두 드리거나,
꿀을 탄 포도주나 약초 혼합물을 이용해 미리 준 비한 벌통으로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 구세주께서 은밀히 사랑의 말씀을 들려주거나 당신 현존을 느끼게 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강력한 매력으로
우리 영혼을 당신께 끌어당기십니다.
영혼은 성 아우구스티노가 그랬듯이 '오, 하느님!" 하고 소 리칩니다.
"저는 사방에서 당신을 찾았건만 당신은 제 안에 계셨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가에서 미친 듯이 예수님을 찾고 있을 때 그분은 혼이 나간 그의 이름을 부르십 니다.
바로 그 순간 마리아는 정신을 차리고 그분 발치에 몸 을 던집니다.
한마디 말씀이 그를 침잠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고 (때로 우리 안에 현존하심 을 소홀히 여길지라도) 그분이 우리를 바라보고 계심을 인정 할 때 그분에 대한 경외감에 주의력을 집중하게 됩니다.
내가 아는 한 여성은 어떤 표현을 들을 때면
하느님이 가까이계심을 절실히 느끼고
자신의 내면으로 깊숙이 잦아들어 마치 탈혼 상태에 들어가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런 상태가짧게 또는 한동안 계속된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 침잠하는 영혼은 그분께 철저히 매료 되는 까닭에 그가 쏟는 주의력에도 특이한 속성이 생깁니다.
마치 배를 타고 강물을 미끄러지듯
흘러가면서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것이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고요한 기도'라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이것은 그가 '자고 있는 능품천사'라 일컫는 것 에서 한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 영적 평안은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기쁨을 누리는 것 외에
다른 의식들을 잠재워 버릴 만큼 강렬합니다.
이는 자아 망각으로,
마치 선잠에 빠진 상태에서 벗들의 이야 기를 듣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시기에 영혼은
하느님의 현존을 예민하게 자각하지만 그러한 자각을 의식적으로 즐기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만일가가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려 한다면 거세게 반발할것입니다.
마치 낮잠 자는 아기를 깨웠을 때
보이는 반응처럼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천상의 목자께서는 예루살렘의 딸 들에게 간절히 당부하십니다.
예루살렘 아가씨들이여 노루나 들사슴을 걸고 그대들에게 애원하니 우리 사랑을 방해하지도 깨우지도 말아 주오, 그 사랑이 원할 때까지.(아가 2,7) 저절로 깨어나도록 놓아두어야 합니다. 테오티무스여, 하 느님께 침잠한 영혼은 그 순간을 이 세상이 주는 어떤 것과 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이 하시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깊은 평안을 누립니다. 마리아는 소리내거나 찬미드리지 않습니다. 마르타가 바쁘게 왔다 갔다 했지만 마 리아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마리아가 하는 일은 귀를 기울이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에게 떨어지는 물 한 방울까지 받아내는 그릇과 같습니다. 마르타는 이런 마리아를 깨우려 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 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 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 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0-42) 예수님 곁에서 평화롭게 조용히 머물기로 한 것은 마리아 의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사랑받던 성 요한은 최후만찬에서 스승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모습으로 그려지곤 합니다. 너무도 평온해 마치 잠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때의 분위기는 졸 수 있는 상황 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신비스런 졸음입니다. 그는 잠든 뒤 에도 어머니의 젖을 빠는 갓난아기와 같습니다. 테오티무스여, 그대는 배고픈 아기가 어머니 가슴에 얼마 나 힘차게 매달리는지 본 적이 있습니까? 아기가 어찌나 힘 차게 젖을 빠는지 어머니는 통증을 느끼기도 합니다. 아기가 배가 불러 젖꼭지를 놓으면 어머니는 아기를 어르기 시작합 니다. 아기는 여전히 어머니 품에 매달리지만 이제는 천천히 젖을 빨면서 평온해집니다. 그러나 아기는 깊이 잠들기 전에 품에서 내려놓으면 다시 칭얼거립니다. 아직 어머니 품에서 떨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우리 영혼도 이와 같 습니다. 감지할 수 있는 육체적 감흥이나 설명, 눈에 뛸 만한 활동이 없습니다. 지고한 의지만이 움직입니다. 하느님의 현 존은 궁극적 만족의 근원입니다. 이런 영적 상태에 있는 이 를 방해하는 것은 아기를 너무 일찍 어머니 품에서 떼어놓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이런 비유를 자신 있게 드는 것은 복된 성녀 데레사가 이를 탁월한 비유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대가 이처럼 순수하게 주님 곁에 있음을 알아차리 게 되거든 그 자리에 머무십시오. 이론적으로 따지려는 시도 는 아예 하지 마십시오. 이 확신에 찬 사랑, 구세주의 품에서 누리는 거룩한 졸음은 그대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제공합 니다. 거룩한 가슴에 기대 조는 것이 다른 곳에서 말짱한 정 신으로 있는 것보다 훨씬 유익합니다. 테오티무스여, 하느님 안에 침잠해 있는 영혼을 방해할 이 유는 없지만 평화와 휴식을 지속적으로 누릴 이유는 많습니 다. 거기에서 무엇을 찾겠습니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나 그이를 붙잡고 놓지 않았네."(아가 3,4) 여기 나와 함께 계시는 그분을 구태여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 다. 이성은 쓸모가 없습니다. 그분의 현존을 느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으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체험을 즐기 며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하면 어 떤 사람들은 종교 체험을 세세하게 고찰하고 분석해야 직성 이 풀립니다. 그들은 가진 돈을 세어보지 않고는 자신이 부 자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사실 이런 접근방식은 기도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하느님 께서 당신 현존에서 비롯되는 거룩한 평화를 허락하시는데 도, 그들은 이를 외면하고 자신의 반응을 도표로 그리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나는 만족하는가? 이 평화는 참된 평화인 가? 나는 얼마나 평온을 느끼는가? 그들은 하느님의 현존에 몰입하는 대신 자신의 감정을 지성으로 분석합니다. 만족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마음을 두는 것과 하느님이 주신 만족에 관심을 빼앗기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테오티무스여, 그대 자신이나 체험 앞에서 마음을 흐트러 뜨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대가 지나치게 마음을 쓰면 평온 을 잃고 맙니다. 평온을 사랑하되 지나치게 들뜨지는 마십시 오.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가 잠시 고개를 돌리다가 재빨리 품으로 파고들듯, 우리도 기도가 어떻게 진척되는지 궁금하다고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말고, 그런 분심이 들어도 재빨리 하느님의 현존으로 돌아오십시오. 경망스럽거나 무 분별한 몸과 마음의 움직임으로 이 거룩한 평온이 깨지지 않 을까 불안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녀 데레사는 우리가 기침뿐 아니라 숨을 크게 쉬는 것조 차 두려워 참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느님께 선 어쩔 수 없는 행동 때문에 당신 선물을 거두어들이시는 일은 없습니다. 거룩한 평온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때로는 영혼의 의지 와 조화롭게 움직이는 힘이 되고 의지에 종속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영혼은 하느님의 현존을 뛰어넘는 경험을 합니 다. 이때 영혼은 하느님 말씀을 직접 듣습니다. 이때의 말은 내적 감화로 드러나고 그에 대한 응답도 존경 어린 침묵으로 나타납니다. 하느님과 대화도 은밀하고 조용하게 이루어지 며 거룩한 평온을 깨는 일이 없습니다. 때때로 영혼은 사랑 하는 이의 말을 듣거나 그분께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그분께 서 자신에게 오셨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영혼은 하느 님의 현존을 어렴풋이 알고 자신도 그 자리에 있음을 느끼고 즐거워할 뿐입니다. 최후만찬 때 성 요한이 실제로 예수님의 가슴에 기댄 채 잠들었다면 어땠을까요? 만일 그랬다면 성 요한은 스승의 현존을 깨닫지 못한 채 그 안에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하 느님의 현존 안에 단순히 머무는 것보다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 자리 잡으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합니 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 자리 잡으면 영적 대화와 나눔이라 는 강한 끈으로 묶이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기 뻐하시는 그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특전입니까! 벽감(장식을 위해 벽면을 오목하게 만든 공간 - 옮긴이)에 안치된 조각상이 말을 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대가 벽감 속 조각상에게 뭘 하느냐고 묻는다면 조각상은 "내 주인님이 나를 이곳에 놓아두었기 때문입니다."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곳에 있는 건 의미가 없지 않느냐?" 하면 "주인님은 무슨 일을 하라고 나를 여기에 안치한 것이 아니랍니다. 그저 이곳에 있기만 하면 되는 것 이지요." 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는 "한심한 조각 상 같으니라고. 네가 거기 있다고 달라지는 게 무엇이냐?" 하고 비웃을 겁니다. 그런데 조각상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 때문에 여기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주인님이 좋아하시기 때문 입니다. 난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넌 주인을 볼 수 없지 않느냐? 그런데 어떻게 주 인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한단 말이냐?" "옳은 말입니다. 난 그분을 볼 수도 찾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사랑하는 주인님이 나를 바라보며 기뻐하시는 것으 로 만족합니다." 그대는 계속 조각상과 입씨름할 겁니다. "하지만 너도 최 소한 네 주인에게 봉사하고 싶을 것 아니냐?" "그렇지 않습니다. 난 주인님이 바라시는 일 외에는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넌 이 벽감 속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조각상으로 지내는 것 말고 바라는 게 없단 말이냐?" 현명한 조각상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주인님께 기쁨이 되 는 한 나는 이 벽감 속 조각상으로 있을 것입니다. 내가 만족 하는 것은 나를 소유하신 분이 나를 이곳에 두는 것을 바라 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의 나로 존재하는 것은 그분 때 문입니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것,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 기를 바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깊은 잠에 곯아떨 어졌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거룩하신 현존 안에 온전히 머물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분 눈앞에서뿐 아니라 그분의 원의에 따라 잠을 자게 됩니다. 조각상을 벽감에 안치하듯 우리를 침상에 눕히는 이는 천상 조각가인 우리의 조물주이십니다. 새들이 둥지에 깃들이듯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평 안해집니다. 우리가 깨어났을 때 하느님께서 밤새 우리와 함 께 계셨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그분 한테서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해도 야곱처럼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 르고 있었구나."(창세 28,16)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평온은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에 참으로 훌 륭한 기도입니다. 영혼은 자기만족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 습니다. 무아경의 사랑이 갖는 핵심은 우리 자신의 만족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마음에 드는 데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지음
버나드 뱅글리 엮음
성찬성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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