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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영성이야기

~ 경애와 평등주의를 가르치던 사상가 / 묵자 ~



 

공자사상을 체계적으로 공격한 최초의 인물

      “모두의 이익이 모든 행동의 기준 돼야” 주장
      공격과 침략은 반대…불가피한 방어는 허용
      감정에 대한 고려없는 지나친 공리주의 한계

묵자(墨子, 중국발음 ‘모쯔’)의 본명은 묵적(墨翟, 중국 발음으로 ‘모티’)이었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도 묵자 자신에 대한 항목은 없고 맹자와 순자를 소개하는 곳에 “묵적은 송나라의 사대부로서, 방어전에 능숙했고, 근검절약을 실천하였다. 어떤 이는 공자와 동시대의 인물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그 이후에 살았다고도 한다”라는 한자로 24자의 언급이 있을 뿐이다. 출생지도 〈사기〉의 기록과 달리 공자와 같은 노(魯)나라일 것이라 보기도 하고, 생존연대도 어림잡아 대략 기원전 479-381년으로 보고 있다.

또 그의 이름 ‘묵(墨)’이 성이라기보다 노예 출신을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짐작하기도 한다. 옛날에는 형벌의 하나로 이마에 먹물을 새겨 넣고 노예로 삼던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실제 노예였는지는 모르지만 방어무기 제조에 재능이 있었다고 하고 근검절약이 몸에 밴 것을 보면 천민 출신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중국철학의 대가 풍유란은 묵자와 그의 제자들을 두고 어느 나라가 공격을 당하면 그 때마다 임시로 고용되어 그 나라를 방어해주던 협객(俠客, knight-errant) 집단이었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아무튼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그가 공자 이래 공자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공격한 최초의 사상가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의 후계자 맹자는 자기의 사명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양자(楊子)와 묵자의 사상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묵자의 이름은 전국(戰國) 시대 이후 한(漢)대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공자와 함께 등장할 만큼 영향력이 컸다. 그러나 그 후 2천년 이상 묵자의 사상은 실질적으로 거의 잊혀졌다가 청(淸)대 말 몇몇 관심 있는 학자들의 노력으로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묵자의 사상은 그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책 〈묵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거기 있는 모든 생각들이 묵자 자신만의 생각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묵자와 그를 따르던 후학들의 생각을 집성하여 〈묵자〉라는 이름의 책으로 남긴 것이다. 〈노자〉, 〈맹자〉, 〈장자〉의 경우와도 같다. 모두 한 사람의 단독 저작일 수 없는 책들이다.

묵자의 사상은 그가 말하는 ‘십론(十論)’으로 요약될 수 있다. 두루 사랑함, 공격하지 않음, 어진이를 높임, 지도자를 따름, 검소한 장례식, 검약, 음악 반대, 하늘의 뜻, 귀신 존경, 반운명론 등이다. 그런데, 이 열 가지 주장은 모두 ‘이(利)’라고 하는 한 가지 기본 원칙을 전제로 깔고 있다. 물론 이 때의 이는 개인의 이기적인 사욕에 따른 이익추구와 다른 것이다. 묵자에 의하면 ‘세상에 이익을 증진시키고, 해를 제거함(興天下之利 除天下之害)’이 모든 행동의 목표요, ‘국가인민백성의 이익(國家人民百姓之利)’을 가져다 주는가 하는 것이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묵자는 남을 사랑하는 것마저도 그것이 멀리 보아 모두에게 이롭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교가 ‘이(利)’와 ‘의(義)’를 대립시키고 이와 상관없이 의에 입각해서 행동하라고 한 것과 달리, 묵자는 나라와 백성에게 최대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 자체가 곧 의라고 보았다. ‘최대 다수에 최대 행복을 확보하는 것이 모든 윤리와 법의 목적이라 주장한 영국 철학자 벤삼(Bentham)의 철저한 ‘공리주의(Utilitarianism)’ 원칙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제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십론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묵자의 가르침을 살펴보기로 한다.
겸애(兼愛): 묵자의 대표적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나라가 어지러운 것이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 보았다. 따라서 모두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롭게 함(兼相愛, 交相利)을 통해 세상에 평화가 올 수 있다고 했다. 요즘 말로 하면 상생이나 윈윈(win-win) 관계를 가지라는 이야기이다.

‘겸애’란 구체적으로 모두를 ‘차등 없이’ 한결 같은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남의 나라를 자기 나라처럼 보고, 남의 집을 자기 집처럼 보며 남의 몸을 자기 몸처럼 보라”고 했다. 내 부모를 사랑하듯 내 친구의 부모, 나아가 알지 못하는 사람의 부모도 똑 같은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심지어 남의 부모를 먼저 사랑하므로 남이 나의 부모를 사랑하도록 하라고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면 남녀나 장유(長幼)나 귀천 등의 차이를 두지 말고 모두 평등하게 사랑할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는 유가에서 내 부모를 친구의 부모처럼 사랑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므로 우선 내 부모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확대해서 친구의 부모, 남의 부모 등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애유차등(愛有差等)’의 주장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겸애설은 어느 면에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절대적 사랑, 나를 내어주는 사랑, 이른바 ‘아가페’ 사랑에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볼 수도 있다. 물론 앞에서 말한 것처럼 묵자가 겸애를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이롭기 때문이라고 하는 데 비해 아가페 사랑은 그런 것마저도 생각지 않는 무조건적 사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도 목전의 이해관계를 따지는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이 모두를 좋기에 실천하는 것이라 본다면 둘이 그렇게 다르다고만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비공(非攻): 겸애의 원칙에서 자연적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남의 나라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비공설이다. 공격을 하여 전쟁이 일어나면 인명과 재산 상의 피해가 말로 할 수 없이 크다. 패전국의 입장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승전국의 입장에서 보아도 이보다는 해가 더 크므로 남의 나라를 공격하는 일은 어리석기 그지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맹자도 전쟁을 반대했지만, 맹자는 그것이 의롭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데 반하여 묵자는 그것이 이롭지 못하기 때문이라는데 차이가 있다.

한 가지 분명히 할 것은 묵자가 공격은 반대했지만 공격해오는 적을 막는 방어전까지 반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무죄한 나라를 공격하는 호전국의 포악한 임금에 대해 일종의 물리적 제제를 가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 보았다.상현(尙賢): 국가와 국민들에게 이를 가져다 주기 위해서는 나라의 일자리를 귀족이나 기득권자들끼리만 나누어 가질 것이 아니라 ‘농민이나 공인이나 상인들 중에서도 능력이 있으면 들어서 써야 한다’고 했다. 이와 함께 어진 사람을 존경하는 상현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 국가가 일정한 법칙에 따라 다스려지려면 이를 주관할 현인이 지도자가 되고, 백성들은 모두 그의 판단을 믿고 따르다가 결국은 그 지도자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상동(尙同)설도 주장했다.

절장(節葬)과 절용(節用): 묵자는 유가에서 강조하는 장례절차를 허례허식에 치우친 것으로 보았다. 호화로운 관을 사용하는 것도 낭비이고 부모 상을 당해 3년간 곡을 하는 것도 무리라고 보았다. 돈을 쓰는 것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지만 이익이 되지 않는 곳에 쓸데 없이 쓰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낭비를 하면서도 나라가 부강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농사를 짓지도 않고 추수를 하려는 것 같이’ 무모한 짓이라고 보았다.

비악(非樂): 음악을 배격한다는 것이다. 악기가 배나 마차처럼 유용하다면 자기는 악기에 반대하지 않겠지만, 악기나 음악은 나라에 이를 가져다 주는데 아무 쓸 데가 없다고 보았다. 사람에게 배고픔, 추움, 피로 등을 피하려 하는데, 악기나 만지고 있어서야 언제 음식, 옷, 쉼터가 마련되겠는가 했다. 이것도 음악이 좋아 밥 먹기도 잊어버렸다는 공자에 대한 비판인 셈이다. 천지(天志)와 명귀(明鬼)와 비명(非命): 묵자는 상제(上帝)의 존재를 믿고,상제의 뜻을 ‘천지’라고 하였다. 성왕들은 하늘의 뜻에 따라 사람들을 두루 사랑하고 그들에게 이익을 주어 크게 보상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어떻게 하늘의 뜻을 알 수 있었던가? 위로 하늘을 경외하고 중간에 귀신을 섬기고 아래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귀신을 멀리할 수 없다. 유가에서는 귀신을 경이원지(敬而遠之)하라고 했는데, 묵자에 의하면 “귀신이 없다고 하면서 제사 지내기를 배우라는 것은 손님도 없는데 대접하기를 배우는 것이나 고기도 없는데 그물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묵자는 또 운명이 하늘이 정해주는 것이라 믿고 운명론에 빠진 유가를 비판하고 물론 생사화복을 결정하는 힘이 하늘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늘도 인간의 노력여하에 따라 그들에게 상벌을 주는 것이므로 운명론을 배격해야 한다고 하며 비명(非命)론을 펼쳤다.

이상에서 우리는 묵자의 사상이 지극히 실질적이고 실용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그런 면에서 현대 사상과 많은 면에서 공통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왜 그의 사상이 그 동안 동아시아 역사에서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가 인간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장례식을 간소하게 치르라는 것, 음악으로 시간과 금전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모두 좋은 말이지만, 이런 것은 목전의 손익 계산으로만 따질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장자〉마지막 장에 중국 고대 사상가들의 교설을 비판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거기서 장자는 묵자가 주장하는 대로 사는 삶이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가?”고 했다. 묵자의 공리주의적 사고는 당장 쓸모 없는 것 같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더 큰 쓸모가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장자의 ‘쓸모 없는 것의 큰 쓸모(無用之大用)’라는 사실을 간과한 셈인가? 그러나 지금처럼 온통 사치와 낭비로 지구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고, 욕심 때문에 하루도 평화스러운 날이 없는 세상에서 묵자의 이런 현실감 넘치는 사상은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일찍이 작고한 후배 이동삼 교수가 필자에게 준 『墨子의 社會改革思想』「한국방송통신대학 논문집 제5집」(1986년 6월) 63-110을 많이 참조했음을 밝혀 다시 한번 고인의 학문적 업적을 기린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