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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들의 말씀

~ 대림 4주간 월요일 / 송영진 신부 ~

<12월 23일 강론>(2025. 12. 23. 화)(루카 1,57-66)


복음
<세례자 요한의 탄생>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7-66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의 복음강론

『인생의 대림 시기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됩니다.』

1) 세례자 요한의 출생은 ‘메시아 강생’이 임박했음을 나타내는 ‘표징’이 되고(루카 1,76),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준비하는 대림 시기가 곧 끝난다는 표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틀 뒤가 성탄절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할 필요는 없습니다.


렇지만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 이루어지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 인생의 대림 시기’는 계속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이천 년 전에 ‘이미 오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시간입니다. ‘재림’은 떠나셨던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일이 아니라,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이 당신의 모습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시는 일입니다.


<매일미사 책에서는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오신다.’고 표현했는데, 그렇게 표현하면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를 떠나신다.’도 되기 때문에, 옳은 표현이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늘, 항상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2)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메시아 강생’과 ‘요한의 사명’을 믿게 된 것은

‘성령의 인도’ 덕분이지만(루카 1,41.67), 마리아의 증언도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루카 1,39-55). 그래서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은 우리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아기의 이름을 지을 때 엘리사벳이 ‘요한’이라고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즈카르야가 ‘천사의 말’을 엘리사벳에게 전해 주었고, 엘리사벳이 그 말을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즈카르야가 ‘아기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쓴 것은, 자신이 천사의 말을 믿게 되었음을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해서 말을 못하게 되었던 그가 다시 말을 하게 된 것은, ‘기쁜 소식’을 선포할 자격을 얻었음을 나타내고, 또 사제의 자격도 회복했음을 나타냅니다.
<62절의 ‘손짓으로 물었다.’ 라는 말은, 즈카르야가 ‘듣는 능력’도 잃었음을 나타냅니다. 그에게 주어진 표징이 왜, ‘말을 못하다가 다시 하게 되는 것’으로 주어졌을까? 그것은 아마도 세례자 요한의 사명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요한의 사명은 회개를 선포하고 메시아를 증언하는 일인데, 그 일은 일차적으로 ‘말’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64절의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라는 말은, 68절-79절에 있는 ‘즈카르야의 노래’를 가리킬 것입니다.

3)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라는 말과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라는 말은, 이웃과 친척들이 아직 ‘메시아 강생 소식’을 모르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그 소식을 들었고, 믿었다면, ‘모든 사람’에게 주님께서 큰 자비를 베푸셨음을 기뻐했을 것이고, 또 주님의 손길이 ‘모든 사람’을 보살피신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65절의 ‘두려움에 휩싸였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힘’을 느끼고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4) ‘계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과 계획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시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그 뜻과 계획을 믿고, ‘삶으로’ 실천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다시 전해 주는 생활입니다. 즈카르야가 처음부터 천사의 말을 믿었다면, 곧바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그는 ‘즈카르야의 노래’를 아기가 태어난 후가 아니라, 태어나기 전에 불렀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경우를 보면, 천사의 말을 바로 믿었고, 그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바로 알렸습니다.
<엘리사벳에게 가기 전에 먼저 요셉에게 알렸을 것이고, 가족에게도 알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을 통해서 나중에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노래’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후가 아니라 태어나시기 전에 부른 노래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여러 가지 계시를 받게 됩니다. <전체 교회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계시일 수도 있고, 그냥 사적이고 작은 일에 관한 계시일 수도 있습니다.>


날마다 듣는 말씀 한 마디, 한 구절이, 또는 어떤 체험들이 하느님께서 나에게 내려 주시는 계시입니다. 신앙인은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고, 각자 자신이 받은 계시를 자신의 삶으로 실행하는 사람이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그 계시를 전하고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송영진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