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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들의 말씀

~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 송영진 신부 ~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강론> (2026. 5. 31.)(요한 3,16-18)


복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6-18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의 복음강론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1) 성모님의 예수님 잉태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잘 드러내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성모님의 예수님 잉태는, 아버지 하느님과 성령과 예수님이 분명히 구분되어 있어서, 각각의 일을 하신 일로 보이지만, 사실 그 일은 인류 구원이라는 하나의 목적으로, 메시아 강생이라는 하나의 일을 함께 하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온 몸으로 받아들여서 그것을 온 삶으로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일어난 일도 삼위일체의 신비를 잘 드러냅니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1-22)”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아버지와 성령이 함께 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류 구원 활동은 예수님 혼자서 하시는 일이 아니라, 아버지와 성령이 함께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 일에 참여하는 생활입니다. <그것은 ‘나’를 구원하기 위한 일이니 ‘나의 일’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3-16).”


신앙생활은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누구나, 의식을 하지 않더라도, 성부, 성자, 성령의 일치와 사랑에 동참하고 있고, 성부, 성자, 성령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모든 신앙인은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고, 자신의 삶으로 그 신비를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은사’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일러둡니다. 하느님의 영에 힘입어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할 수 없고,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코린 12,3-7).”


바오로 사도가 성령, 주님, 하느님으로 구분해서 말한 것은 삼위일체를 나타낸 것입니다.
리가 신앙인이 된 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도우심과 예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가 아니라 ‘왜?’를 물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모른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당신을 삼위일체이신 분으로 계시하셨는가?” 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사랑하니까.”입니다.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에.”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보살피시는 아버지의 사랑과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우리 안에서 항상 살아 계시면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령의 사랑이, 셋으로 구분되면서도 하나인 사랑이라는 것이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성체성사처럼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이 말에서 ‘알다.’는, ‘일치를 이루다.’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묵상할 때, ‘삼위’보다는 ‘일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는 것은 삼위일체의 ‘사랑의 일치’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송영진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