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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들의 말씀

~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 이수철 신부 ~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

<판단과 분별의 잣대>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ㄴ).

 

오늘 화답송 후렴이 오늘 말씀을 요약합니다. 

올바른 길은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랑의 길, 순종의 길입니다.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짧은 일생을 영원 조국에”

제 둘째 베네딕도 형님이 가장 존경했던 포철의 신화적 인물, 대한민국의 참된 애국자 철강왕 박태준 회장(1927-2011)의 묘비명입니다. 평생 나라 사랑이 그에게는 유일한 판단의 잣대였을 정도로 시종여일 청렴결백하게 살았던 분의 묘비명답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말씀입니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마음부터 수련해야 한다.”

“글이란 마음의 깃발이니, 마음속에 정성을 다하면 반드시 밖으로 드러난다.”

마음이 좋아야 글도 좋습니다. 글에도 향기가 있는 법, 사랑의 마음에서 솟아나는 아름답고 생명력있는 향기로운 글이겠습니다.

 

어제 삼종기도후 교회일치주간 첫날 레오 교황의 강론중 일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눈에 소중하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날마다 기도와 성찰할 시간을 내도록 하자. 그리스도교인들의 온전한 일치를 위해 기도를 강화하도록 하자.”

 

사랑은 판단과 분별의 잣대입니다. 올바른 판단을 위한 최종 잣대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할 때 하느님의 뜻에 따른 판단이요 분별이겠습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기도와 사랑은 함께 갑니다. 참으로 기도하는 사랑일 때 올바른 분별에 판단입니다.

 

판단의 잣대는 사랑임을 몰랐기에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은 사랑이 아닌 단식을 판단의 잣대로 삼아 추궁하듯 예수님께 답을 묻습니다. 절대적인 법, 사랑을 놔두고 상대적인 수행인 단식을 잣대로 말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에 저절로 감탄하게 됩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의 거부나 평가절하가 아니라 단식에도 때가 있다는,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축제인생을 고해인생으로 만들지 말고 기쁨과 축제인생을 즐기고 단식의 때가 되면 그때 단식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이요 예수님 자체가 판단의 잣대도 됩니다. 참된 단식은 이미 마태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단식 역시 자기 과시가 아닌 겸손한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는 “단식을 사랑하라” 했습니다. 의무의 단식 수행이 아닌 하느님 사랑의 자발적 표현의 수행인 단식을 권합니다. 어느 현자는 “먹고 겸손한 것이 안먹고 교만한 것보다 낫다”는 유머스러운 충고로 겸손한 사랑의 단식을 강조했습니다. 그리하여 옛 수도교부들은 엄격한 단식중에도 손님이 왔을 때는 환대의 사랑에서 단식을 해제하기도 했습니다.

 

이어 주님은 사고의 전환,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단식은 물론 모든 수행에도 고도의 분별의 지혜가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새 천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고,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듯이, 새 포도주는 늘 새 부대에 담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늘 새 부대의 마음을 지닐 때 진짜 건강한 마음입니다. 새 부대의 마음이 새 포도주의 현실을 알아내어 담아 실천합니다.

 

참으로 사랑을, 예수님 마음을 분별의 잣대, 판단의 잣대로 삼을 때, 늘 새 부대의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개방적이고 유연하고 신축성있는, 넉넉하고 편안한 새 부대의 예수님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한결같은 말씀공부가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오늘 사무엘상권의 사울의 결정적 실수는 탐욕으로 하느님의 뜻을, 순종을 거슬렸다는 것입니다. 구구한 변명으로 자신의 탐욕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합니다만 주님이 원하시는바 당신 뜻에의 순종이었습니다. 탐욕으로 인해 하느님의 뜻이 판단의 잣대임을 잊었습니다. 사무엘을 통한 주님의 준엄한 질책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사울은 안타깝게도 순간적 탐욕의 유혹에 빠져, 주님 말씀의 경청과 순종이 올바른 길임을 잊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했던 예수님의 지혜로운 마음이 그대로 판단과 분별의 잣대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새 포도주>의 현실을 담아 낼, <새 부대>의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 마음>과 하나되어 그 마음을 판단의 잣대로 삼아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